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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브는 문득 자신이 살던 세상을 떠올렸다. 그곳은 죽지 않으려면 먼저 죽여야 하는 곳으로 살기 위해선 남들의 것을 빼앗고 약탈해야만 했다.
당연히 종족 전체가 생존을 위해 매일 같이 전쟁을 벌였다. 빌어먹을 천상의 신은 그걸 보고 낄낄 웃고 있었을 테지.
아무리 재밌는 장난도 몇 번 반복하면 흥미가 떨어질 법도 한데 신은 자기 마음대로 바꾼 세상을 몇백 년이 지나도 원래대로 돌려주지 않았다.
그 길고 긴 시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강자뿐이었다. 강자는 모든 것을 빼앗고 독점하며 약자들은 살기 위해 그 발밑에 머리를 조아렸다.
이름난 강자는 혼자서 수백 명을 상대할 수 있었다. 이쪽 세상의 인간이 그림자 괴물 하나를 이기지 못한다는 걸 생각하면 그건 말도 안 되는 강함이었다.
그러나 그런 강자조차도 자연의 위대함을 상대로는 겸손해졌다. 그림자 괴물들이 살던 세상은 때때로 사나운 바람이 모든 걸 날려버리거나 거대한 화산이 불을 뿜을 때가 있었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도 바람을 몰아낼 수는 없었고 용암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갑작스레 자연재해가 일어날 때, 모든 그림자 괴물은 쥐 죽은 듯 숨어 자연의 분노가 사그라들기만을 기다렸다.
그 누구도 자연을 이길 수는 없다. 그건 정해진 법칙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그건 결코 변하지 않는 진리다.
그럼······.
“끄아아악!”
“크헥! 벼락이다! 벼락이야!”
“끼아악!”
그럼 저기 있는 저 남자는 대체 뭔가? 손짓 한 번으로 벼락을 떨어트리고 있는 저 남자는 그림자 괴물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자연재해 그 자체가 아닌가?
가볍게 휘두르는 칼날 하나가 곧 벼락이요, 뒤따르는 주먹은 곧 불꽃이다. 벼락과 불꽃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김창의 모습은 보고서 울브는 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하니 가만히 있었다.
그가 저도 모르는 새에 한마디 중얼거렸다.
“벼락불······.”
자연이 곧 신이라면 저 남자는 벼락불의 신일 것이다. 만약 아니라면 죽음의 신이거나······.
“몰아붙여! 몰아붙여! 이미 우리가 이긴 싸움이다! 김창 저놈만 믿고 그냥 다 달려들어!”
선두에서 요란하게 날뛰고 있던 남자가 신이 난 듯 주먹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걸 본 김창이 기대에 화답하듯 또 한 번 벼락을 떨어트렸다.
벼락이 한 번 떨어질 때마다 괴물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갔다. 민첩하고 튼튼한 육체를 가진 그림자 괴물은 그나마 몸 일부를 잃고서라도 목숨을 건졌지만 그럴 능력이 없는 네 발 달린 괴물들은 그대로 즉사했다.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수백 마리의 괴물들이 죽어 나가는 걸 본 울브는 말문이 막혔다.
왜? 김창이 말도 안 되게 강해서? 아니, 저런 괴물 같은 놈을 배신하려고 했던 자신에게 기가 막혀서.
울브는 이제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알았다. 그가 두 주먹을 꽉 쥐고서 외쳤다.
“김창 만세! 김창 만세!”
전장은 소란스러웠지만 목소리가 워낙 커서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뜬금없이 나타난 김창을 보며 잠깐 당황했다가 곧 기세가 올라 힘껏 무기를 휘두르던 병사들은 연신 만세를 하고 있는 그림자 괴물을 보고서 다시 당황했다.
저놈이 미치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승산이 없으니 목숨을 건지려고 저런 짓을 하는 건가?
어느 쪽이든 가능성은 있지만 굳이 저놈을 살려둬야 할 이유는 없다. 그림자 괴물과의 전쟁은 지긋지긋했고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병사 중에는 가족이며 친구를 잃은 자들이 많았고 그들은 그림자 괴물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서 싸우고 있는데 저놈은 자기 혼자만 살자고 저딴 짓거리를 벌이다니?
울브의 모습을 보고서 화가 난 병사들 몇 명이 그쪽으로 달려갈 때였다.
“이놈 건드리지 마라.”
나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엔 김창이 있었다. 하지만 방금까진 전장 중앙에 있지 않았나?
병사들이 당황하는 사이에 김창이 다시 말했다.
