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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175화 (17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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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엔 네가 갈리온을 방패로 쓰지만 않았어도 그가 죽을 일은 없었을 것 같은데.”

마왕이 지극히 정상적인 발언을 하자 김창이 얼굴을 확 구겼다.

“그럼 지금 너는 갈리온이 죽은 게 내 잘못이라는 소리냐?”

“일단 내 잘못은 아닌 것 같은데······.”

“너도 참 뻔뻔한 놈이로군.”

그건 오히려 내가 해야 할 말이 아닌가? 마왕이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하는 얼굴로 쳐다봤지만 김창은 신경 쓰지 않았다.

갈리온은 불에 타죽었고 영혼까지 태워버릴 강력한 화염을 일으킨 건 마왕이다. 사정이야 어쨌건 원인과 결과만을 따지자면 마왕이 갈리온을 죽인 게 맞지 않나?

그러니 이건 정당한 복수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름 갈리온에게 정도 들고 그랬는데 그걸 홀랑 태워죽여? 참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덤벼라. 갈리온의 복수를 해야겠으니까.”

“···그래, 그냥 내 잘못인 걸로 하자고. 말해봤자 들을 것 같지도 않으니.”

마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김창을 향해 뚜벅뚜벅 다가왔다. 놈은 확실히 사천왕 이상으로 강했다.

그 몸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사악한 기운은 유독성을 가지고 있어 숨을 삼키기만 해도 목에서 피를 토하게 될 것이다.

반신의 격에 오른 김창은 이미 인간의 육체를 초월한 덕에 호흡에 지장이 있진 않았지만 그래도 움직임이 조금 둔해진 걸 느꼈다.

아무래도 저 유독한 기운이 신체에 조금씩 피로를 누적시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독개구리도 아니고 별 이상한 재주가 다 있군.”

“흠, 내 몸에서 나오는 기운을 말하는 건가? 신검을 뽑은 용사라 할지라도 독기로부터 멀쩡할 수는 없을 텐데 제법 잘 버티는군. 아니면 괜찮은 척을 하는 건가?”

“내가 듣기로 일부러 봉침을 맞는 사람도 있다고 하던데 대충 그거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뭘. 독도 잘 쓰면 약이 된다는 말도 있잖나?”

봉침이야 잘 쓰면 약이 될 수도 있지만 지금 마왕의 몸에서 나오는 독기는 오로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만 나오는 것이다.

당연히 봉침 같은 것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유독한데 저리 멀쩡히 입을 놀리고 있으니 마왕으로선 기가 찰 노릇이었다.

“···대체 네 정체가 뭐냐? 신검을 뽑지도 않은 주제에 사천왕을 전부 쓰러트린 것도 놀라운데 독기 속에서도 멀쩡하다니?”

“이세계 2회차 플레이어.”

“뭐?”

“네가 알 거 없다는 소리야.”

김창이 먼저 움직였다. 벼락의 화신으로 변한 그는 정말 벼락처럼 빠르게 움직였고 마왕은 한 박자 늦게 공격에 대응했다.

그가 몸에 두른 독기는 물리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어 한 점에 사악한 기운을 집중시키자 마치 방패처럼 주인을 보호했다.

그러나 김창이 휘두른 벼락의 칼날은 먹구름을 흩어내듯 검은색 기운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마왕이 당황했으나 오래 가진 않았다.

허공을 향해 손을 뻗은 그가 아공간 속에서 칼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사악한 마왕답게 칼 역시 새까만 색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칼끝에서 독기가 세차게 휘몰아쳤다.

“죽어라!”

칼끝에 모였던 독기가 빠르게 질주하며 용의 형상을 이루었다. 독으로 이루어진 용의 아가리를 쩍 벌리고 김창을 집어삼키려 들었다.

꽈르릉! 김창은 새까만 용을 쳐다보지도 않고 벼락으로 떨어트리고는 곧장 마왕을 향해 뛰었다.

벼락을 맞고 흩어졌던 독기가 빠르게 주인을 향해 돌아갔다. 마왕은 새까만 칼을 지휘봉처럼 다루며 독기를 통제했다.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독기를 모아 방패를 만들려는데 그보다 한 박자 빠르게 김창이 치고 들어갔다.

“큭!”

마왕의 가슴팍이 찢어지며 피가 확 하고 튀었다. 생긴 건 인간인데 속은 인간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찢어진 상처에서 튄 피는 붉은색이 아니라 검은색이었다.

저거 속까지 썩었군. 김창이 쯧 하고 혀를 차며 다시 한번 벼락의 칼날을 휘둘렀다. 마왕 역시 공격에 반응해 움직였으나 매번 한 박자씩 느렸다.

“이 무슨······.”

마왕으로선 몹시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명실상부 대륙 제일의 강자였고 그를 죽일 수 있는 건 신검을 뽑은 용사 외엔 없었다.

엄밀히 말해서 신검을 뽑은 용사라고 해서 자신을 반드시 이길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신검은 어디까지나 마왕을 죽일 수 있는 도구일 뿐, 마왕을 죽이는 것은 용사의 실력에 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검을 뽑았다고 해도 용사의 실력이 허접하다면 역으로 마왕이 용사를 죽이고 신검을 타락시킬 수도 있었다.

