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칼잡이-183화 (183/200)

183

“크헤헥! 이쪽입니다!”

울브는 갑작스럽게 새로운 직업을 얻게 되었지만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는 며칠 동안 김창과 함께 다녔는데 식사 시간이 되면 알아서 불을 피우고 어디선가 작은 동물 따위를 잡아 와서 간단한 요리를 했다.

입도 없는 그림자 괴물이 하는 요리치고는 상당히 맛있었는데 별다른 조리 도구가 없음에도 이 정도 맛을 낸다는 게 제법 놀라운 일이었다.

“크헤헥! 어떻게,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요?”

제국으로 떠나는 여행을 시작하고 나흘째 되는 날, 울브가 두 손을 싹싹 비비며 김창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적당히 잘 구워져 맛있는 냄새가 나는 토끼 구이를 한 입 뜯어먹던 김창이 입을 우물거리다 물었다.

“그런데 너는 왜 식사를 안 하냐. 혹시 토끼 같은 거 잡으러 가는 척하고 사람 잡아먹고 오는 거 아니야?”

김창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자 울브가 그게 무슨 말이냐며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유, 그럴 리가요. 저희 종족은 며칠 동안 아무것도 안 먹어도 거뜬히 버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사람 말고 다른 것도 먹을 수 있고요.”

지난 며칠 동안 울브와 함께 지내면서 보건대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애초에 정말 사람을 몰래 잡아먹고 다녔다면 자신이 몰랐을 리가 없다.

김창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토끼 구이를 먹기 시작했다. 덩치가 별로 큰 놈은 아니라서 그다지 먹을 건 없었다.

대충 살을 발라 먹고 뼈를 바닥에 내던진 김창이 물었다.

“사람 말고 다른 것도 먹을 수 있는데 그럼 왜 사람 잡아먹고 다녔냐.”

“그냥 주변에 널린 게 사람이니까······.”

하기야 지금은 전쟁 때문에 수많은 병사가 모였으니 짐승보다는 사람을 잡아먹는 게 더 쉬운 일일 터다.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악행을 용서해줘야 할 이유는 없다.

김창이 울브의 뒤통수를 한 대 치며 말했다.

“인마, 사람 말고 다른 것도 먹을 수 있으면 다른 거 먹고 다녀.”

“크헤헥······.”

울브로선 지금껏 사람만 잡아먹고 다니다가 이젠 먹지 못하게 되는 것이 몹시 불만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 칼 들고 있는 인간 놈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는 전에 봐서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런데 무슨 인간이 이 정도로 강할 수 있는 거지?’

이 세상의 인간이라는 종족은 너무나 나약해서 갑옷과 창칼로 무장해도 괴물 하나를 홀로 상대하지 못했다.

그 연약하기 그지없는 목은 괴물이 가볍게 물어뜯는 것만으로도 쉽사리 부러지고 말았으며 척추 역시 그저 발로 한 대 후려치는 것만으로 끊어졌다.

세상에 이토록 쉬운 먹잇감이 어디 있나? 게다가 숫자도 많아서 사냥을 위해 고생할 필요도 없다.

물론 요정인지 뭔지 하는 놈들은 인간과 비슷하게 생겨도 힘이 훨씬 강해서 상대하기 어려웠지만 대신 수가 적어서 물량으로 밀어붙이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울브는 요정보다는 약하지만 인간보다는 강했다. 시체사냥꾼이라는 별명은 허언이 아니었고 그는 실제로 수많은 인간을 학살하고 잡아먹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인간은 걸어 다니는 식량일 뿐이었다. 요정과 싸우는 게 아니라면 인간 병사가 몇이나 덤비든 손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이 남자는 뭔가? 인간처럼 생기긴 했는데 그 강함은 인간의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이게 정말 인간이 맞는 것인가?

어쩌면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거나 인간과 비슷한 다른 종족일지도······.

“그런데 너희 종족이라고 했나? 내 지난번에 보니 너랑 비슷하게 생긴 놈이 하나 있던데, 그럼 너희 종족 전체가 이쪽 세상으로 넘어온 거냐?”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울브는 김창의 목소리에 얼른 정신을 차렸다. 그가 이젠 버릇이 될 것 같은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크헤헥, 전부 다 넘어온 건 아니고 일단 일부만 넘어온 겁니다요.”

“그럼 아직도 넘어오는 중이다?”

“네네, 맞습니다.”

