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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은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쪽만 남은 칼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칼이 부러진 것에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오래 당황하고 있진 않았다. 도플갱어라면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탁! 땅을 박차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역시나 도플갱어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마치 거리를 좁히는 마법을 쓴 것처럼 순식간에 다가온 도플갱어가 위협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김창은 반사적으로 칼을 들었다가 흠칫 놀랐다. 칼이 반쪽으로 잘린 탓에 제대로 방어할 수가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튕겨내고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는데 도플갱어가 바로 따라붙었다. 김창은 이번에는 칼로 공격을 막아낼 생각을 바로 버렸다.
반쪽짜리 칼을 가지곤 저 위협적인 공격을 완벽하게 튕겨낼 수가 없다. 아까라면 몰라도 지금의 도플갱어는 반복적인 전투를 통해 자신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학습했다.
저 머릿속에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지금도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연산을 반복하고 있을 것이다.
완전한 상태에서도 이기기 힘들 텐데 반쪽짜리 칼을 들고 정면에서 덤비는 건 멍청한 짓이다.
김창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칼을 보고서 허리를 잔뜩 숙여 공격을 피했다. 거의 넘어지듯 잔뜩 허리를 숙인 그가 오른손에 든 반쪽짜리 칼로 도플갱어의 허벅지를 노렸다.
그러나 그런 공격까지 전부 예측하였다는 듯 도플갱어의 다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마중이라도 나오듯 불쑥 튀어나온 무릎이 반쪽짜리 칼을 튕겨내더니 관절 부위가 빠르게 펴졌다.
단련된 근육의 힘 덕분에 폭발적으로 가속한 다리가 쭉 펴지며 발끝이 김창의 턱을 부수려 들었다.
김창은 얼른 왼손으로 턱을 보호했지만 대신 왼손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충격 때문에 뒤로 몸이 젖혀진 그가 손으로 바닥을 짚고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했다.
바닥에 착지하는 것과 동시에 도플갱어를 향해 뛰자 저쪽에서도 곧장 반응했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칼이 김창의 접근을 방해했다.
그 속으로 뛰어드는 건 거친 폭풍 속에 몸을 내던지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해야만 했다.
싸움이라는 건 원래 그런 법이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도박이 으레 그러하듯 돈을 따기 위해선 내 돈 역시 테이블 위에 올려야 한다. 아무런 대가 없이 할 수 있는 도박은 없고, 패배하더라도 아무것도 잃지 않는 도박 역시 없다.
싸움 역시 그렇다. 상대의 목숨을 취하기 위해선 자신의 목숨 역시 저울 위에 올려야 한다.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그러니 폭풍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이다. 싸움은 시작됐고 이젠 아무것도 물릴 수 없으니까.
“발버둥치는 꼴이 참 안쓰럽군. 그런다고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힘껏 달리고 있던 김창이 순간 흠칫 놀랐다. 그 무미건조한 목소리는 분명 자신의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저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럼 대체 누가? 그거야 뻔한 일이다. 도플갱어.
“죽으려고 용이라도 쓰는 거냐? 그럴 필요는 없는데. 그러지 않아도 곧 죽을 테니까.”
내 말투가 원래 저렇게 띠거웠나? 어쩐지 만나는 놈마다 나 죽이려고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
김창이 쓰게 웃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부러진 칼은 아까 공격으로 바닥에 떨어졌고 그딴 걸로는 도플갱어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젠 다른 걸 보여줘야 했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쥐었던 주먹을 폈다.
꽈르릉!
창백하게 빛나는 벼락의 칼날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칼이 없다고 해서 낙담할 이유는 없다. 없으면 만들어서 쓰면 그만 아닌가?
김창은 파지직 소리를 내며 흔들거리는 벼락의 칼날은 일정한 형태로 단단하게 고정했다. 이번 일격에 치명적인 일격을 주지 못하면 위험한 건 자신이었다.
도플갱어는 학습을 통해 성장한다. 그러니 시간을 주면 줄수록 점점 더 강해진다는 소리였다.
길게 끌 것 없는 싸움이다. 이번 한 번의 공격을 끝을 봐야지. 김창이 두 눈을 매섭게 빛내며 도플갱어를 향해 달려들었다.
“흠.”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김창은 반사적으로 도플갱어의 얼굴을 쳐다봤다.
