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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탈영병을 데려왔을 뿐인데 저 반응은 대체 뭔가? 생각지 못한 반응에 브랜트가 가만히 있는 동안 김창이 말했다.
“너 나 아냐?”
김창은 저 지휘관을 모른다. 다만 얼굴은 처음 보는데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졌다. 마치 아는 사람이 가면을 뒤집어 쓰고 정체를 숨기고 있는 듯한 그런 기분이다.
“모르는데······.”
“진짜 몰라?”
김창이 지휘관을 빤히 쳐다보자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는 걸 본 브랜트의 두 눈이 커졌다.
대체 이 남자가 누군데 지휘관이 저런 태도를 보인단 말인가? 기껏해야 싸우기 싫어 도망친 비겁한 탈영병일 뿐인데.
브랜트는 지휘관을 존경하고 있었고, 존경하는 상관이 이깟 놈에게 쩔절 매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가 김창을 향해 벌컥 소리쳤다.
“놈! 감히 지휘관께 그 무슨 불량한 태도냐! 당장 고개를 숙이고 사과드려!”
순간 김창과 지휘관의 시선이 동시에 브랜트를 향했다. 두 사람 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생각지 못한 반응이라 브랜트가 움찔하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아, 아니, 그 반항적인 얼굴은 뭐냐······.”
“브랜트 독전관, 제발. 제발 가만히 있게. 제발······.”
지휘관이 사정하듯 말하자 브랜트는 몹시 혼란스러워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무려 일개 군단을 지휘하는 군단장이 저토록 저자세로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설마 저 남자가 자신도 모르는 고위 귀족이라도 된단 말인가? 하지만 전시에는 군법이 우선이고 아무리 귀족이라도 탈영은 중죄인데······.
“브랜트 독전관, 이 남자를 자극하지 말게. 다들 이제 나가게. 다 나가!”
지휘관이 소리치자 브랜트는 물론이고 참모들까지 지휘 막사를 나갔다. 이제 막사 안에 남은 건 김창과 지휘관뿐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먼저 입을 연 건 김창이었다.
“너 만네르헤임이냐?”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이름에 지휘관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걸 본 김창이 주먹을 들자 지휘관이 다급히 답했다.
“그래, 그래! 난 만네르헤임이다. 반갑군, 김창. 또 다른 세상으로 쫓겨났다고 하던데 돌아온 건가?”
김창은 자신이 만네르헤임이라고 말하는 지휘관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가 기억하는 만네르헤임은 거대한 악마인데 지금 여기 있는 건 어딜 봐도 그냥 인간일 뿐이었다.
“너 그 모습은 뭐냐?”
“···변신한 거다. 아무래도 군대를 지휘하기엔 이 모습이 더 나을 테니까.”
“군대를 지휘해? 왜 네가?”
만네르헤임이 한숨과 함께 답했다.
“왜 그러겠나? 한석구 그 미친 마법사 때문이지. 대악마로서의 힘을 대부분 잃은 나로선 그 인간 놈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어.”
하기야 옛날의 만네르헤임이라면 한석구의 요구 정도야 가볍게 무시할 수 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을 터다.
게다가 대악마로서의 힘을 잃은 지금은 원탁의 식객으로 들어가 있지 않나? 집주인이 일 좀 하라는데 식객으로서 그걸 거부하긴 어렵다.
“그리고 난 아무래도 지옥에서 오랫동안 군대를 지휘해봤으니 이런 역할에 적합하다고 보는 거겠지.”
만네르헤임이 한때 지옥에서의 영광스러웠던 나날을 상상하는 것인지 아련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서 그 전쟁 이야기 말인데, 대체 나 없는 동안 뭔 일이 있었던 거냐. 저번에 내가 지 옥 갔다 왔을 땐 원탁이 망하니 어쩌고 하던데 이번에도 그래?”
“아쉽게도······ 아니, 참 다행스럽게도 원탁은 무사하다. 대신 다른 곳이 다 박살이 났지만 말이야.”
“다른 곳이라면, 어디?”
“뭐 그냥 가볍게 대륙 절반 정도?”