김창이 흐음 소리를 냈다. 죽여봤자 신성도 주지 않는 잔챙이들을 수도 없이 상대하는 건 별로 재밌는 일이 아니다.

이 괴물들이 더 넘어오는 걸 막기 위해선 케이네스를 죽이든지 아니면 차원문을 닫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할 터.

물론 차원문이라면 케이네스가 지키고 있을 테니 어느 쪽을 우선시하든 결국 순서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결과가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왜 여기로 넘어온 거냐. 너희 세상의 신이 그러라고 해서?”

“뭐 그런 것도 있습니다만, 그것보다는 그냥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런 거죠······.”

먹고살기 힘들어? 이런 눈코입도 없는 괴물 놈에게도 생활고가 있단 말인가? 김창이 뭔 소린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울브가 바로 설명했다.

“저희 종족이 살던 세상은 아주 척박합니다요. 장담하는데 이 세상의 인간 놈들이 저희 세상으로 오면 며칠도 안 돼서 전멸할걸요.”

그러니까 이놈들은 자기네 세상의 신이 시켜서 이곳에 온 것도 있지만 정말 먹을 걸 구하려고 이 세상에 왔다는 소리다.

참 우스운 소리지만 김창은 웃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놈들은 딱히 괴물이라 불려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곳 사람들이 보기에 그림자 괴물은 확실히 괴물 같은 생김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 세상 사람들의 기준이 아닌가?

오히려 그림자 괴물들이 보기엔 이쪽 세상의 인간이 더 괴물 같은 생김새일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척박하냐?”

“원래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습니다요.”

“원래는 아니었다?”

“크헥, 네, 원래는 아니었습니다. 이곳만큼 풍요롭지는 않아도 적당히 먹고 살 수는 있을 정도였는데 천상에서 일어난 전쟁 때문에 이렇게 변하고 말았습죠······.”

천상이라, 그것참 흥미로운 이야기군. 김창이 울브 쪽으로 몸을 바투 내밀며 말했다.

“천상의 전쟁이 왜?”

“크헤헥, 그냥 간단히 설명하자면 신들끼리 싸워서 누구는 죽고 누구는 이겼다, 뭐 그런 이야기죠. 문제는 새롭게 주신 자리에 오른 놈이 싸움을 좋아하는 미치광이라 일부러 저희가 살던 세상의 환경을 척박하게 만들어 버린 겁니다. 크헥, 환경이 바뀌면 우린 살기 위해서 서로 죽고 죽여야만 할 테니까요.”

“그거 아주 씹새끼로군.”

“씹새끼···?”

울브가 화들짝 놀라 하늘을 쳐다봤다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긴 그의 신이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네, 맞습니다! 그거 아주 씹새끼입니다. 솔직히 지금까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 씹새기 누가 목이라도 좀 따주지 않을까 매일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거라면 전문가가 있지.”

김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울브가 응? 소리를 내며 물었다.

“전문가가 있다니요? 설마 이 세상엔 신살자 같은 것도 있다는 말씀입니까요?”

“그거 비슷한 거 있어.”

“크헤헥, 그게 누굽니까?”

“나.”

김창이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그걸 본 울브가 멍하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을 죽여보셨나요?”

“아니, 하지만 곧 죽일 예정이야. 일단 이쪽 세상 신의 목부터 따고 그쪽 넘어갈 테니까 얌전히 기다려.”

미친놈인가? 울브는 어이가 없었지만 감히 김창에게 그 말을 내뱉을 용기는 없었다. 그가 늘 하던 대로 비굴한 웃음과 함께 네네 소리를 할 때였다.

“식사도 했겠다, 얼른 가자. 목적지까지 얼마 안 남았다며?”

“아, 그러시죠······.”

울브는 길잡이의 본분을 잊지 않고 열심히 길을 안내했다. 둘은 또 며칠을 함께 걸었고 이젠 정말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 됐다.

며칠 내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울브는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이 언덕만 넘으면 동족들이 있는 곳. 이제 어쩌지? 도망가야 하나?’

울브는 김창이 강하다는 걸 알고 있다. 자신이 부하로 부리던 괴물들을 너무나도 쉽게 학살했으니까.

하지만 그래봤자 결국 혼자 아닌가? 그림자 괴물은 강하다. 자신 같은 쭉정이야 인간 상대로나 설칠 뿐이지만 정말 강한 놈들은 요정까지 썰고 다닌다.

