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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은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눈을 떴다. 누구는 천상이라 말하고 누구는 우주라 말하는 곳이었다.
대부분은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와보지 못할 곳이지만 김창은 벌써 세 번째 방문이었다. 하지만 그 세 번의 방문이 모두 같은 목적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지난 두 번의 방문은 아직 인간일 적의 일이지만 지금은 진정한 신으로서 천상에 올랐다. 원래 신이라고 하면 전지하고 전능한 존재를 떠올릴 텐데 막상 진짜 신이 돼보니 그런 느낌은 전혀 없었다.
신이 됐다고 하면 뭔가 특별한 권능이 생겨야 할 텐데 그런 게 생긴 것 같진 않아서 약간 의아스러웠다.
그러나 김창은 그 문제에 대해서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진짜 신 노릇 할 것도 아닌데 그런 게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그는 일단 할 일부터 하기로 했다.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내가 안 그랬다.”
“난 아직 아무 말 안 했다.”
죽음의 신 모르스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곧 할 거잖나? 넌 분명 내가 케이네스를 죽였다고 생각해서 여기 온 거겠지? 그런데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난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어. 그러니까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라고.”
내 눈이 뭐 어때서? 김창이 가만히 생각하고 있는데 모르스가 또 말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넌 지금 내가 범인이라는 증거를 찾아내면 당장 칼로 찌르겠다는 눈을 하고 있어.”
“친절한 설명 고맙다, 모르스. 그래서 정말 네가 안 했다고?”
“애초에 왜 내가 했으리라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도리어 내가 그 이유를 좀 들었으면 하는데.”
김창이 선선히 대답했다.
“지난번에 네가 그랬지. 케이네스 그놈을 막아달라고. 그런데 천상에서 나 하는 짓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괜히 일 더 키우려고 하는 것 같아서 끼어든 거 아닌가?”
“네가 일을 더 키울 것 같아서 끼어들었다고? 고작 그런 이유로 케이네스를 죽일 리가 있나. 내 장담하는데 네 심기 거스르는 게 오히려 일을 더 크게 만드는 길이야.”
역시 신이라 그런지 당장 직면한 문제만 보는 티샬레보다 훨씬 더 똑똑하다. 김창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그럼 진짜 범인은 누구냐? 대체 어떤 간 큰 놈이 내 먹잇감을 가로챈 거야?”
“일단 말해두는데 우리는 아니야. 물론 나도 아니고.”
우리라는 것은 천상에 있는 다른 신들을 뜻하는 것이리라. 지금껏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데 모르스의 말로는 김창이 무서워서 숨어 있는 것이라고 했다.
갑자기 머리가 홱 돈 게 아닌 이상 그런 놈들이 케이네스를 건드리려 할 리는 없다.
그럼 진범은 누구인가? 티샬레는 이 공격이 하늘에서 이루어졌고 애초에 이런 짓을 할 만한 존재가 신뿐이라 했으니 범인은 천상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르스는 신 중엔 범인이 없다고 했다. 티샬레의 추측이 틀린 것인가? 아니면 모르스가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내 인내심을 시험하려는 거라면 날을 잘못 잡은 것 같은데.”
김창의 목소리는 무심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게감이 있었다. 죽음의 신은 모르스지만 오히려 그보다 훨씬 더 죽음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모르스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내 전에도 설명한 것 같은데 우린 신이지만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야. 엄밀히 말해서 우린 신 비슷한 뭔가고 진짜 신은 따로 있지. 저 위 말이야.”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자 김창도 그걸 따라 고개를 뒤로 젖혔다. 모르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진 알겠지만 이 위에 뭐가 있긴 하나?
엄밀히 말해서 이곳은 천상이 아니라 우주고 그보다 더 위는 없다. 물론 김창은 과학자가 아니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지식을 바탕으로 생각할 뿐이다.
어쩌면 대기권을 지나면 우주가 나오는 것처럼 우주를 넘어서면 그 위에 뭐가 또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김창이 볼 때 모르스가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물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개념적인 이야기지. 그러니까 우주 위에 또 다른 공간이 있다는 게 아니라 신 위에 진짜 신이 있다는 소리라고. 무슨 말인지 알지?”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스는 그 말을 하고서 입을 다물었는데 얼굴을 보니 이제 대충 알아들었느냐고 말하는 듯 보였다.
입이 있으면 그냥 다 말하면 될 텐데 뜬금없는 소리만 하고 입을 다물어 버리는 이유가 뭔가?
이유야 뻔했다. 자기 입으로 말하긴 껄끄러운 일이니까.
“그래서 그 진짜 신이라는 놈이 범인이군. 하나 묻겠는데 진짜 신이라면 어느 정도로 대단한 거지?”
“글쎄······. 나도 직접 만나본 건 아니라서. 하지만 우리보다 잘나긴 하겠지.”
“그러냐.”
김창이 무심히 말했다.
“그래서 저 위로 가는 방법이 뭐냐?”
“새롭게 신이 됐으니 인사라도 드리려고 가는 건 아닐 테고.”
당연히 아니지. 김창이 픽 웃자 반대로 모르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나도 몰라.”
“모르면 끝나나? 모르면 알아 와야지.”
“······그걸 누구한테 물어보는데?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신을 만나본 적이 없어. 그런데 누가 신을 만나는 방법을 알겠나?”
김창이 가만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전에 듣기로 신을 죽이면 그가 담당하고 있는 개념이 사라진다고 했던가? 가령 널 죽이면 죽음이 사라진다고 했었지.”
갑자기 웬 뜬금없는 소리인가. 모르스가 떨떠름함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럼 만약 내가 신을 잔뜩 죽여버린다면 이 세상이 아주 혼란스러워지겠군. 만약 태양신을 죽인다면 태양이 사라질 테고, 널 죽이면 죽은 자들이 어두워진 세상을 영원히 배회할 테니 말이야.”