싸우면서 거울을 본 적은 없지만 자신이 전투 때마다 대개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저런 얼굴을 할 때면 늘 하는 말이 있었는데······.
김창은 뭔가 머릿속으로 떠올리면서 동시에 벼락의 칼날을 휘둘렀다. 순간 귀가 멀 듯한 굉음이 울리고 일시적으로 공간에 균열이 갔다.
그건 그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이었고 제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이 공격에 버틸 재간은 없을 것이다.
신조차 그럴 텐데 도플갱어 따위가 버티려고. 김창은 일순 빛에 물든 세상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모든 여력을 짜내 만든 벼락의 칼날은 이제 힘을 잃고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보면 도플갱어는 분명 쓰러졌을 것이다.
하기야 당연한 일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이 공격은 나조차도 받아내기 힘든······.
“나조차도?”
김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잘 생각해보자. 정말 나는 이런 공격에 당할 놈이었나?
“야.”
벼락의 색에 물들었던 세상에 차츰 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굉음에 집어삼켜졌던 주변의 소음 역시 조금씩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김창은 입을 약간 벌리고서 정면을 보았다. 거기엔 칼잡이가 있었다.
“이게 다냐?”
칼잡이는 몹시 밉살스럽게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다냐고.”
저 말은 내가 자주 했던 것 같은데. 김창은 순간 자신이 죽였던 적들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모든 힘을 다해 날린 일격이었을 텐데 멀쩡히 살아남아 입을 놀리고 있는 모습을 보는 기분이 이런 거였나.
김창은 허허 웃었다. 자신을 상대했던 적들이 으레 그래했던 것처럼 맥 빠지는 웃음을 연신 흘렸다.
“그럼······.”
“그럼 이번엔 내가 간다고?”
도플갱어가 뭔가 말하려고 하자 그 말을 뺏은 김창이 두 눈을 사납게 빛내며 말했다.
“와봐, 씹새야. 짝퉁 새끼가 뭔 가오를 그리 잡아?”
도플갱어는 칼을 아래로 늘어트리고 가만히 있다가 입술을 비뚜름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곧 죽을 놈이 입만 살았군. 유언이 있으면 해라. 들어는 줄 테니까.”
저 웃는 모습도 자신과 참 닮았다. 하기야 당연한 일인가? 저놈은 나 자신이니까. 김창이 마주 웃으며 말했다.
“그거 들어만 줄 거잖아.”
“당연하지. 내가 소원 들어주는 요정도 아니고 네 유언을 왜 들어줘?”
씨발, 내 입으로 저 소리 들으니까 진짜 짜증스럽네. 김창이 쯧 하고 혀를 차더니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천천히 들어와라.”
“내가 왜.”
도플갱어가 뛰었다. 천천히 들어오라고 했는데 빠르게 달리는 것이 참 자신답다.
아마 그는 몇 초 내에 거리를 좁힐 것이다. 그럼 자신은 이제 뭘 할 수 있나? 칼은 이미 부러졌고 벼락의 힘은 통하지 않는다.
뭘 할 수 있지? 아니, 할 수 있는 게 있긴 한가?
도플갱어는 그 사이에 거리를 완전히 좁히고 이쪽을 향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김창은 반사적으로 왼손을 휘둘렀다.
당연히 맨손으로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의 팔뚝에서 피가 확 하고 튀었고 쓰라리다 못해 뜨거운 감각이 느껴졌다.
비척거리면서 뒤로 물러난 김창이 오른손으로 왼팔의 상처를 꾹 눌렀다가 손을 털어냈다. 바닥에 뜨거운 핏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도플갱어가 어깨 위에 칼을 올리고서 빈정거리듯 말했다.
“너에게 승산이 있다고 보나? 왜 계속 싸우려고 하는 거지? 내 보기엔 얌전히 죽는 게 더 나을 텐데.”
확실히 그 말이 옳다. 더 싸워봤자 승산 따위는 없다. 무기도 없고 벼락의 힘조차 먹히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하는 건 의미 없는 발버둥일 뿐이다. 진흙탕 속에 빠졌을 때처럼, 발버둥 친다고 해서 밖으로 나갈 가능성은 없고 오히려 더 아래로 빨려 들어갈 뿐인 그런 상황.
도플갱어의 지적은 타당하다. 하지만 옳다고 해서 다 맞는 말은 아니다.
“왜 싸우냐고?”