그게 왜 가벼운 거냐. 김창이 쯧 하고 혀를 차자 만네르헤임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한테 뭘 바라나? 난 원래 대악마였고 지상의 일 따윈 내 알 바가 아니야.”
“그런 것치고 제법 열심히 싸우고 있던 것 같던데.”
김창이 지도 위에 올려진 깃발 모형을 손으로 툭 건드려 쓰러트렸다. 그걸 본 만네르헤임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난 한석구 때문에······.”
“됐고, 상황 설명이나 제대로 해봐. 내 알기로 지금 이만큼 거대한 전쟁을 일으킬 만한 존재가 없을 텐데? 대악마 다 죽었고, 용 다 죽었고, 승천할 자 다 죽었고. 그런 누가 남은 거야?”
대악마와 용, 그리고 승천할 자 중에서 과반수를 김창 혼자서 다 죽였다는 게 심히 끔찍한 일이다.
만네르헤임은 까딱 잘못했으면 자신도 저 무시무시한 반신의 칼에 죽었으리라 생각하니 몸이 절로 떨렸다.
그가 침을 꿀꺽 삼키고서 말했다.
“승천할 자라면 아직 하나 남았잖나. 네가 죽이지 못한 승천할 자.”
“내가 죽이지 못한 승천할 자가 있다고? 그것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난 이게 망겜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갓겜이었나? 어디서 자꾸 들어본 적도 없는 히든 컨텐츠가 자꾸 나오는 거야?”
망겜은 뭐고 갓겜은 뭔가? 히든 컨텐츠는 또 뭐고? 만네르헤임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냥 이방인들끼리 쓰는 말이라 지레짐작했다.
“뭘 착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너도 아는 사람이야.”
“내가 아는 사람? 하이나? 요안니스? 죽은 사람이 돌아오기라도 했단 말인야?”
“아니, 용살자 케이네스.”
순간 김창이 입을 다물었다. 그 이름은 확실히 알고 있는 이름이다. 하지만 그 녀석이 왜?
“걘 승천했잖아. 내가 다른 세상으로 쫓겨나면서 마지막 승천할 자가 되었으니 말이야.”
“승천자의 규율에 따르면 케이네스가 승천하는 게 맞는 일이지.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는 승천하지 않았다. 지상에 미련이 남아 승천을 미룬 것인지, 아니면 승천에 실패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말이야.”
김창이 지금까지 만나본 승천할 자들은 모두 승천에 목숨을 걸고 있었다. 케이네스는 승천을 위해 어린 용들까지 학살하고 다녔는데 인제 와서 지상에 대한 미련이 남았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아직 승천하지 않았다는 건······.
“승천에 실패했군.”
“아, 반신인 네가 보기엔 그런가? 그럼 왜 승천에 실패했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승천해본 적 없는데.”
그런가? 만네르헤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짐작 가는 부분은 하나 있군.”
“그게 뭐지?”
“이번 전쟁은 케이네스가 일으켰다고 했지?”
“그래. 널 다른 세상으로 쫓아내고 나서 제국의 옥좌를 차지한 채로 며칠 동안 가만히 있던 놈이 갑작스레 전쟁을 일으켰다고 하더군. 하여튼 승천할 자 놈들은 죄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 머릿속을 알 수가 없어.”
“날 쫓아내고 당연히 승천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안 되니 당황스러웠겠지. 그리고 며칠 동안 생각을 거듭하다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을 거다.”
“결론?”
김창이 늘 그렇듯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이 승천하지 못한 건 신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 생각했겠지. 그럼 신성을 얻기 위해선 뭘 해야 하는가? 남들이 해내지 못할 위업을 달성해야지.”
“아니, 잠깐만···. 그럼 신성을 얻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건가? 하지만 전쟁 따위로 신성을 얻을 수는 없을 텐데? 그게 가능했다면 대륙의 이름난 장군들은 전부 승천할 자였어야지.”
“물론 전쟁 좀 했다고 신성을 얻을 수는 없지. 하지만 전쟁으로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죄 쓸어버린다면 어떠냐.”
만네르헤임은 그게 뭔 개소리냐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신성은 아무나 해내지 못할 위업을 달성해야만 얻을 수 있다고 했던가?