“이 새낀 내 따까리고, 내 따까리 건드리는 건 나 건드리는 것과 같은 일이야. 그래서, 나랑 한 번 붙을 생각 있나?”
그럴 리가? 병사들이 얼른 고개를 저었고 김창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리로 돌아가. 돌아가서 너희 할 일을 해. 나도 그럴 테니까.”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자 김창도 발을 움직였다. 한 발자국 움직이는 듯 보였는데 눈을 깜빡이고 나니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울브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니 어지러운 전장 속에서 김창의 모습이 흘끔 보였다.
점멸 마법을 쓴 것도 아닌데 어찌 저리 빠르게? 단순히 벼락을 다루기만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벼락처럼 빨리 움직일 수도 있는 모양이지······.
울브는 멍하니 김창의 싸움을 보다가 다시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크르륵!”
“후퇴! 후퇴한다!”
“본대로 돌아가! 본대로!”
김창 한 명 때문에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괴물들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퇴각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는 없었지만 누군가 외친 후퇴 명령을 듣고서 다급히 몸을 돌려 도망치는 게 보였다.
물론 지금까지 당한 게 있으니 병사들은 괴물들이 도망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이 함성과 욕설을 내뱉으며 괴물들의 뒤를 쫓아가려는데 또 한 번 우렛소리가 울렸다.
꽈르릉 소리와 함께 떨어진 벼락은 도망치는 괴물 무리의 후미를 전멸시키는 동시에 돌격하는 병사들의 진로를 가로막아 그들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괴물들은 여전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는 중이었지만 병사들은 고개를 돌려 김창을 쳐다봤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그가 칼을 흔들어 핏물을 털어내며 말했다.
“더 쫓아가지 마.”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그걸 듣지 못한 자는 없었다. 반신의 격에 오른 그의 목소리에는 신성이 담겨 있었고 모두를 복종하게 만들 권위가 있었다.
병사들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터덜터덜 몸을 돌리는데 누군가 짜증스레 외쳤다.
“왜 더 안 쫓아갑니까!”
누가 감히 겁도 없이 반신에게 대드나 했더니 웬 젊은 병사였다. 그가 두 주먹을 꽉 쥐고서 외쳤다.
“저 새끼들한테 당한 거 생각하면 머리통 뽑아다 볼링을 쳐도 시원찮은데 왜 그냥 보냅니까?”
그의 몸은 전투의 열기로 달구어져 있었다. 투구에 짓눌린 머리카락에서 땀방울이 비 오듯 쏟아지는 것만 봐도 그랬다.
김창은 그의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툭 내뱉었다.
“위험하니까.”
“위험해? 그 잘난 칼잡이가 고작 위험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적들을 그냥 보낸다고요?”
“내가 위험한 게 아니라 너희가 위험하다고. 난 혼자서 저 새끼들 죄 쓸어버릴 자신 있는데, 그럼 너희는? 설마 내가 너희 지키면서 싸워야 하나? 내가 왜?”
김창의 싸늘한 목소리에 병사가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머리가 뜨거워져 아무 생각없이 덤벼 들었던 병사는 이제야 지금 자신과 마주한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히 인지했다.
순간 머리가 차갑게 식은 병사는 말을 더듬으며 뒤로 물러났다.
“죄, 죄송······.”
분위기가 어색해지려는 찰나에 누군가 호탕하게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김창! 이 사랑스러운 새끼! 내가 언젠가 너 돌아올 줄 알았지! 이래서 내가 역배를 못 끊어!”
이 세상에 역배가 어쩌고 할 만한 놈은 한 명뿐이다. 김창은 고개를 돌려 황금성의 얼굴을 확인했다.
“설마 내가 돌아오는 것 가지고 내기라도 했냐? 뭔 또 역배가 어쩌고야?”
김창은 이미 지옥으로 쫓겨난 적이 한 번 있었는데 어떻게든 돌아왔다. 하지만 그땐 지상에서 지옥으로 쫓겨난 것이니 돌아올 방법이 없는 게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다른 차원으로 쫓겨났으니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극히 낮았다.
마음대로 여러 세상을 오고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플레이어들 역시 자유롭게 지구와 왕래했을 텐데 지금껏 그러지 못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니 만약 김창이 돌아올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내기를 했다면 돌아올 수 있다는 쪽이 확실히 낮은 확률이리라.
“뭔 소리야? 내가 말한 건 이번 전투인데? 이야, 우리가 수가 좀 딸려서 이번엔 진짜 죽겠구나 했는데 결국 살았네.”
“그럼 내 귀환을 가지고는 내기를 안 했다는 거냐?”
황금성이 씩 웃더니 엄지를 척 하고 들어보였다.
