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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107화 (17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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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방금 뭘 잘못 들은 건가.”

김창의 목소리는 덤덤하다 못해 무기질적이었다. 고저 없는 목소리에선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 없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마법사를 두렵게 했다.

마법사는 자신을 쳐다보는 서늘한 시선에 오금이 저렸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그의 몸을 휘감고 목을 조르고 있었다.

“요안니스는 이 세상에 없다고 했던가? 그건 다 너희가 만들어낸 거짓말이라고?”

마법사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김창은 처음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법사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는데 마치 그대로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입가의 근육이며 눈가의 주름이 미세하게 움직이며 차츰 변화를 보이고 있었는데 잠깐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마법사는 언젠가 봤던 맹수의 얼굴을 떠올렸다. 몸에 줄무늬가 그려진 거대한 고양이처럼 생긴 그 맹수를 뭐라고 하더라? 호랑이였던가?

하여튼 그놈이 먹잇감을 상대로 이빨을 드러내며 얼굴을 찡그리듯 으르렁대던 모습이 딱 저랬다.

그러면 지금 자신의 모습은 어떠할 것인가? 상처 입은 채로 맹수와 맞닥뜨리게 된 가여운 짐승일 것인가······.

“이 씹새야.”

김창은 감정의 변화가 별로 없는 사람이다. 그는 어지간한 상황에선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남들이 뭔가 자신을 화나게 했다면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면 될 일이다. 굳이 열을 내면서 감정 소모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지금 그는 명백하게 화가 난 상태였다. 그건 저 빌어먹을 새끼가 거짓말로 자신을 기만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는 그런 이유로 화를 내지 않는다.

그가 화가 난 이유는 단 하나다.

승천할 자를 죽일 수 없게 돼서.

“내가 대체 뭐 때문에 이 개짓거리를 했다고 생각하나? 내가 대체 뭘 위해서 대악마를 죽이고 너희를 찾아왔다고 생각하느냐고. 대답해, 새끼야.”

김창이 벌컥 소리를 지르며 칼을 내리찍었다. 허벅지에 칼이 꽂힌 마법사가 끄악 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입가에서 뜨거움이 느껴졌다.

가만 보니 입가가 찢어져서 볼이 너덜거렸다. 마법사가 몸을 덜덜 떨면서 김창을 쳐다봤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칼 한 자루 마저 반대쪽 허벅지에 내리꽂았다.

“끄아악!”

“입 닥쳐.”

김창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마법사는 억지로 울음을 삼키며 끅끅댔다.

그러는 사이에 김창의 얼굴 근육이 다시 움직였다. 성난 맹수 같던 얼굴이 다시 바위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는 그 얼굴이 오히려 더 두렵게 느껴졌다. 저 인간 같지 않은, 엄밀히 말해서 장차 인간이 아니게 될 저 존재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 이해시켜 봐. 네가 방금 지껄인 말이 무슨 뜻인지 날 이해시켜 보라고.”

다행히도 김창의 요구는 상식적이었다. 마법사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면서 억지로 입을 열었다.

“···너에겐 안 된 일이지만, 네가 찾는 요안니스라는 사람은 없다. 그건 아까 말한 대로 우리가 만들어낸 거짓일 뿐이야.”

마법사가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자기 딴에는 비웃음이라고 지었겠지만 김창이 보기엔 그냥 허세에 불과했다.

이미 마음속으로 굴복했으면서 일부러 안 그런 척 억지로 웃는 것이다. 김창은 수없이 사람을 죽여봤고 사람을 고통스럽게 죽이는 방법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방법대로 저 마법사를 죽이면 그때도 웃고 있을까?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러진 않았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니까.

웃음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마법사가 이어서 말했다.

“왜 요안니스가 다른 승천할 자와 다르게 영지를 가지지 않고 세력을 거느리지도 않았다고 생각하나? 요안니스에 대한 정보가 극히 드문 건 또 왜고? 그건 애초에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이야······. 없는 사람이 뭔가를 거느릴 수는 없지. 없는 사람에 대한 정보가 있을 수도 없고.”

“그러면 너흰 있지도 않은 사람의 이름을 훔쳐 썼다는 거냐? 그게 뭔 의미가 있어서?”

“의미야 있지······. 우리 같은 비밀결사는 언제나 탄압의 대상이 된다. 아무리 우리가 잘나도 나라를 상대로 버틸 수는 없는 법이야. 그러니 우리에겐 우리를 지켜줄 만한 이름이 필요했다. 가령 승천할 자 같은······.”

“그래서 있지도 않은 승천할 자를 만들어냈다고? 사람들이 그 거짓말을 믿었을 것 같진 않은데.”

“진짜 승천할 자인 네가 보기에 우리는 그저 발밑의 벌레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우리는 충분히 위험한 존재다.”

하기야 그럴 것이다. 김창이 저들 열 명을 혼자서 다 썰어버렸다고 해서 그게 암흑 의회가 약하다는 증거가 되진 않는다.