그럼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죽여버리는 건 확실히 아무나 해내지 못할 일이고 신성을 얻을 만한 위업이 맞다.
하지만 보통 신성을 얻으려고 그 정도까지 하나? 그런 식으로 신성을 얻어 승천하다고 해도 지상에 남은 게 없다면 그게 대체 뭔 의미가 있나?
“한때 대악마였던 자로서 말하는데, 악마도 그딴 짓은 안 할 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내 잘못이 크군. 내가 적당히 먹을 걸 좀 남겨놨으면 걔도 그런 짓은 안 했을 거 아니야.”
만네르헤임이 김창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놈이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신성을 독식한 주제에 승천을 안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네가 승천해서 이 땅에서 사라지는 게 모든 사람의 소원······.”
“뭘 또 중얼거리냐. 지금 전장 상황은 어때? 내 도움 필요하냐?”
김창의 물음에 만네르헤임이 그를 가만히 쳐다봤다. 적일 때는 목숨 건지려고 다 버리고 도망쳐야 할 만큼 무서운 놈인데 아군일 때는 이만큼 든든한 놈도 없다.
그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겠나? 안 그래도 손 봐줘야 할 놈이 좀 있는데.”
“내 전문이지. 누구냐, 그게.”
“케이네스가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을 얻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는 이형의 괴물들을 불러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뭐 그런 놈들이야 굳이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수가 워낙 많아서 말이야.”
“그래서 걔네 쓸어달라고?”
“아니, 아까도 말했지만 걔네는 우리가 상대할 수 있다. 문제는 그 괴물 무리의 대장이야. 현재 우리와 대치하고 있는 괴물 무리의 대장이 제법 강해서 전진을 못 하고 있어.”
그 녀석은 신성을 줄까? 김창은 혼자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놈이었으면 케이네스가 제 손으로 진작 죽였을 것이다.
김창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 따위가 아무리 강해봤자 반신의 상대가 될 리는 없을 테니까.
“그럼 그 녀석은 내가 맡지. 그리고 또 도움 필요한 건?”
“일단 우리는 그 괴물 무리를 무찌르고 제국으로 나아갈 거다. 전쟁이 너무 길어지면 불리한 건 우리야. 케이네스는 원하는 대로 괴물들을 불러낼 수 있지만 우리는 병력이 한정적이니까. 그러니 각 병력을 한데 모아 일시에 반격을 시도할 생각이다. 네 역할은 그때 케이네스를 상대하는 것이고.”
“음,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자 만네르헤임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네가 돌아왔으니 제대로 된 반격을 시작할 수 있겠군. 그래서 그냥 한 번 물어보는 건데, 어디 갔다 왔나? 원래 살던 세상?”
“아니, 나도 처음 가보는 곳. 거기도 웬 마왕 놈이 설치고 있길래 손 좀 봐주고 왔다. 거기서 신성도 좀 얻었는데 볼래?”
이 신성 괴물 놈. 이 정도면 진짜 신보다도 신성이 더 많은 것 아닌가? 만네르헤임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흔들다가 말했다.
“거기서 마왕을 무찔렀으면 용사 대접을 받았겠군. 그쪽 사람들이 제발 남아달라고 하지 않던가?”
“아니, 그쪽 세상의 신이 제발 꺼져달라고 하던데.”
만네르헤임이 애써 웃음을 참았다. 하여튼 어느 세상 사람이든 생각하는 건 다 똑같군.
“그럼 슬슬 나가볼까? 병사들도 충분히 휴식했겠다, 이제 다시 싸우러 나가야지.”
만네르헤임이 테이블 위의 깃발 모형과 지도를 정리하는 걸 보고서 김창이 물었다.
“작전 회의 중이던 거 아니었나? 아까 보니 참모들이랑 뭐 열심히 떠들고 있던데, 그거 이제 안 해도 돼?”
만네르헤임이 뭘 이상한 걸 묻느냐는 듯 대답했다.
“작전 회의? 그걸 왜 하나? 그냥 전장에 너 던져두면 그게 곧 작전이고 전략인데.”
“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