‘바스알의 공주가 정말 당첨을 뽑은 건가? 만약 이 남자가 신검을 뽑았다면······.’

마왕은 몹시 끔찍한 상상을 하고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김창은 신검을 뽑지 않고서도 자신을 압도하고 있는데 그가 신검을 들고 있었다면 자신은 정말 죽은 목숨이었을 테니까.

“크억!”

또 한 번의 상처가 마왕의 몸에 생겼다. 그는 완전히 잘려 바닥으로 떨어진 왼팔을 보고서 큭 하고 신음을 흘렸다.

지금껏 그 누구도 자신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는데 이 무슨 추태인가. 대등한 승부를 펼치다 졌다면 그리 부끄럽지 않을 테지만 지금 이 꼴로는······.

“후우······.”

마왕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김창은 굳이 추격하며 몰아붙이지 않았는데 그 여유로운 태도가 마왕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물고서 칼을 머리 위로 들었다. 질 때 지더라도 이런 식으로 질 수는 없었다.

“···제법 싸우는군. 이만한 적수를 만나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만약 네가 이 공격을 받아낸다면 널 인정하도록 하지.”

“염병,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하고 처맞기만 한 주제에 뭔 개폼이냐.”

마왕은 김창의 말을 무시하고 칼끝에 모든 독기를 모았다.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아서 김창이 호오 소리를 내는데 마왕이 칼을 내려 그를 겨누었다.

“죽어라, 용사.”

쿠―오―오― 오! 거대한 짐승의 외침은 용의 것이었다. 독기로 용의 형태를 흉내 내고 있을 뿐이지만 그 기세만은 진짜 용과 다를 게 없었다.

김창은 자신을 향해 빠르게 질주하는 용의 아가리를 보고서 흠 소리를 냈다.

“이 새낀 학습 능력이 없나?”

꽈르릉!

용의 포효조차 묻어버릴 굉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창백한 빛은 세상 모든 것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다 못해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아무리 거대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용이라고 해도 자연의 위대함에 비하면 일개 생물일 뿐.

아가리를 쩍 벌리고 모든 걸 집어삼킬 듯 날뛰었던 용은 오히려 벼락 속에 집어삼켜졌다.

“아까도 안 먹혔는데 지금은 먹히겠냐?”

한심하다는 목소리를 들은 마왕이 허탈한 듯 팔을 떨궜다.

“바스알의 공주가 말도 안 되는 괴물을 불러냈군······. 아무리 용사라고 해도 이게 말이 되나?”

“말이 안 될 건 뭐냐. 세상은 넓고 잘난 사람은 많은 법인데.”

“하기야 그 말도 맞지. 흠, 나는 아무래도 우물 안 개구리였던 모양이야. 한때 대천사였던 나라고 해도 다른 차원의 강자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건가······.”

또 쓸데없는 한탄을 하고 있는 마왕을 보며 칼을 휘두르려 했던 김창이 문득 물었다.

“잠깐, 뭐라고?”

“아무래도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던 모양이라고.”

“그거 말고.”

“한때 대천사였다는 것 말이냐?”

“너 대천사였냐? 그런데 왜 마왕이 됐어?”

“그거야 내가 타천하여 지상으로 추락했기 때문이지. 대천사로서 너무 많은 탐욕을 부렸고 그로 인해 신의 징벌을 받아······.”

“아니, 네 사정 따윈 안 궁금해.”

아깐 왜 마왕이 됐냐고 묻지 않았나? 마왕이 어이없어 하는 가운데 김창이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대천사 출신이었단 말이지? 그럼 널 죽이면 신성을 주겠군. 내 알기로 너 같은 놈은 대개 신성을 줘.”

“···음? 신성?”

“공주한테 듣기로 넌 신검이 없으면 죽일 수 없다지?”

“그래. 원래 하늘궁전에 기거하는 천사는 신의 일부기 때문에 오직 신만이 죽일 수 있다. 나는 타락하여 지상에 떨어진 몸이지만 그 근본은 대천사. 때문에 신의 힘이 없으면 날 죽일 수 없는 것이다.”

“아, 그러쇼.”

김창이 칼을 들고 마왕에게 뚜벅뚜벅 다가왔다.

“···네가 강하다는 건 알겠지만 난 죽지 않는다.”

“내가 말을 안 했는데, 나는 사실 반신이야.”

“뭐?”

“반신이라고. 반쪽짜리 신. 너는 신의 힘이 담긴 무기로만 널 죽일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게 정말인지 어디 한번 확인해보자고. 반쪽짜리 신의 칼로 찌르면 혹시 반만 죽나? 궁금한데.”

“아니, 그게 무슨······ 크아악!”

김창이 다짜고짜 마왕의 어깨를 찔렀다. 벼락의 힘이 강하게 발현하며 마왕의 몸을 지졌으나 그걸로 숨이 끊어지진 않았다.

