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김창은 배에 난 상처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신을 향해 다가갔다. 누가 봐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걸음은 거침없었다.
보이지 않는 칼을 손에 들고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김창이 차츰 가까워지자 신이 다시 한번 말했다.
“적대적 대상과 대화를 요청.”
“아까도 말한 것 같은데, 내가 하겠냐?”
왜 해야 하나? 지금 저 신만 죽이면 다 끝나는데 왜 굳이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느냐는 말이다.
김창이 신의 말을 무시하고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칼을 휘두를 수 있는 거리까지 오면 위험해지는 건 신일 텐데 그는 어째서인지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인가, 아니면 방심을 유도해서 숨겨진 한 수를 꺼내려는 것인가.
신이라면 김창 자신을 두 명쯤 더 복사해도 이상할 건 없다. 만약 정말 그런다면 이번에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겠지만.
“이제 끝을 보자.”
신에게 가까이 다가온 김창이 머리 위로 칼을 들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무것도 없는 손을 머리 위로 드는 듯 보였을 테지만 실은 신조차 죽일 수 있는 흉기가 손안에 들려 있었다.
이제 칼날이 아래로 떨어지면 신의 몸은 반으로 갈라진다. 태아의 얼굴을 한 존재를 죽이는 건 제법 꺼림칙한 일이지만 뭐 어떤가?
저게 진짜 사람도 아니고 그냥 그런 식으로 생긴 놈일 뿐인데. 김창의 어깨가 조금씩 아래로 움직일 때였다.
“적대적 대상의 행동에 대한 경고.”
“뭔 경고.”
사실 신의 이야기에 반응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머리가 이상해진 탓일까. 김창이 반사적으로 대답하자 신이 곧바로 말했다.
“적대적 대상의 행동이 이 세상에 지대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
김창은 그게 뭔 개소리냐고 말하려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모르스는 죽음의 신이 죽으면 죽음이라는 개념이 사라진다고 했다. 그럼 이 세상의 진짜 신이 죽으면 무엇이 사라질 것인가?
“야.”
김창이 칼을 휘둘렀다. 거친 바람이 불고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더니 신의 몸 일부가 잘려 나갔다.
그냥 한 번 휘두른 건데 종잇장 자르듯 잘 잘리는 걸 보고서 이거 정말 내가 신을 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창은 바닥에 떨어진 쇳덩어리들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혹시 너 죽으면 세상 망한다, 뭐 그런 소리 하려는 거냐?”
“긍정.”
“긍정?”
김창이 손을 들어 신을 겨누었다.
“그런데 너 왜 아까부터 말이 짧냐. 내가 네 친구야?”
“······.”
신은 연산 장치 일부가 날아간 상태에서도 열심히 연산을 거듭했다. 그가 말했다.
“프로그램 검색 중······. 대화 프로그램 인스톨.”
신이 혼자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진짜 사람처럼 크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깐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음색이었는데 이젠 제법 사람다운 목소리였다.
“반갑습니다, 김창.”
“난 안 반갑다. 할 말 있으면 빨리 해라.”
“······그럼 거두절미하고 하나만 물어봅시다.”
“죽을 놈 소원 못 들어줄 게 뭐냐. 두 개 물어도 돼.”
신은 조금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나 왜 죽이려는 겁니까? 너무 어지럽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네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
“모르니까 묻는 것 아닙니까?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하나만 말해보십시오.”
곧 죽을 놈이라고 막 나가는군. 김창이 흥 하고 비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 때였다.
‘잠깐만.’
입은 열었는데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머리가 굳어버린 탓이다.
‘생각해보니까 쟤가 잘못한 건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신을 꼭 죽여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신은 애초에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럼 왜 나는 신이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되는 것마냥 칼 들고 죽이러 찾아왔던 것인가?
‘쟤가 케이네스 죽여서?’
