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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178화 (17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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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옥좌 위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턱을 괸 채로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주변은 무언가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듯 무너진 건물의 잔해로 가득했는데 누구 하나 감히 청소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치워야 할 양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단지 이 지저분한 현장의 한가운데에 있는 저 남자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질 못할 뿐이다.

원래라면 황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그는 며칠째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

“대체 뭔 생각인지 모르겠군······.”

아우스트 공은 오늘도 가만히 옥좌 위를 지키고 있는 남자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갑작스럽게 제국에 나타나 옥좌를 탈취한 저 남자는 용살자인 동시에 승천할 자다. 지금껏 수많은 어린 용을 학살했으며 또한 이곳에 오기 전 승천할 자 하나를 죽인 강자.

역시나 승천할 자였던 섭정왕 아슬란이 있었다면 이러한 무례를 용서하지 않았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지금 명을 달리하고 없었다.

“처음에는 제위가 목적인가 했더니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아우스트 공은 승천할 자 한 명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심지어 그는 용살자가 김창과 싸우는 모습도 눈으로 직접 봤다.

마치 신화 속에 나올 법한 격렬한 싸움을 보고 나니 용살자에 대한 두려움은 자연스럽게 커졌다.

섭정왕 아슬란이 있어도 저 남자를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데, 그가 죽고 없는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용살자는 황제를 겁박하여 제위를 강탈하진 않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꺼림칙했다.

몇 날 며칠이고 옥좌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대체 뭔가?

“부족하다는 건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일주일.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던 용살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항상 용살자를 감시하고 있던 아우스트 공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드디어 움직이는 건가? 그럼 이제 뭘 하려고?

“수많은 어린 용을 학살하고 승천할 자도 하나 죽였지만, 그래도 부족하다는 건가?”

뭐가 부족하다는 건지 아우스트 공으로선 알 수가 없다. 단지 이유 모를 오한 때문에 오싹함이 느껴졌다.

용살자가 드디어 옥좌 위에서 일어났다.

“이게 천상의 뜻이냐? 내 방법이 너무나도 비겁하여 그런 건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거냐? 그럼 내 기꺼이 그 뜻에 어울려주지.”

마치 짐승이 우는 듯한 으르렁거림이 들려왔다. 용살자의 두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신성은 오직 아무나 해내지 못할 위업을 달성한 자만이 얻을 수 있지. 봐라, 천상의 신들이여. 내가 뭘 하는지.”

아우스트 공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무언가 시작된다. 아주 사악하고 위험한 사건이.

“죽음이 오리라. 이 세상의 모든 걸 묻어버릴 지독한 죽음이.”

* * *

“이번엔 제대로 온 거겠지······.”

김창은 디아나에게 걷어차여 얼얼한 엉덩이를 손으로 문지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 현대적인 형태의 빌딩이나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 따위가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지구로 날아온 건 아닌 듯했다.

“하여튼 어느 곳이든 생긴 게 다 비슷비슷해서 주변 모습만 보고는 제대로 왔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어딜 가나 중세 유럽 비슷한 배경이니 그것만 보곤 도통 구별하기가 어렵다. 김창이 쯧 하고 혀를 차며 걷기 시작했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를 모르니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건 어디로든 가다 보면 마을이 나올 테니 일단은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어쩌면 야영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혼자 다니던 시절엔 매일 같이 야영의 연속이었지만 근래 들어선 그런 일이 잘 없었다. 지금껏 원탁의 속박이 싫어 일부러 거리를 두고 다녔는데 이젠 원탁의 일원이라고 해도 될 만큼 그들과 자주 어울려 다닌 탓이다.

사람 몸이라는 게 참 영악해서 늘 하던 일이라도 며칠만 안 하면 거부 반응을 보이곤 한다. 지금껏 깨끗한 잠자리에서만 자다가 갑자기 노숙하게 되니 저도 모르게 얼굴이 찡그려지는 게 참 우스웠다.

“이럴 때마다 내가 마법사가 아닌 게 참 아쉬워.”

만약 칼잡이가 아니라 마법사였다면 차원문 마법으로 곧장 왕궁으로 돌아갔을 텐데.

