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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샬레는 순간 자신이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방금 저 인간이 뭐라고 했던가? 아니, 애초에 내가 뭐라고 말했었지?
저쪽 세상의 신이 이쪽으로 넘어오기 전에 케이네스를 완전히 끝장내라고 요구하지 않았나?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이 뭐가 어쩌고 어째?
“왜 그래야 하냐고요? 그 이유라면 아까도 분명 설명한 것 같은데요!”
“네가 나한테 한 말이라고는 저쪽 세상의 신이 넘어오니까 케이네스를 죽여야 한다는 것뿐이었는데.”
티샬레는 흘낏 곁눈질로 케이네스를 쳐다봤다. 그의 몸이 아까보다 더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입은 이제 크게 벌어진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찢어져서 피거품이 흐르고 있었다.
참 보기 흉한 광경인데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목구멍 너머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이다.
분명 그림자 신은 케이네스의 몸을 문으로 삼아 이쪽 세상으로 넘어오려고 하는 것일 텐데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쉽게 가늠이 되질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뭐가 어찌 됐든 당장 케이네스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뿐이다.
티샬레는 다시 김창을 바라보며 다급히 말을 뱉어냈다.
“네, 그게 바로 이유죠! 저쪽 세상의 신이 이쪽으로 넘어오면 위험하니까!”
“넌 집에 바퀴벌레가 들어오면 못 본 척하는 유형의 인간이냐?”
갑자기 그 끔찍한 벌레의 이름은 왜? 티샬레가 저도 모르게 바퀴벌레가 집 안에 들어온 광경을 상상했다가 으으 소리를 내며 몸서리를 쳤다.
“그 이야기는 갑자기 왜 하는 건가요?”
“집에 바퀴벌레가 들어왔다고 하자. 그걸 못 본 척하고 놈이 사라지길 기다리는 건 아주 쉬운 일이지. 하지만 그건 문제의 해결이 아니야. 도피지. 넌 지금 당장 직면한 위험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거냐?”
티샬레는 김창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았다. 그러니까 그림자 신이라는 위협이 당장 목전까지 들이닥쳤는데 그걸 못 본 척하려는 셈이냐고 묻는 것이다.
확실히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 비유는 잘못됐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서 바퀴벌레는 아직 집 안에 들어온 게 아니니까.
“저보고 집 안의 바퀴벌레를 못 본 척하는 유형의 사람이냐고 물으셨죠? 저는 애초부터 집 안에 바퀴벌레를 안 들이는 유형의 사람입니다!”
그림자 신은 아직 이쪽 세상으로 넘어오지 않았다. 그러니 당장 직면한 위험을 모른 척한다는 비난은 정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당장 비난을 받아야 할 건 김창 쪽이었다. 문단속만 잘해도 바퀴벌레가 집 안에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있는데 어서 들어오라는 듯 문을 활짝 다 열어두고 있지 않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케이네스를 죽여야 해요!”
“그래, 확실히 안 늦은 것 같군. 난 이 녀석이 빨리 이쪽으로 넘어오길 바라는데 대체 뭘 하는지 아직 꾸물거리는 거야?”
티샬레는 그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들으며 자신의 무기를 꽉 쥐었다. 그녀는 김창이 왜 저러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신성, 모든 건 그 빌어먹을 신성 때문이다. 저 정신 나간 반신은 이미 승천에 필요한 신성을 모두 모았음에도 여전히 신성에 집착하고 있다.
저런 모습을 보면 케이네스가 김창을 유독 싫어하는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누구는 신성이 모자라서 승천을 못 했는데 저 미친놈은 저 혼자 신성을 독식하는 것도 모자라 다른 세상의 신성까지 뺏으려 들고 있지 않나.
“대체 왜 그토록 신성에 집착하는 건가요! 이제 신성은 충분히 모았잖아요!”
“내가 아직 승천할 자가 아니었던 시절의 일이야. 그때 나는 신성 대신 금화를 모았지. 그때 난 실력 있는 칼잡이라 의뢰로 벌어들인 금화가 아주 많았어. 내 장담하는데 그걸로 성을 하나 살 수도 있었을걸. 그런데 난 금화를 벌기만 하고 쓰진 않았어. 왜 그랬는지 아나?”
“···모르겠는데요.”
“그럼 내가 왜 신성을 모으는지 설명해도 넌 몰라.”