이유라고 한다면 그것뿐이다. 원래 그림자 신을 이쪽으로 불러내서 죽일 생각이었는데 신이 먼저 손을 써버린 바람에 화가 나서.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이유로 신을 죽이겠다는 건 그냥 미친놈이 아닌가?
지금까지 자신의 행동을 방해하는 놈들은 죄 죽여왔지만 그들은 죽여도 뒤탈이 없는 놈들이었다.
승천할 자를 죽인다고 해서 뭔가 문제가 생기진 않는다. 대악마는 물론이고 용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신은? 단지 내가 화가 난다는 이유만으로 죽이기엔 너무나 거물이다.
김창이 생각에 잠겨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으니 신의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갔다.
“잘 생각해보셨습니까? 당신이 절 죽일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대체 왜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것입니까?”
그 말이 옳다. 딱히 신을 죽여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럼 자신은 왜 죽일 필요도 없는 신을 상대로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었단 말인가?
배가 찢어져 내장이 흐를 정도로 격렬한 싸움은 대체 뭐 때문에 했는가? 결국 다 헛짓거리였나? 아무 의미도 없는?
김창이 말했다.
“너도 나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자기방어였습니다. 강도가 집에 칼 들고 찾아왔는데 가만히 있습니까?”
“강도를 집에 부른 건 너 아니었나.”
“길거리에서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려는 강도를 붙잡으려 그런 거지요.”
한 마디를 안 지네. 김창이 얼굴을 잔뜩 구기며 말했다.
“그래서 너 죽이지 말라고?”
“그래 주면 너무나 고맙겠군요.”
김창은 가만히 생각했다. 어떤 게임이 있다. 그건 NPC고 뭐고 그냥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죄 죽일 수 있는 게임이다.
그래서 마음 내키는 대로 전부 죽이고 다녔는데 그걸 본 운영자가 게임에 개입했다. 자신은 그것 때문에 화가 나서 운영자를 찾아가 죽이려 했다.
이 게임을 관리하는 건 운영자 한 명뿐이라 그가 죽으면 게임 서버가 닫힌다. 그럼 자신으 더는 이 재밌는 게임을 할 수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 외에 게임을 즐기고 있던 사람들 전부의 캐릭터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오직 자신의 감정 하나 때문에 그런 짓을 저질러도 되겠는가? 김창은 위험한 사람이지만 미치진 않았다.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잘 알겠다. 굳이 너 죽여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도 알겠고.”
“···드디어 대화가 통하는군요. 그럼 김창, 내 간곡히 부탁하겠습니다. 제발 조용히 지내주세요. 나는 당신들 이방인을 통제할 수 있는 요소라고 봤습니다. 그 생각은 거의 들어맞았습니다. 당신을 제외하면요.”
“네가 우리를 여기로 불렀나?”
“아니요. 당신 세상에도 신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있다면 그쪽이 멋대로 이쪽에 버린 거겠죠. 수조를 가꿔 보셨습니까? 자기 수조에 독을 뿌려서 물고기를 다 죽이는 사람도 있던가요?”
말 되게 기분 나쁘게 하네. 김창이 얼굴을 찡그리자 신이 바로 덧붙였다.
“비유입니다. 그냥 비유.”
“난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사람이라는 걸 기억해라.”
“압니다. 그리고 지금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지요.”
“어쨌건.”
김창은 문득 생각했다. 자신은 정말 신이 됐는데 그럼 이제부터 뭘 해야 하나? 모르스처럼 우주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이 시간이나 축내고 있어야 하나?
“하나 묻겠는데, 난 이제부터 어디로 가지?”
“어디로 가긴요. 알잖습니까.”
“천상인지 뭔지 하는 거기 말이냐? 내가 한 번 가보니까 거긴 그냥 우주던데. 사실상 감옥이고.”
신이 그 거대한 머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긍정하는 듯이.
“감옥이라는 건 어감이 너무 강하고, 격리소라고 합시다. 이 땅에 혼란을 몰고 올 수 있는 위험 요소들을 격리하는 장소.”