아무리 원래 직업이 칼잡이였다고 해도 반신쯤 됐으면 마법 한두 개 정도는 쓸 수 있게 돼야 하는 것 아닌가?

김창이 혼자 투덜거리며 하늘을 쳐다봤다. 시간이 몇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차츰 해가 지고 있었다.

이런 곳에선 원래 해가 빨리 지는 법이기에 모닥불의 온기라도 느끼며 잠들기 위해선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없군.”

땔감으로 쓰기 위해 나뭇가지를 줍고 다니던 김창이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이 사람이 자주 다니지 않는 아주 외진 곳이었다면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주변에는 마차가 오고 다닐 수 있도록 쭉 뻗은 도로가 있었다.

그걸 보면 이곳의 통행량이 제법 된다는 소리일 텐데 아무리 그래도 하루종일 한 명도 만나지 못한 건 좀 이상했다.

“뭐 좀 더 가다 보면 알 수 있겠지.”

어쩌면 이곳은 왕국이 아닐지도. 원래 세상에 떨어진 건 맞지만 꼭 왕국에 떨어지리란 법은 없지 않은가.

김창이 혼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아온 땔감을 바닥에 던졌다. 손가락을 튕겨 불길을 일으킨 그가 모닥불의 온기를 쬐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부스럭대는 소리.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발걸음 소리를 들었을 때 숫자는 대여섯 정도.

발걸음 소리가 무거운 걸 보면 남자고 무장했음이 분명하다.

‘강도인가.’

요즘 이런 길바닥 생활을 자주 하지 않아서 잊고 지내던 사실이지만, 이 세상은 원래 이런 곳이다.

길바닥에선 법보다 칼이 더 가깝고 걸리지만 않으면 사람 한둘쯤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이다.

설령 걸리더라도 부와 권력이 있다면 그것조차 죄가 아니게 되는 세상인데 칼 차고 돈 뺏으러 다니는 놈들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긴장하며 칼자루를 쥐었을 테지만 김창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먹을 게 있나 찾았지만 결국 허탕을 치고 한숨을 내뱉었다.

저 친구들은 먹을 게 좀 있을까? 강도의 짐을 뺏으면 그것 역시 강도질인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부지깽이로 모닥불을 뒤적이고 있을 때였다.

“음?”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의문의 사람들과 김창의 시선이 마주쳤다.

생각했던 대로 저쪽은 여섯 명 정도. 이상한 점은 여섯 명 전원이 무장했다는 사실이고 그보다 더 이상한 점은 그중 셋은 줄에 결박된 채로 나머지 셋에게 끌려가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강도가 아니라 병사들이었나? 그런데 병사가 병사를 잡아갈 일이 뭐가 있지?

김창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험악한 얼굴로 다가왔다.

“이런 곳에 웬 불빛인가 해서 와봤더니······.”

“와봤더니, 뭐.”

“···뭐? 넌 지금 네 처지를 자각하지 못하는 거냐?”

“내 처지라면 잘 알고 있지. 난 지금부터 노숙해야 할 처지야.”

말장난이라도 한다고 생각했는지 병사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졌다. 그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채찍을 손에 들고서 짝 소리가 나게 바닥을 때렸다.

“이 건방진 탈영병 놈! 정신이 나갔구나! 남들은 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넌 여기서 한가롭게 야영이나 하고 있어? 네 소속 부대가 어디냐? 당장 돌아가!”

갑자기 뭔 소리지? 김창이 이게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해 당황한 얼굴을 하자 병사는 그걸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왜, 내가 탈영병을 잡으러 다니는 독전관임을 몰랐던 모양이지?”

독전관이라면 부대에서 도망치는 놈들을 처벌하는 직책이다. 그들은 멋대로 전선을 이탈하는 병사를 즉결처분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 지금은 탈영병을 잡으러 다니는 임무도 겸하는 모양이었다.

아마 저 뒤에 있는 병사 셋도 탈영병일 것이다.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히 몰랐지. 그래서, 어디 전쟁 났나? 왜 탈영병을 잡으러 다니는 거냐?”

