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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182화 (18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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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창.”

귀에 물이 들어간 듯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막 눈을 뜬 강아지처럼 멍하니 한 곳을 바라보고 있으니 또 한 번 소리가 들려왔다.

“···창! 김창! 갑자기 뭘 멍하니 있나? 김창!”

어깨를 쥐고 흔드는 손길이 거칠었다. 김창은 그제야 귀가 뚫려 제대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왼쪽을 쳐다봤다. 거기엔 자신의 어깨를 흔들고 있는 만네르헤임이 있었다.

“야.”

“오, 드디어 정신이 들었나? 그림자 괴물 놈과 한참 싸우더니 갑자기 왜 이러는 건가? 갑자기 멈춰 서서 가만히 있길래 깜짝 놀랐다고.”

“손 내려.”

“···크흠.”

만네르헤임이 슬며시 김창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그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서 말했다.

“어쨌건 이제 정신이 든 건가? 혹시 몸에 뭔가 문제가 있다면 얼른 말하게. 전장에서 또 이러면 곤란해. 어쨌거나 너는 우리 쪽에서 동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력. 참으로 분한 말이지만 네가 없으면 케이네스를 상대할 수가 없다고.”

김창이 귀찮다는 듯 손을 홰홰 내저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그것보다 다른 놈들은 어디 있냐? 케이네스는?”

만네르헤임은 김창을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봤다. 아까도 말했지만 김창은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가 전장에서 갑작스럽게 정신을 놔버리기라도 한다면 그건 참으로 큰 문제였다. 만네르헤임은 인간이 아니라 대악마고 인간이 얼마나 죽든 말든 상관없지만, 그래도 지금 케이네스가 벌이는 짓거리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로서는 케이네스를 이길 수 없으니 김창이 나서줘야 했다. 가능하다면 싸우던 중에 둘 다 죽어주면 그것만큼 기쁜 일도 없겠건만······.

“야, 케이네스는 어디 있냐고.”

김창이 불퉁한 목소리로 묻자 만네르헤임도 상념에서 깼다. 그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서 말했다.

“네 덕분에 다시 진격할 수 있겠군. 아까도 말한 것 같은데 대륙 각지에서 모인 병력은 제국에서 집결한 뒤 케이네스를 상대로 총공세를 벌일 거다. 일단 제국으로 가는 게 먼저야.”

“그래서 케이네스가 거기 있나?”

“···그 녀석도 이젠 끝을 내려 할 거다. 놈의 목적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말살하는 것이고, 제국에 모든 병력이 집결한다면 한 번에 상대하기 쉬울 테니까.”

“그러니까 제국에 가면 케이네스를 죽일 수 있다는 거군.”

이놈은 케이네스를 죽일 생각 외에는 없는 건가? 만네르헤임이 작게 혀를 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 일단은 진격이다. 내가 가진 정보에 따르면 여기서 제국으로 가는 길목엔 더는 괴물 무리가 없어. 혹시나 이쪽 병력이 몰살된 걸 알고서 증원을 보낼 수도 있지만 아마 그럴 가능성은 낮을 거야. 케이네스도 한 번의 싸움으로 모든 걸 끝내길 원할 테니까.”

“그럼 안 가고 뭘 하는 거냐.”

김창이 왜 쓸데없이 늦장을 부리냐는 듯 묻자 만네르헤임이 한숨을 내뱉었다.

“주변을 둘러봐라, 김창. 모든 사람이 너처럼 괴물은 아니야. 네 덕분에 피해가 줄긴 했지만 그래도 다친 사람이 있고 죽은 사람이 있어. 뭐, 나로선 이깟 병력이 어찌 되든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너도 그런가?”

만네르헤임의 말을 듣고서 주변을 둘러보니 여기저기서 신음을 흘리고 있는 병사들이 보였다.

자신의 힘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적들을 제압하긴 했지만 그래도 사상자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쉬지 않고 진격하자는 건 사람으로서 할 말이 아니었다. 김창이 아무리 돈 받고 사람 죽이는 칼잡이라고 해도 그 정도 사리 분별은 할 줄 알았다.

“그럼 어쩔 수 없군.”