“격리? 승천자들이 위험 요소라는 거냐?”
“승천할 자라는 건 일종의 오류입니다.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오류. 신성이라는 건 신의 힘인데 어찌 일개 필멸자 따위가 그걸 가지겠습니까? 필멸자라는 존재는 대개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법인데, 그런 자들이 신의 힘을 휘두른다면 지상에 큰 위협이 됩니다. 그리고 나는 신으로서 그들을 통제해야 할 의무가 있고요.”
김창의 두 눈이 차가워졌다. 그는 천상의 모든 신이 한때 강력한 승천할 자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그저 감옥에 갇힌 죄수일 뿐이다. 신이라는 거창한 족쇄를 찬 죄수.
“승천자의 규율을 만든 게 너군.”
“맞습니다. 승천할 자들끼리 경쟁하게 만들어 그 숫자를 줄이고 그중 가장 강한 존재를 우주로 불러들여 세상에서 제외하는 거지요. 당신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김창이 가만히 있자 신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물론 그들에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실제로 신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모르스를 만나봤으니 알 것 아닙니까? 그는 진정으로 죽음의 신입니다.”
김창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어떤 생각에 빠져 있었고 고민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침묵은 길었지만 영원하지 않았다. 김창이 신을 향해 말했다.
“가만히 생각해봤는데, 역시 아직 셈이 안 끝난 것 같다.”
기어코 끝장을 보려고? 신이 대항 수단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김창이 이어 말했다.
“내 배에 구멍 난 값은 받아야겠어.”
“···뭘 원합니까?”
“그거야 많지. 첫 번째 요구다. 저 아래에 있는 신 친구들, 모두 자유롭게 해줘.”
갑작스러운 요구에 신이 멈칫했다가 말했다.
“승천자들을요? 안 됩니다. 그들이 없으면 일을 누가 합니까?”
“네가 알아서 해. 보니까 복제본 잘 만들더니만. 걔네 시키면 되잖아.”
애초에 지금 모르스가 맡은 죽음의 영역은 원래 신의 것이었다. 신이 해야 할 일을 모르스에게 나눠줬을 뿐이니 그 영역이 본래 주인에게 돌아가더라도 큰 문제는 없으리라.
“싫으면 내가 내려가서 걔네 싹 죽이지 뭐. 이러나 저라나 똑같은 거 아닌가?”
신이 잠깐 생각하다 체념하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요구는?”
“지상에서 전쟁 난 건 알지? 죽은 놈이나 다친 놈 있으면 고쳐놔. 그리고 황제가 무슨 병 걸렸다던데 걔도 고쳐두고.”
“다친 사람이면 몰라도 죽은 사람까지 살리는 건······.”
“왜, 세상을 어지럽힌다고? 내가 진짜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게 뭔지 보여줘?”
“······그것도 알겠습니다. 혹시 또 다른 요구도 있습니까?”
“있지.”
욕심도 많군. 신은 혹시나 그 말을 내뱉지 않도록 노력했다.
“뭡니까?”
“다른 차원으로 가는 문 열어.”
순간 신은 이 무시무시한 칼잡이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그러나 하고 생각했다. 하기야 이 정도로 떠돌아다녔으면 고향 생각이 날 법도 하지.
신이 처음으로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려는데 김창이 또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마지막 요구다. 별로 어려운 건 아니니까 잘 들어.”
뭔 놈의 요구가 이리도 많나? 신이 한숨을 내뱉으며 어서 말해보라고 했다. 김창이 잠깐 호흡을 가다듬었다가 마지막 요구를 내뱉었다.
그리 길지 않은 문장이었고 그걸 전부 뱉어내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창은 마지막 요구를 말한 뒤에 가만히 있었고 신은 기능을 정지한 것처럼 조용했다.
“······정말로 그걸 원하십니까?”
오랜 침묵 끝에 나온 말이었다. 김창은 지금까지의 침묵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