당연히 모르겠지. 뭔 영문 모를 소리만 지껄이고 있으니까. 티샬레가 이를 부득 갈다가 문득 개눈깔을 쳐다봤다.
“이봐요! 당신이라도 좀 말려봐요! 저 정신 나간 반신이 이 세상 전체를 위험에 빠트리려 하고 있다고요!”
티샬레가 갑작스레 말을 걸자 개눈깔이 뭔 소리를 하냐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폭풍한테 제발 좀 멈추라고 말하면 멈추나?”
“네?”
“폭풍을 말로 멈출 수 있느냐고.”
그거야 불가능한 일 아닌가? 폭풍이 사람도 아닌데 말을 들을 리가? 티샬레가 그리 말하려다가 무언가를 깨닫고 아 소리를 냈다.
그걸 본 개눈깔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런 거다. 김창을 말려보라고? 저 미친놈을 누가 말리나?”
하기야 김창은 가는 곳마다 온갖 사고를 몰고 다니는 폭풍 같은 인간이니 개눈깔이 멈추란다고 멈출 리가 없다.
티샬레가 하아 한숨을 내뱉을 때 개눈깔이 말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라! 죽으면 지옥에 자리 내줄 테니까. 안 그래도 지금 지옥도 일손이 부족한데 와서 거들어주면 고맙지.”
“미안한데 그림자 신이 이쪽으로 넘어오면 지옥도 무사하진 못할 걸요.”
“뭐라고!”
아무래도 이 멍청한 여자는 그림자 신이 이쪽으로 넘어와도 지옥은 무사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개눈깔이 자기 손톱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걸 본 티샬레가 버릇처럼 한숨을 내뱉었다.
고개를 돌려 케이네스 쪽을 보니 그는 잠깐 사이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기괴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마치 수술을 위해 개복(開腹)을 한 것처럼 배가 갈라졌고 살가죽이 좌우로 쭉 늘어났다. 누군가 억지로 잡아당긴 것도 아니고 제 손으로 뱃가죽을 잡아뜯고 있으니 그것참 역겨운 모습이었다.
복부의 장기는 흐물흐물하게 변해 바닥으로 전부 떨어졌고 뼈는 저 너머에서 누군가 억지로 들이밀고 나오려는 탓에 쩌저적 소리를 내며 부서지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신인데 좀 고상한 방식으로 나올 수는 없었던 것일까? 티샬레가 괴물이 출산을 하는 듯한 역겨운 광경을 보고서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는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김창이 강하다는 건 알지만 과연 신보다 강할까?
그가 지금까지 죽여온 적들은 모두 강적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중에 신은 없었다. 김창이 보유한 신성의 양이 신에 버금갈 만큼 많다고 해도 저쪽 세상의 신은 이쪽 세상의 신보다 훨씬 더 강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어쩌면 김창이 그림자 신조차 죽여버릴 수도 있지만 어쩌면 별 대단한 싸움조차 못 하고 너무나 쉽게 죽어버릴 수도 있다.
그림자 신이 이쪽 세상으로 넘어오게 두는 것도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김창 본인의 흥미 때문인 상황에서 신과의 싸움이라는 무모한 도박을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티샬레는 단언했다. 없다. 내 가문의 이름을 걸고서 맹세하는데 결단코 그딴 건 없다.
그러니 케이네스를 죽여야 한다. 점차 인간이 아니라 문의 형상으로 변해가고 있는 저 기괴한 생명체의 숨통을 끊어버려야 한다.
멋대로 케이네스를 죽였다는 이유로 김창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뭐 어떤가? 내 목숨 하나로 세상을 구했다면 싸게 친 거지.
결심을 굳힌 티샬레가 천천히 케이네스 쪽으로 움직였다. 김창은 케이네스의 몸을 통해 이쪽으로 오려 하는 그림자 신을 구경하느라 그녀의 접근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대로 마법의 힘을 담은 창을 내질러 케이네스의 숨통을 끊는다. 이미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보기 힘든 몰골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심장을 찌르면 죽긴 하겠지.
이건 단 한 번뿐인 기회이자 마지막 기회다. 티샬레의 창날에 마력이 깃들었다. 속으로 숫자 셋을 세고서 바람처럼 창을 내지를 때였다.
“티샬레.”