“그래, 어쩔 수 없지. 어차피 결전의 날은 아직 멀었어. 그러니 무리할 것 없이 시간에 맞춰 천천히 진격하면······.”

“뭔 소리냐? 나 먼저 갈 테니까 너흰 나중에 따라오라는 건데. 나는 간다.”

김창이 칼 한 자루를 들고 뚜벅뚜벅 걷기 시작하자 만네르헤임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아니, 뭐라고? 혼자 간다고?”

“그래.”

“대체 왜?”

“왜긴 왜야. 케이네스 죽여야 한다며?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케이네스가 부리는 괴물들이 대륙 전역에서 날뛰고 있을 텐데 그럼 그걸 그냥 보고만 있으라는 소리냐?”

김창의 말은 정론이다. 너무나 완벽하게 옳은 소리라서 감히 반박조차 할 수 없는 정론.

그러나 만네르헤임은 김창이 정말 사람들의 목숨과 안위를 걱정해서 저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이 녀석은 그냥 한시라도 빨리 케이네스랑 싸우길 원하는 거야······.’

만네르헤임은 김창에게 몇 번이나 까불거리고도 살아남은 유일한 존재로서 이 무자비한 반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꿰뚫고 있다.

아마 원탁에서 오랫동안 함께 생활했던 한석구조차 김창에 대한 이해도는 자신보다 떨어질 게 분명하리라.

“그래서 정말 가려고?”

“그럼 뭐 내가 허세라도 부린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럴 리가. 김창은 절대 허세 같은 걸 부리지 않는다. 그가 어떤 말을 하든, 그게 말도 안 되는 헛소리 같아도 실제론 전부 다 진실이다.

만네르헤임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럴 때 김창을 말려봤자 듣지도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고.

그러면 이럴 땐 어째야 하는가? 그냥 보내주면 된다.

“네가 가겠다는데 내가 참견할 수는 없지. 그러면 제국에서 만나자고.”

어쩌면 만네르헤임이 제국에 도착할 때쯤에는 모든 싸움이 끝나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런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이 또 어디 있으랴.

만네르헤임이 은근한 기대를, 어쩌면 정말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기대를 하며 김창을 배웅했다.

“천천히 따라와라, 만네르헤임. 혹시나 도망치진 말고.”

“···인제 와서 도망칠 것 같았으면 진작 도망치지 않았겠나? 질 게 뻔한 싸움을 하면서도 안 도망쳤는데 왜 지금 와서 도망가겠어?”

“하긴 그런가.”

김창의 무력은 절대적이다. 카드놀이로 치면 그는 그냥 내기만 하면 이기는 카드다. 다른 카드와의 배합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고 그저 이 한 장을 내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게임이 끝난다.

남들이 보면 무슨 그런 불합리한 룰이 있느냐고 하겠지만 그게 사실인 걸 뭘 어쩌겠는가?

다들 즐겁게 마피아 게임을 하고 있을 때 진짜 총을 가져와서 사람을 쏴죽이는 놈을 뭔 수로 이기겠는가?

김창의 존재는 그런 것이다. 그냥 그 자체로 결과는 확정된다. 오로지 승리라는 무자비한 결과가.

“저······.”

김창은 달리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반신의 격에 오른 그의 육체는 인간을 초월했고 지나칠 정도로 많은 신성은 그에게 끊이지 않는 강력한 힘을 공급하고 있었다.

아마 저 속도라면 대륙의 이름난 명마보다 빠르지 않을까? 길만 제대로 잡아서 달려간다면 며칠 내로 제국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네르헤임이 그런 생각을 하며 김창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독전관 브랜트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남자를 그냥 보내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 그가 그 유명한 김창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방금 보여줬던 압도적인 무력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고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무려 케이네스 아닙니까? 새끼 용을 학살하고 승천할 자를 죽였으며 다른 세상의 괴물들을 부리는 무자비한 학살자······.”

만네르헤임이 뭔 소리를 하냐는 듯 대꾸했다.

“김창은 대악마 셋을 죽였고 승천할 자 둘, 반신 하나, 마지막으로 용 하나를 죽였다. 업적으로 따지자면 날갯짓이나 겨우 하는 새끼 용들을 학살한 케이네스 따위는 김창에게 비할 바가 못 돼.”