“···그래서?”
“내 보기에 진짜 신이라는 양반은 이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는 걸 원하지 않아. 그래서 굳이 직접 손을 써서 케이네스를 죽였던 거고. 고작 그림자 신을 이쪽으로 불러오는 것만 해도 그리 싫어하는데 웬 놈이 신을 죄 죽이고 다니면 아주 기겁을 하겠군. 안 그래?”
모르스는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오, 이런. 김창, 제발. 그런 미친놈 같은 생각 좀 그만해.”
“내가 뭘 어쨌는데.”
“뭘 어쩌긴? 지금 네 말은 이거잖아. 일부러 신을 다 죽여서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든 다음에 진짜 신을 불러내겠다는 거 아니야? 이 미친놈, 그런 짓을 하면 이 세상 망해!”
“그럼 나와서 막으라 그래. 세상 망하게 둘 거야? 막아야지.”
김창이 허리춤의 칼을 뽑았다. 그걸 본 모르스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데 김창은 무심히 거리를 좁혔다.
“너 지난번에 듣자 하니 나보고 너 죽여서 은퇴시켜달라며? 그 소원 지금 들어줄게.”
“···엄밀히 말해서 그건 네가 날 죽이고 내 자리를 가져가라는 소리였지.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날 죽이라는 게 아니었어.”
“왜 이유가 없나? 신 불러내야 하니까 죽이는 건데.”
“아까 내가 한 말이 이해가 안 가나? 다음에 신이 될 사람이 없는데 무턱대고 신을 죽이면 세상 망해!”
“너도 내가 아까 한 말이 이해가 안 가나? 그러니까 그거 막으려면 신보고 얼른 나오라고 하라고.”
말이 안 통하다 못해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듯한 기분이다. 김창은 진심으로 신들을 죽여 진짜 신을 불러내려 하고 있고 자신은 그 첫 번째 제물이 될 상황에서 모르스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러면 진심으로 싸워야 하나? 아무리 김창이 강하더라도 자신 역시 한때 지상에서 제법 끗발 날리던 존재였다.
만약 불리할 것 같으면 다른 신들까지 불러서 함께 싸우면 될 일 아닌가? 모르스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마음을 굳혔다.
일단 여기서 김창을 제압한다. 그 뒤는 진짜 신이 알아서 해결하겠지.
모르스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칼날을 손으로 쳐냈다. 신좌에 오른 존재답게 맨손으로 칼을 쳐냈지만 상처 하나 생기지 않았다.
그걸 본 김창이 호오 소리를 냈다.
“어쭈, 막아?”
저게 신한테 할 태도인가? 물론 저놈도 같은 신이긴 하지만······.
“막지 마라. 한 대 맞고 갈 걸 두 대 맞고 가면 너만 손해야.”
안 막으면 죽는데 그걸 말이라고? 모르스가 죽음의 신으로서 권능을 휘두르려 할 때였다.
김창이 그보다 한 박자 빠르게 움직였다. 모르스가 반사적으로 두 눈을 부릅떴다. 아무리 신이라도 이건 반응하기 어렵다.
이러면 어깨라도 하나 내주고 반격을 시도해야······.
“···음?”
순간 칼이 사라졌다. 너무 빠르게 휘둘러서 눈이 쫓아가지 못한 줄 알았는데 한참이 지나도 어깨가 잘려나가는 일은 없었다.
모르스가 당황하며 두 눈을 끔뻑였다. 지금 자세히 보니 칼만 사라진 게 아니라 김창까지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여기엔 아무도 없었다는 것처럼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혹시 김창이 신이 되면서 새로 얻은 권능인가 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모르스가 보기에 그냥 칼 휘두르는 게 어지간한 권능보다 더 강할 듯한데 왜 굳이 그런 걸 쓰겠는가?
그리고 정말 권능을 썼다면 이제 다시 나타나야 할 때가 아닌가?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 걸 보면 뭔가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모르스는 이유야 어쨌든 자신이 살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생각을 거듭했다.
김창에게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가능성 있는 것은 두 가지.”
아무도 없건만 모르스는 마치 누군가에게 설명하듯 손가락을 두 개 들며 말했다.
“이번 일에 신이 개입했다.”
김창은 자신이 신을 죽이겠다고 난동을 부리면 분명 신이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그건 확실히 신을 불러내기에 가장 효과적이면서 그럴듯한 방법이었다. 그 방법을 쓰면 죄 없는 신들이 죽어야 할 테지만 어쨌건.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신은 정말 이번 일에 개입했다. 김창이 날뛰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리고 그가 모르스를 죽이는 걸 막기 위해 자신이 있는 곳으로 그를 불러냈다.
“그리고 두 번째 가능성은······.”
모르스는 아무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멀고 먼 별의 바다를. 원탁의 이방인들이 넘어왔고 김창 역시 몇 번이고 지나왔던 바로 그곳.
“···그냥 다른 세상으로 추방해버린 걸지도 모르겠어.”
사실 그게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건 김창을 상대로는 그리 효과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지옥으로 쫓아내든 다른 세상으로 쫓아내든 꾸역꾸역 본래 세상으로 돌아오니까.
게다가 잠재적인 위험을 쫓아내는 것보다 아예 제압해버리는 게 더 안전하다는 걸 신도 알고 있을 테니 이게 정답일 가능성은 낮았다.
하지만 만약 신이 정말 김창을 다른 세상으로 추방했다면?
“어쩌면 범차원적인 폭탄 돌리기가 시작된 걸지도······.”
모르스는 그냥 이쪽 세상의 신이 책임지고 폭탄을 해제해주길 간절히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