티샬레의 두 눈이 커졌다. 그녀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케이네스의 심장을 찌르지 못한 창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리를 잘못 쟀나? 아니다. 완벽한 기습이었으나 단 한 명 때문에 실패했을 뿐이다. 티샬레는 창날을 맨손으로 붙잡고 있는 김창의 손을 바라봤다.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러나.”
김창은 티샬레에게 뭘 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고 화내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물러나라고만 말했다.
애초에 티샬레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리고 네가 아무리 설쳐봤자 정해진 결과는 바꿀 수 없다는 것처럼, 항상 그랬듯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을 뿐이다.
그것이 티샬레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한때는 요정 기수였고 이제는 요정 대가문의 주인으로 성장한 그녀조차 반신을 상대로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네가 뭘 어쩔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고.”
개눈깔이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티샬레를 위로했다.
“나도 쟤한테 많이 깝쳐봐서 잘 알아. 난 그래도 한 번 죽고 나서 다시는 깝치면 안 되겠다는 걸 배웠는데 그래도 넌 안 죽고 배웠으니 참 잘된 일이야.”
지금 그걸 위로라고 하나? 티샬레가 눈을 부라리자 개눈깔이 왜 그러냐는 듯 눈썹을 까딱거렸다.
“후, 됐어요. 이제 이 세상은 저 신성에 미친 반신 때문에 멸망할지도 모르겠군요.”
“뭘 그리 걱정해? 내가 아는 김창은 신도 죽일 놈인데.”
“그게 문제죠. 만약 신을 죽였다고 해요. 그럼 그 뒤에는? 한 번 죽여봤으니까 온 세상의 신을 다 초대해서 죽이려고 들 텐데, 그걸 감당할 수 있겠어요? 만약 한 번이라도 지면 이 세상이 멸망하는 건데?”
“안 그러길 빌어야지 뭘······.”
빈다고 될 것 같으면 세상에 실패하는 사람이 왜 있나? 티샬레는 개눈깔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서 버릇처럼 한숨을 또 내뱉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그냥 될 대로 되라지. 가만 보니 그림자 신도 이제 곧 나올 것 같으니 김창이 이기라고 응원이나 하자.
“오, 곧 나올 것 같군.”
항상 덤덤하게 들리던 김창의 목소리에 즐거움이 묻어났다. 그의 말대로 이제 완전히 문으로 변해버린 케이네스의 배 속에서 뭔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손 크기를 보니 마치 거인의 것처럼 거대한데 아무래도 그림자 신은 제법 덩치가 큰 모양이었다.
손만 해도 웬만한 성인 남성만큼 큰데 저기서 몸 전체가 다 나올 수 있는 건가? 일단 다 나오려면 시간 좀 걸릴 것 같은데 손가락이라도 몇 개 좀 잘라두면 싸울 때 편하지 않을까.
김창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즐겁게 그림자 신의 현현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음? 하늘 위에 뭔가······. 벌써 별이 떴나?”
그 멍청한 목소리는 개눈깔의 것이었다. 싸우느라 시간을 제법 쓰긴 했지만 아직 대낮이었고 별이 뜰 때는 아니었다.
지금이 초저녁도 아니고 별이 뜨긴 왜 뜨냐. 김창이 그리 타박하려고 하늘을 쳐다볼 때였다.
정말 뭔가 반짝이고 있었다. 혹시 우주에서 이 싸움을 관람하고 있는 신들이 이쪽을 향해 뭔가 신호라도 보내는 것일까?
누구는 발로 뛰면서 싸우고 있는데 누구는 팔자 좋게 싸움 구경이나 하고 있으니 참으로 억울한 일이다.
김창이 쯧 하고 혀를 차며 하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를 때였다. 가만 보니 빛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니, 저건 커지고 있는 게 아니라······.”
빛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걸 인식하자 그 크기가 커지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다. 뭔가 위력적인 공격이라는 건 확실해서 김창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저게 뭔지는 몰라도 저런 공격에 휘말리는 건 곤란했다. 그런 생각으로 뒤로 물러났다가 빛이 노리는 방향을 보고서 아차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나 완벽하게 상황을 이해했을 때는 이미 늦고 난 후였다.
콰앙!
정확히 케이네스를 노린 것처럼 갑자기 쏟아진 빛이 그의 몸을 일소했다. 꾸물거리며 그 작은 몸을 헤집고 나오던 그림자 신의 손이 바르르 떨리다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인가? 모두가 지금 벌어진 일을 이해하지 못해 가만히 있는데 김창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얘 어디 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