“그리 많이 죽였습니까?”

“그래, 그리고 아직도 만족하지 못해 다음으로 죽일 놈을 찾아다니고 있지. 아까 김창의 상대가 무려 케이네스라고 했나? 그 말은 틀렸어. 케이네스의 상대가 무려 김창인 게야.”

만네르헤임은 김창의 무자비한 살육을 떠올리고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을 본 브랜트가 물었다.

“그 정도입니까?”

“저놈에게 몇 번이나 죽을 뻔하다 살아남은 존재로서 말하는데, 그 정도야.”

브랜트가 바로 수긍했다.

* * *

“이 길이 맞나?”

호기롭게 출발한 건 좋았는데 곧바로 문제가 생겼다. 김창은 한참 달리던 중에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딜 봐도 똑같이 생긴 나무들뿐이라 여기가 어딘지 알 수도 없고 제대로 된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잘못된 방향으로 달렸으면 만네르헤임이 뭐라고 했을 텐데, 그러지 않은 걸 보면 방향 자체는 맞다는 거겠지.”

만네르헤임이 자신을 엿 먹이려 한 게 아니라면 방향 자체는 맞을 것이다. 문제는 제국까지 가는 길이 일직선으로 쭉 뻗은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방향을 틀어야 할 텐데 그걸 모르겠다는 점이다.

“옛날에는 지도 봐가면서 여행 가고 그랬다는데 그것참 못 할 짓이야.”

어디를 가든 네비게이션으로 바로 길을 찾을 수 있는 현대 사회에서 살다 온 김창으로선 지도조차 없이 길을 찾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 왜 어떤 노래에서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만 가다 보면 언젠가는 길이 나오리라 했지만 그 말을 믿고서 정처없이 길을 떠나는 건 위험한 일이다.

“혹시나 원탁 놈들이 케이네스를 먼저 잡아버릴지도 모르니까.”

모르스는 원탁으로선 케이네스를 감당할 수 없다고 했지만 세상에 반드시 같은 게 어디 있나? 혹시나 정복자가 각성해서 케이네스를 이겨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김창으로선 차라리 케이네스한테 지는 게 낫지, 먹잇감을 빼앗기는 건 다시 없을 치욕이다.

“다시 돌아가서 길을 물어볼 수도 없고, 일단은 이대로 쭉 가볼까.”

김창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달리기 시작할 때였다. 저 멀리 나무가 흔들리더니 그 뒤에서 웬 괴물 놈들이 나타났다.

“크헤헥! 나는 시체사냥꾼 울브다! 너처럼 겁도 없이 돌아다니는 놈들을 사냥하고 있지! 크헤헥!”

나무 뒤에서 나타난 건 전에 봤던 기괴한 형태의 괴물들과 그림자 괴물이었는데 특이한 점은 그림자 괴물이 말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넌 뭔데 말도 하냐.”

“크헤헥! 나는 시체사냥꾼 울브! 요즘 이 근방의 인간을 너무 사냥하고 다녀서 먹을 게 없었는데 마침 잘 만났다! 얌전히 내 먹잇감이 되어라!”

울브가 손에 들고 있던 곤봉을 휘두르자 괴물들이 괴성을 지르며 김창에게 달려들었다. 그걸 본 김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로 가볍게 손목만 휙 흔들었다.

쐐액! 칼집에서 뽑혀 나간 칼이 벼락처럼 움직이며 괴물들의 목을 썰어버렸다. 괴물들의 목은 몹시 두꺼워서 성인 남성이 두 팔로 다 안을 수조차 없을 정도였는데 너무나도 쉽게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칼날은 그대로 몇 번 하늘을 날더니 순식간에 괴물들을 모두 끝장내버렸다. 본래부터 그 숫자가 열 마리 내외로 몹시 적긴 했지만 적어도 하늘을 나는 칼 한 자루 때문에 전멸할 정도는 아니었다.

시체사냥꾼 울브가 목 떨어진 괴물들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김창이 말했다.

“너도 케이네스 따까리냐? 혹시 그놈 어디 있는지 알아?”

“크헤헥! 저는 길잡이 울브! 저만 믿고 따라오시면 됩니다요!”

김창은 길잡이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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