당장 여기 있는 마법사만 해도 마탑주만큼이나 강하지 않은가? 그런 마법사가 무려 열이나 모여 있다면 그건 이미 재앙의 가까운 위협이다.

“사람들은 생각하겠지. 승천할 자의 부하가 저만큼이나 강하다면 그 주인은 대체 얼마나 강할 것인가? 암흑 의회는 언제나 우리의 적을 확실하고 잔혹하게 징벌했다. 그래야 요안니스에 대한 의심이 생기지 않을 테니까.”

마법사의 설명은 그럴듯했다. 하지만 김창의 의문이 전부 해소된 건 아니었다.

승천할 자 요안니스가 정말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대체 어떻게 인간의 수명을 초월해서 지금까지 살아왔는가?

그리고 개눈깔은 대체 뭔 수로 타락시켰으며 다른 승천할 자들은 왜 요안니스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단 말인가?

김창이 그에 대한 질문을 하자 마법사가 순순히 대답했다.

“우린 수명을 늘리기 위해 금지된 마법에 손을 댔다. 지금 네가 보기에 우리는 그저 인간으로 보일 테지만 실은 반쯤 시체에 가까운 상태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났다면 리치가 됐을 테지······.”

무려 열 명이나 되는 마법사가 리치가 됐다면 암흑 의회는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 중에서 언젠가는 진짜 승천할 자가 나왔을지도 모르지.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법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개눈깔? 외눈의 마왕을 말하는 거겠지. 그건 우리의 역작이었다. 각자가 가진 마력의 일부를 희생하고 유물의 마력까지 끌어모아 겨우 타락시켰지. 그대로 뒀으면 대악마 이상으로 강해졌을 텐데, 설마 진짜 승천할 자가 나타나서 죽일 줄 누가 알았겠어······.”

김창은 마법사의 구구절절한 설명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가 반응한 것은 유물에 대한 이야기였다.

“유물은 또 뭐냐.”

“이거다······.”

마법사가 턱으로 자기 목을 가리켰다. 거기엔 빛을 잃고 탁해진 회색 수정이 달린 목걸이가 있었는데 표면에 금이 잔뜩 간 걸 보면 악세사리로서의 가치는 거의 없어보였다.

“이게 유물이라고?”

“이젠 힘을 잃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빈 껍데기일 뿐이지. 하지만 한땐 강력한 힘을 담고 있었다. 우린 이걸 이용해서 외눈의 마왕을 타락시켰지.”

김창이 흠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그건 누가 남긴 유물이지? 개눈깔을 타락시킬 정도의 힘이라면 보통 유물이 아닌 것 같은데.”

마법사가 쿨럭쿨럭 피를 뱉어냈다.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훔친 이름의 주인이지······. 이젠 잊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지난 시대의 승천할 자······.”

“너희가 훔친 이름의 주인? 요안니스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라며. 그런데 뭘 훔쳤다는 거냐?”

마법사의 낯빛이 창백했다. 전투로 입은 상처가 너무 크고 피를 많이 흘려서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는 입을 다물려 했으나 김창이 그렇게 두지 않았다. 허벅지에 꽂았던 칼 중 하나를 뽑아 갈비뼈 사이로 비스듬히 밀어 넣자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대가리 굴리지 말고 그냥 대답해. 애초에 요안니스가 없다면 널 구해주러 올 사람도 없을 테니까.”

“······미친 새끼.”

김창은 대답하는 대신에 칼빵이나 한 번 더 놔줬다. 그러자 마법사의 태도가 고분고분해졌다.

“···승천자의 규율에 대해선 알고 있겠지?”

“신이 되는 건 한 시대에 한 명뿐이라는 거? 그건 갑자기 왜 묻지?”

“유물에 대해 설명하려면 필요하니까. 잘 들어라. 승천자의 규율이 있기 때문에 신은 언제나 한 시대에 한 명만 탄생한다. 그러면 나머지 승천할 자는? 대부분 죽어. 신성을 양보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지만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래서?”

“아주 오래전, 승천할 자들끼리 신이 되기 위해 싸운 적이 있었다. 긴 싸움 끝에 새로운 신이 탄생했고 패자들은 모두 죽었다. ······단 한 명만 빼고.”

김창이 미간을 좁혔다. 그가 알기로 신이 되지 못한 승천할 자가 목숨을 구하는 법은 단 하나뿐이다.

스스로 신성을 버리는 것. 하지만 그런 짓을 할 바에야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게 더 낫다. 승천할 자 정도 되면 자기 실력에 대단한 자부심이 있을 텐데 싸우지도 않고 기권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설마 승천할 자가 스스로 신성을 버렸다는 거냐?”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고서 김창은 약간 충격을 받았다. 승천할 자라는 놈이 감히 신성을 버려?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닌가······.