“···이거 정신 나간 척을 하는 거냐, 아니면 진짜 정신 나간 거냐?”

“내가 먼저 물었잖아. 어디 전쟁 났냐고.”

독전관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고서 말했다.

“어디 전쟁 났냐고? 멍청한 놈. 어디 전쟁 난 게 아니라 온 세상이 전쟁의 구렁텅이 속에 빠졌다. 우린 이 세상의 수호자고 악을 몰아내는 첨병이다! 그런데 그런 숭고한 의무를 마다하고 도―망―을―쳐!”

새끼 목소리 한 번 크네. 김창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다가 문득 불안함을 느꼈다.

“잠깐, 온 세상이 전쟁 중이라고?”

“그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아니, 여기 내가 있던 세상 맞아? 갑자기 뭔 전쟁······.”

대륙 전역이 불탈 만큼 거대한 전쟁을 일으킬 존재가 아직 남아 있던가? 용이며 대악마는 자신이 죄 죽였고 승천할 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승천할 자 케이네스는 김창을 쫓아내고 승천자의 규율에 따라 승천하였을 텐데 그가 전쟁을 일으켰을 리는 없고.

“디아나 그 멍청한 놈, 또 이상한 데로 날려 보낸 거 아니야?”

김창이 혼자 중얼거리고 있자 독전관이 또 채찍을 휘둘러 땅을 때렸다.

“뭔 헛소리냐. 당장 부대로 돌아가!”

김창의 실력이라면 저 독전관이 떼로 덤벼도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다 때려눕힐 수 있지만 그는 얌전히 명령에 따랐다.

왜 그랬냐면 일단은 정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체 뭔 일이 일어난 거지? 여기가 내가 있던 세상이 맞긴 한 건가? 만약 맞다면 대체 누가?’

김창은 독전관과 함께 부대로 돌아가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전쟁을 일으킬 만한 놈이······.

“아니, 하나 있구나.”

원탁, 그 미친놈들이 기어코······.

김창이 쯧쯧 하고 혀를 차자 독전관 역시 그를 보고서 쯧쯧 혀를 찼다.

“이거 정신 나간 것 같은데 데려가도 뭐 제대로 싸우기나 하겠나.”

사람을 멋대로 정신 이상한 놈으로 만들어버렸지만 김창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지금 몹시 탄식하는 중이었다.

‘한석구 이 미치광이 놈. 하기야 이젠 승천할 자도 없으니 제멋대로 날뛰어도 막을 놈이 없겠지.’

저쪽 세상에서 마왕을 죽이고 왔더니 이제 여기선 원탁을 막아야 하나? 김창이 고민스러워하고 있을 때 독전관이 외쳤다.

“날 따라와라! 지휘관에게 보고해야 하니!”

김창은 이번에도 얌전히 명령에 따랐다. 주변을 둘러보니 잔뜩 지친 병사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의 몸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났다. 수많은 사선을 넘어온 베테랑 전사들의 몸에서 날 법한 냄새였다.

“독전관 브랜트입니다. 탈영병 건에 대해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어, 들어와.”

지휘관용 막사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말이 들리자 브랜트가 탈영병들을 데리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연이은 전투로 인한 작전 수립 때문에 바쁜 모양인지 지휘관은 참모들과 함께 쉴 새 없이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지도에는 깃발 모형이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는데 그것만 봐도 상당히 고심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들 상관을 봤는데 경례도 하지 않고 뭘 하나!”

브랜트가 소리치자 탈영병이 엉거주춤하게 경례했다. 살면서 경례라고는 군대 끌려가서 해본 적 외엔 없는 김창은 멀뚱멀뚱 지휘관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넌 또 왜 안 해?”

“안녕하쇼, 김창입니다.”

김창이 대충 인사하자 브랜트가 답답하다는 듯 자기 가슴을 쳤다. 그 어이없는 인사에 지휘관도 흥미가 동했는지 참모들과 대화를 중단하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김창의 얼굴을 보더니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아우 씨, 깜짝이야! 이건 또 왜 주워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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