김창은 픽 웃었다. 그는 지금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싸우는 데 이유가 어딨어, 씹새야. 그럼 그냥 뒈지냐?”
“그건 비효율적인 일이다.”
순간적으로 도플갱어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마치 기계가 말하는 것처럼. 그걸 듣고서 김창은 강한 확신을 얻었다.
그가 입술을 한껏 당기며 이죽거렸다.
“너 말이야, 날 완전히 복사했다고 했지?”
“그래. 나는 너고, 이젠 너를 넘어선 존재다. 넌 이제 필요 없어. 내가 널 대신해서 승천자의 역할을 다할 테니 너는 이만 사라져라. 이것은 신의 뜻이다.”
“네가 나라고?”
여전히 웃는 얼굴이던 김창이 순간적으로 얼굴을 굳혔다.
“헛소리 집어치워, 개자식아. 나라면 그딴 소리 안 해. 신의 뜻? 엿이나 잡숴.”
김창이 중지를 들어 신을 향해 흔들었다. 그걸 본 도플갱어의 얼굴이 기계적으로 변했다.
원래 자신은 항상 무덤덤한 얼굴이긴 하지만 저건 그런 것과는 달랐다. 생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얼굴.
아무리 정교하게 만든 실리콘 인형이라고 해도 그걸 사람과 착각하는 경우는 잘 없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인간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까.
지금 도플갱어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김창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걸 진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건 가짜다. 명확한 가짜.
“너는 날 완벽하게 복제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네 착각이야. 왜인 줄 아나?”
도플갱어는 다시 벙어리가 된 것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김창은 저 뒤에서 신의 기계 장치가 바쁘게 돌아가는 걸 봤다.
“나는 말이야, 왜 싸우냐고, 왜 의미도 없는 발버둥을 치느냐고, 그딴 소리 안 해. 씨발, 싸우는 데 이유가 어디 있어? 죽기 싫은 데 이유가 어디 있느냐고? 너 같은 깡통 새끼가 뭘 알겠느냐마는.”
도플갱어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김창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픽 웃었다.
“적대적 대상의 위험도 재분석. 분석 중······. 위험도 하. 연산 결과 오류 없음. 경고 시스템의 오류 검사 시작. 검사 중······. 검사 결과 발견된 오류 없음.”
거대한 태아의 얼굴이 약간이지만 기우뚱하는 듯 보였다.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는데 그 이유를 알아낼 만한 능력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김창은 하하 웃더니 도플갱어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덤벼. 이제 끝을 보자.”
도플갱어는 기계적으로 칼을 들었다. 그는 김창의 당당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분석 결과 김창의 승률은 극히 낮았고 그 낮은 확률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낮아지는 중이었다.
인간은 때때로 비이성적인 판단을 할 때가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것인가? 언제나 완벽과 효율을 추구하는 기계의 입장에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 도플갱어는 김창의 사고방식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알고 있었다.
강한 놈이 곧 법이다. 그러니 내가 이긴다면 곧 내가 옳은 것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도플갱어는 아까 전 김창이 했던 벼락의 칼날을 사용하기로 했다. 칼이 벼락의 힘으로 빛나고 온 세상이 점차 희게 물들어갔다.
망설임 없이 벼락의 칼날을 들고 김창을 향해 뛰었다. 이겼다고 생각했다.
김창은 가만히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저항을 포기했다고 지레짐작했다.
그러나 김창이 천천히 몸을 움직이더니 두 손으로 칼을 쥐는 동작을 취했다. 저건 또 무슨 비이성적인 행동인가?
도플갱어는 도무지 김창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인간을 이해하려고 하면 할수록 정신이 오염되는 듯해서 얼른 저 몸을 베어버리려 했다.
“어렸을 적에 무협 소설 몇 권 본 적 있는데.”
도플갱어가 머리 위로 칼을 들었다가 내리쳤다. 김창이 뭐라고 지껄이든 무시하고 그대로 베어 죽일 생각이었다.
살을 베는 감각이 없었다. 가죽을 자르고 뼈를 잘라내는 감각이 없었다. 뭔가 딱딱한 것에 부딪친 듯한 느낌도 없었다.
그런데도 칼날은 더 움직이지 않고 허공에 고정돼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아니, 그건 보이지 않는 벽이 아니라······.
“이렇게 하는 거 맞나.”
보여선 안 될 칼이 보인다. 도플갱어가 두 눈을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