“안 죽네. 그럼 여길 찌르면 죽나?”

“끄아악!”

“그럼 여긴?”

“끄악! 끄아악!”

“이상하네? 왜 안 죽지?”

김창은 마치 해적 룰렛을 하듯이 마왕의 몸을 구석구석 찔렀다. 하도 찔러서 이젠 더는 찌를 때가 없어졌음에도 마왕은 여전히 숨이 붙어 있었다.

벼락의 화신이 가진 힘을 생각하면 마왕은 죽었어도 수십 번은 더 죽었어야 했다. 아무리 완전히 신이 아니라고 해도 무려 반신의 칼인데 죽지 않는 걸 보면 정말 신검이 있어야만 마왕을 죽일 수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내가 이쪽 세상의 신이 아니라서 그런 건가? 하기야 신이라는 것도 다 같은 게 아닐 테니 신성의 힘도 서로 호환이 안 될 수도 있지.’

혼자서 고개를 주억거리던 김창이 또 한 번 칼을 들 때였다.

“이 개자식아! 차라리 그냥 죽여라!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내가 지금 너 괴롭히려고 이러냐. 너 죽이려는데 네가 안 죽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내가 이 정도 노력했으면 네가 혀라도 깨물고 죽어야 하는 거 아냐?”

입에서 지껄인다고 다 말인가? 마왕은 이 정신 나간 용사 때문에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내 힘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데 이러면 어쩔 수 없군. 역시 신검을 뽑지 않고선 방법이 없는 건가.”

김창이 드디어 자신을 죽이려는 걸 포기하는 듯하자 마왕이 반색하며 소리쳤다.

“내가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지! 날 봉인해라. 그럼 날 죽일 수는 없어도 이 세상을 지킬 수는 있지 않겠나? 그리고 날 죽이는 건 계속해서 용사를 불러내 신검을 뽑은 뒤에 하면 될 테고······.”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군.”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왕은 드디어 이 끔찍한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안 돼.”

“어째서!”

“네가 신성을 줄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그 신성이라는 게 대체 뭔데? 물론 마왕도 신성이 뭔지는 알지만 그게 마왕을 죽인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었나?

“혀 안 깨물게 조심해라.”

“뭐?”

짝!

갑작스러운 소리에 마왕이 당황하는 가운데 갑자기 시야가 암전됐다. 강렬한 충격이 머리를 뒤흔들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김창은 뺨을 얻어맞고 기절한 마왕의 머리를 쥐고서 질질 끌고 나갔다.

“아참, 차원문 닫았지.”

기절한 마왕을 데리고 바스알 성으로 돌아가려니 차원문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마왕군이 차원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올까 싶어 문을 닫은 것이다.

김창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마왕을 질질 끌고서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면 나오겠지 뭐.”

그는 기절한 마왕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바스알 성을 향해 걸었다. 아마 며칠은 걸리는 여정일 텐데 별 상관은 없었다.

밤이 어두워지고 야영을 준비하고 있자니 기절했던 마왕이 몸을 부스럭대는 게 보였다. 김창은 모닥불에 땔감을 던지며 말했다.

“일어나지 마라. 그냥 계속 기절한 척해. 이건 충고야.”

“······.”

마왕은 얌전히 시키는 대로 했다. 또 얻어맞긴 싫었으니까.

“아마 내일이면 도착할 것 같은데.”

김창은 기절한 척한 마왕의 머리를 붙잡고 끌고 다녔다. 마왕으로서 참으로 치욕적인 일이었으나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마왕은 김창이 뭔 생각으로 이러는진 몰라도 그저 이 굴욕이 얼른 끝나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김창은 일주일 만에 바스알 성에 도착했고 덕분에 짐짝처럼 질질 끌려다니던 굴욕도 끝이 날 수 있었다.

“아니, 용사님! 이건?”

“마왕.”

마왕을 마치 오다 주운 쓰레기처럼 말하는 김창을 보고서 엘리아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창은 자기 할 일을 했다.

“차원문은 열었나?”

“아, 물론입니다. 그런데 그건 어쩌시려고······.”

“어쩌긴, 죽여야지.”

그러니까 뭔 수로? 엘리아나가 당황하든 말든 김창은 마왕을 끌고서 신검이 꽂힌 곳으로 갔다.

여전히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던 신검이 김창을 보자 눈에 띄게 흔들렸다. 저 새끼 저거 아무래도 지성이 있는 것 같은데.

김창이 흠 소리를 내며 마왕을 바닥에 내던졌다.

“이제 기절한 척 그만하고 일어나.”

마왕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뭐, 뭘 하려는 거냐? 날 여기 데려와서 뭘 어쩌려고?”

“난 두 번 설명 안 한다. 그러니까 잘 들어.”

마왕이 미간을 좁히는 가운데 김창이 말했다.

“내가 저 칼자루를 쥐고 있을 거다. 그럼 너는 저 칼날에 목을 들이밀어.”

“···아니, 그게 무슨?”

“이해가 안 되나? 간단하게 설명해줘?”

김창이 신검 쪽으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자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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