“그런 걸 가지고 내기는 안 하지.”
이 녀석······. 아무리 그래도 같은 플레이어끼리 나름 선은 지키는 모양이다. 도박 중독자가 이 재미있는 주제를 가지고 도박을 안 했다니 참으로 기특한 일이다.
김창이 감동하려는 찰나에 황금성이 말했다.
“애초에 내기할 거리가 되나? 내 장담하는데 넌 어느 세상에 던져놔도 그 세상 신 협박해서 이쪽으로 돌아올 놈인데. 내가 아무리 도박을 좋아해도 확률이 100%인 도박은 안 하거든?”
감동이 깨졌다. 김창이 황금성의 머리를 쥐어박으려다 참았다.
“일단 가자. 내가 듣기로 제국에서 집합한다고 하던데 너도 제국으로 가던 길이었지?”
“그래. 대륙 각지에서 모은 병사들을 데리고 제국으로 가는 게 내 역할이었는데 마침 딱 적들을 만나버리고 말았지 뭐야.”
“네 실력치고 제법 고전하던데. 이유가 뭐냐? 저놈들 중에 강한 놈이 있었나?”
“아니? 그냥 마력 중첩 10연속 여러 번 하다가 실패해서 그런데?”
대륙의 명운이 걸린 전쟁을 하는데 그딴 짓을 하고 싶나? 김창은 정말 황금성의 머리를 쥐어박을까 고민했다.
“다른 놈들은 다 어디 있냐? 벌써 제국에 도착했나?”
“그런 사람도 있을 거고 아닌 사람도 있을걸? 여기가 뭐 지구처럼 스마트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연락할 수단이 없으니.”
“그럼 자세한 건 가봐야 안다는 소리군.”
“그래. 일단 잠깐만 휴식하고 출발해도 될까? 너랑 다르게 다른 사람들은 많이 지쳤으니까 말이야.”
김창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병사들을 배려해서 그들이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했다.
만네르헤임의 부대와 만났을 때처럼 그냥 먼저 가버릴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이젠 곧 있음녀 제국인데 그래야 할 이유는 없었다.
“마침 식사 시간인데 허기 좀 달래고 가도 되지?”
김창은 잠깐 하늘을 봤다. 배가 고프긴 해서 고개를 끄덕이니 황금성이 병사들에게 식사 준비 명령을 내렸다.
방금까지 피비린내 나게 싸웠던 곳에서 식사라니, 보통 비위가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수도 없이 이어진 전투 때문에 병사들의 감각은 상당히 무뎌져 있었다.
김창은 대충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울브가 크헤헥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아유, 승리를 감축드립니다요. 그럼 식사 준비할까요?”
“그 새낀 뭐야?”
황금성이 그림자 괴물인 울브를 보고서 눈을 크게 뜨자 김창이 대답했다.
“내 따까리.”
“···걔 종족이 여길 침략하러 온 건 알지?”
“알지. 조만간 얘네가 살던 세상도 한 번 방문할 생각이야.”
“그래서 복수하려고? 하기야 인간 핵미사일을 떨어트리면 볼만하긴 하겠네.”
“뭔 소리야. 얘네 세상의 신 죽이러 가는 건데.”
신이라는 게 무슨 해충 같은 것도 아니고 뭘 다른 세상까지 가서 죽이나? 황금성이 어이없어하는데 김창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크헤헥, 식사 완성입니다요!”
그림자 괴물 주제에 넉살 좋게 병사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받아온 알브가 국자를 들고 배식을 시작했다.
황금성은 그림자 괴물이 만든 요리에 미심쩍어했지만 그 맛을 보고서 곧 의심이 풀렸다.
“뭐야, 얘 요리 잘하는데?”
“그러니까 데리고 다니는 거지.”
원래 나는 요리사가 아니라 길잡이로 일하고 있던 거 아닌가? 울브는 자신의 재능이 인정 받았음을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이야, 진짜 맛있네. 그래서 괴물 양반? 이름이 뭐야? 난 황금성인데.”
“크헤헥, 울브입니다.”
“그래, 울브. 다음에 또 네 요리를 먹을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
“언젠든 만들어드립죠.”
황금성이 하하 웃으며 스튜를 떠먹을 때였다. 하늘이 흐려져 고개를 들어보니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우중충한 것이 보였다.
“비가 오려나?”
김창은 여전히 식사를 했다. 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입만 움직여 말했다.
“오겠군.”
“비가? 네가 보기에도 그래?”
“아니.”
그럼? 황금성이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정면의 공간이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김창이 스튜의 건더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굳이 남 밥 먹을 때 찾아온 씹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