“정확히 말해서 그는 자기 신성을 여러 물건에 나눠 담았다. 그리고 홀연히 사라졌지. 언젠가 자신이 다시 돌아왔을 때, 거기 담긴 힘을 이용해 본래의 힘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처럼······.”

“그러면 네가 말하는 유물이라는 게 바로 그 신성을 담은 물건이겠군. 전 시대의 승천할 자가 남겼던.”

그런 유물이라면 암흑 의회가 개눈깔을 타락시킬 수 있었던 것도 이해가 간다.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창이 말했다.

“그래서 그 승천할 자의 이름이 요안니스라는 거냐? 그러면 다른 승천할 자들이 너희를 그냥 뒀을 리가 없을 텐데. 무려 전 시대의 승천할 자가 돌아온 것이니 말이야. 당연히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알아보려 했을 것 아닌가?”

“그들은 요안니스가 누구인지 모른다. 너도 알겠지만 승천자가 탄생하는 건 극히 드문 일이야. 지난 시대의 승천자는 무려 천 년도 전의 인물이다. 안 그래도 그 시절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는데 승천자가 제 경쟁자들에 대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지웠지. 우리도 유물을 찾지 못했다면 요안니스에 대해서 알지 못했을 거야.”

그거참 속 좁은 신이로군. 김창이 허 하고 소리를 내며 물었다.

“그 유물이라는 건 이제 더 없는 건가?”

“왜, 그 힘이 탐나나? 나머지 유물이 어디 있는지는 우리도 몰라. 우리가 그 유물을 찾은 것도 정말 우연한 일이었으니까.”

하기야 그만한 유물이 길바닥의 돌멩이처럼 아무 데나 굴러다니진 않을 것이다.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남의 물건을 자기 멋대로 써버렸으니 주인이 알면 화를 내겠군.”

“주인? 요안니스는 천 년 전의 인물이야. 승천할 자라고 해도 그만큼 오래 살 수 없는데, 심지어 신성까지 잃은 사람이 어떻게 지금까지 살겠어? 그건 이제 주인 없는 물건이야.”

김창이 낡은 목걸이를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내가 잘은 몰라도 요안니스가 남 좋은 일 시키려고 신성을 담은 유물을 만들진 않았을 것 같은데.”

“그래서 뭐? 정말 돌아올 생각이었다면 진작 돌아왔겠지. 이미 천 년이 지났는데 인간은 그렇게 오래 살 수 없······.”

거기까지 말하고 마법사는 뭔가 깨달은 듯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인간은 천 년을 살 수 없다. 승천할 자라고 해도 반신의 격에 오른 게 아닌 이상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인간이 아니라면? 애초부터 요안니스가 인간이 아니었다면······.

“내가 알기로 요정은 천 년까지 산다던데. 고귀한 요정 왕족은 그보다 더 오래 살고. 만약 요안니스가 요정왕의 혈통이라면 지금까지 살아있어도 이상할 건 없지. 그리고 자기 힘을 되찾으려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마법사는 오싹한 상상을 했다. 먼 옛날 승천자와 싸워 살아남은 고대의 요정이 다시금 돌아오는 모습을.

그리하여 다시 한번 천상의 권좌를 노리는 모습을.

“내가 아까까진 기분이 아주 더러웠었는데 지금은 아니야. 너랑 말 나누다 보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어. 왜 그런 줄 아나?”

뜬금없는 질문에 마법사가 고개를 저었다. 김창이 그답지 않게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내가 죽일 적이 정말 존재한다는 걸 알게 돼서야. 원래 게임에서도 똑같은 몹이라도 이름 앞에 뭐라도 붙은 애들이 훨씬 더 세거든? 새로 몹 만들기 귀찮아서 모델링 돌려쓰거나 팔레트 스왑한 성의 없는 몹이라도 이름 앞에 고대 같은 거 붙는 순간 경험치를 더 줘.”

마법사는 그게 뭔 개소리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창이 웃으며 말했다.

“그냥 승천할 자도 신성을 많이 줄 텐데 고대의 승천할 자는 또 얼마나 많이 줄까 기대가 되네. 고맙다, 새끼야. 네 덕분에 좋은 걸 알아가네. 내가 원래 너 때문에 화가 많이 나서 아주 사지를 찢어버리려고 했는데 그러진 않으마.”

마법사는 김창의 목소리에서 그가 정말 기분이 좋다는 걸 느꼈다. 그러면 혹시나 목숨을 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애초에 김창은 처음부터 협조만 잘하면 반병신이 되는 선에서 끝내겠다고 하지 않았나? 죽는 것보단 반병신이 되는 게 더 낫지 않냐는 걸 듣고서 뭔 개소리냐 생각했지만, 인제 와서 보니 그게 참 옳은 소리였다.

그래, 죽는 것보단 반병신이 낫지. 마법사가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혹시라도 살려줄 건가?”

김창이 웃었다.

“아니. 대신 단칼에 죽여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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