그리고 이 언덕 너머에는 그런 놈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이 우글거리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김창이 격렬한 저항으로 군단에 큰 타격을 줄 수는 있어도 그 많은 숫자를 전부 죽일 수는 없다.

그러니 여기선 이제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도망치는 게 옳다. 그래서 동족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게 맞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런데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안 가고 있냐?”

김창이 어서 가라는 듯 고갯짓을 하자 울브가 잠깐 망설였다. 그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던 김창이 뭔가 말하려는데 울브가 먼저 목소리를 냈다.

“···크헥, 하나만 물어도 되겠습니까요?”

“둘 물어도 좋아.”

지난 며칠간 김창을 모시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가 이런 말장난을 할 땐 기분이 좋다는 뜻이다.

덕분에 울브도 한결 편한 마음으로 말할 수 있었다.

“크헥, 이 언덕 아래에는 제 동족들이 있습니다요. 그들은 숫자도 많고 아주 강하죠. 그런데··· 혹시 혼자서 싸워 이길 자신이 있으십니까?”

김창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울브는 섬뜩함을 느꼈다.

나는 왜 그런 말을 했지? 그냥 얌전히 도망이나 쳤어야 했는데······.

“소리를 들어보니 네 친구들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크헥?”

“내 친구들도 있어. 아마 싸우는 중인 것 같고.”

가만히 소리를 들어보니 정말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함성, 비명, 무기 부딪히는 소리, 욕설, 다급한 발걸음 소리까지.

확실히 저 아래에선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럼 나는 어째야 하나? 저 아래로 달려가서 동족들을 도와야 하나?

아니면 여기서······.

울브가 슬며시 오른손을 창으로 바꿀 때였다.

“내가 혼자서 네 친구들을 다 죽일 수 있을지 궁금하다고 했나? 그럼 가서 물어보자고. 내 친구들이라면 답을 알 테니까.”

김창이 터덜터덜 걸어서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본 울브가 어어 소리를 내며 다급히 뒤를 따랐다.

“죽여! 죽여!”

“이 더러운 괴물 새끼들! 다 죽여!”

“끄아아아악!”

“크헤헥!”

“크르르르!”

“이 냄새 나는 개새끼! 입 다물어!”

전장에선 귀가 떨릴 정도로 요란한 소리가 나고 있었다. 언덕 중간에서 김창과 함께 전장을 지켜보고 있던 울브는 슬쩍 그의 눈치를 봤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인간들은 잘 버티고 있었지만 저쪽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조금씩 밀리는 형국이었다.

아무래도 지휘관처럼 보이는 인간이 두 주먹을 휘두르며 압도적인 위용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혼자서 전장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역시나 인간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동족을 이길 수는 없다. 울브가 그리 확실할 때였다.

“자, 친구들한테 한 번 물어보자고. 내가 이길지 아닐지.”

“그게 무슨 헛소리······.”

꽈르릉!

벼락이 쳤다. 신의 징벌이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이건 신의 징벌 따위가 아니라 일개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있나?

울브의 고개가 휙 하고 돌아갔다. 그는 파지직 소리를 내며 창백한 빛을 발하는 김창을 쳐다봤다.

눈이 멀 것만 같다. 신은 몹시 신성한 존재라 후광 때문에 그 얼굴을 감히 볼 수 없다고 하던데 이것도 그 비슷한 일인가?

울브는 그림자로 태어난 자신이 강렬한 빛 속에서 존재가 지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대로 멍하니 보고 있으면 정말 존재가 사라질 것만 같아서 얼른 고개를 원래대로 돌렸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벼락이 떨어진 후의 참혹한 현장이었다.

벼락은 괴물 무리의 정중앙에 떨어져 수많은 괴물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소멸시켰다. 맹렬히 진격하던 괴물 무리는 그 공격에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제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러나 인간들은 달랐다. 그들은 오히려 이 벼락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커다란 함성을 내질렀다.

그것으로 전장의 흐름이 뒤바뀌었다. 인간들은 전진했고 괴물들은 후퇴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이 남자 때문이다. 인간의 몸으로 벼락을 다루는 남자.

울브는 얼이 빠진 채로 전장을 쳐다보다가 선두에서 주먹을 휘두르고 있던 남자가 이쪽을 쳐다보는 걸 봤다.

그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곧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크게 소리쳤다.

“씨발, 인간 핵미사일 왔다! 역배가 승리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