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5화 (5/649)

〈 5화 〉 1. 첫 번째 편지(5)

* * *

웅성거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두 남녀가 검을 들고 섰다. 데렉 교수는 갑작스러운 대련 요청을 호탕하게 웃으며 받아들여 주었다.

진검을 쓰지 않는다는 조건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실력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 법이었으니까.

물론 그 와중에 방해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등 뒤로 단정히 묶어 정리한 아리따운 소녀 하나가 난입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이안의 등을 손바닥으로 팍, 하는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그리고 누가 봐도 당황한 눈치로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야, 야, 야! 미, 미쳤어?! 그, 유르디나 양? 아무래도 이안 오빠가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것 같은데…….”

“셀린, 괜찮으니까 걱정 마.”

“아니, 도대체 뭐가 괜찮냐고오!”

흑발의 소녀는 울상을 지으며 그렇게 외쳤지만, 사내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조차 없었다. 세리아는 그 모습이 조금 부러웠다.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축복일 터였다. 다만 그처럼 소중한 사람의 조언을 받아들였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이안은 친우의 조언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래서 지금 그와 세리아가 단 둘이, 검극을 마주하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오만했다. 세리아는 검을 제외한 그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렇게 해서 가까스로 이룬 경지였다.

술이나 마시고 다니는 누군가와는 그 간절함의 정도가 달랐다. 당연했다. 그녀에게 검이란 곧 생존의 문제와 같았으니까.

그래서 세리아는 그녀의 승리를 의심치는 않았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한 가지.

오늘 아침에 보았던, 그 기기묘묘한 검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목검을 쥔 세리아의 손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잔잔하기만 하던 그녀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다.

정말 착각이었을까? 그때 세리아는 잠시나마 그 검로에 압도당했었다. 아무리 이안이 술이나 퍼마시고 다니는 한심한 선배처럼 보여도, 이곳은 아카데미였다.

누구나 숨기는 수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카데미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세리아의 청옥과도 같은 눈동자가 신중한 빛으로 가라앉았다. 그녀의 시선이 이안의 구석구석을 훑었다.

여유로운 자세였다. 검집에서 검조차 뽑지 않은, 편안한 자세. 그대로 하품이라도 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울컥, 하고 세리아는 다시 한 번 분노를 곱씹어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검사와 검사의 대결이 아닌가. 상호간에 보여야 할 최소한의 예절이라는 것이 있었다. 비록 그녀도 본의 아니게 무례한 말을 할 때가 있지만, 대련에서 상대를 무시하거나 하는 태도를 보인 기억은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싸늘해졌다. 손잡이를 끌어당겨, 당장이라도 튀어오를 듯 자세를 잡았다.

상대가 숨겨진 수를 가지고 있다면, 최선의 수는 하나뿐이었다.

그 숨겨둔 수를 보이기도 전에, 상대를 박살내는 것. 다행스럽게도 세리아에게는 마력으로 강화된 각력이 있었다.

시작과 동시에 폭발적인 속도로 압도한다. 마수와의 오랜 전투 경험이 그러한 해답을 내놓았다. 그녀의 근육이 팽팽히 당겨졌다.

데렉 교수는 검조차 뽑지 않은 이안을 흘깃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과가 뻔히 보인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그는 이안이 선배의 체면을 내세워 허세라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러나 그는 용기와 만용을 구분하지 못하는 학생에게 일일이 조언을 건넬 만큼 친절하지 못했다.

모든 것은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신념에 따라 곧바로 대련의 시작을 알렸다.

“그럼, 시작!”

그리고 그 묵직한 울림이 채 대련장에 울려 퍼지기도 전에,

팟, 하는 소음과 함께 공간이 압축되었다. 판화처럼 직선이 죽죽 그어진 풍경이 급류처럼 떠내려갔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 그러나 검은 소리보다 빠르다.

당겨진 근육이 화살처럼 세리아의 신체를 내쏜 순간이었다. 이미 세리아는 이안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목검의 뭉툭한 검극이 사내의 명치를 노리고 틀어박히기 직전이었다.

아무리 날이 서 있지 않더라도 급소에 일격을 허용한다면 심각한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세리아는 마지막 순간에 검로를 복부로 틀 생각이었다.

칵, 하는 불쾌한 맞물림 소리가 귓가를 스치기 전까진.

그것은 벼락같은 발검이었다. 목검의 거무튀튀한 검신이 찰나를 쪼개고 세리아의 검극을 후려쳤다.

무게중심이 흔들리며 그녀가 주춤한 사이의 일이었다.

훅, 하고 그녀의 몸이 앞으로 끌어당겨졌다.

사내가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그녀의 검신을 쥔 것이다. 망설임조차 없는 움직임.

자칫하면 손바닥이 찢겨나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묘할 정도로 적절히 힘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

내팽겨 쳐지듯 소녀의 신형이 땅을 굴렀다. 무슨 일을 당했는지, 눈앞에서 봤지만 조금도 파악할 수 없었다.

세리아는 땅을 등진 채로, 눈을 깜박이며 멀뚱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판패.

근력도, 마력도 그녀가 앞섰다. 심지어는 선수까지 그녀가 가져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녀는 땅을 구르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은 결과에, 주위로부터 웅성거리는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놀랍다는 반응, 재미있다는 반응, 그리고 그녀를 비웃는 소리까지.

모두 그녀가 방심이라도 했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리고 곧 세리아 또한 그렇게 믿어버리고 말았다.

이럴 리가 없었다. 어떻게, 이토록 간단하게?

일평생을 검도에 매진했다. 고작해야 술이나 마시고 다니는 한량에게 질 리가 없었다. 그녀는 천재였고, 더 노력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녀의 일생에 드리운 그림자를 거둬낼 수 있을 터였다. 유르디나의 가장 빛나는 태양, 북부를 수호하는 금사자의 적통이자 그녀의 이복 언니.

“더 할 테냐?”

무심한 목소리가 천둥처럼 세리아의 귓전을 때렸다. 그 말을 듣고 화들짝 정신을 차린 세리아는, 곧 이를 으득, 하고 갈면서 몸을 일으켰다.

땅을 구른 충격 탓인지 조금 비틀거리긴 했으나, 이 정도면 아직 양호했다. 그녀는 아직 검을 놓지 않았으니까.

활활 타오르는 청색의 눈동자가 다시 한 번 이안을 향했다. 그는 어느새 다시 그녀의 맞은편 자리로 걸어간 뒤였다.

“……부탁드립니다.”

입술을 짓씹으며, 내뱉은 그 열기 어린 목소리. 세리아가 진심으로 나서리란 사실은 누가 봐도 명확해 보였다.

그러나 이안은 그 말에도, 그저 상관없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을 뿐.

언제든 와 보라는 태도였다. 세리아는 더 참지 않았다.

다시 한 번의 도약, 멀어진 거리를 좁히기에는 그 정도로 충분했다. 그러나 세리아는 실패한 전략을 반복할 정도로 어리석지 못했다.

처음에는 너무 속도를 중시한 탓에 너무 직선적인 검로를 그리고 말았다. 상대는 우직한 곰이 아니라 교활한 여우였다. 그녀의 힘을 되려 이용할 줄 아는, 위험천만한 상대.

그러니 더욱 신중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녀의 도약이 사내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멎었다. 그리고 내달리며 이어지는 일격.

마지막 순간까지 검로를 숨겼다. 그것까지 미리 파악할 수는 없었던지, 아래에서 위로 올려쳐지는 일격에 사내는 내려치기로 응수했다.

적절한 시기에 이루어진 적절한 대응이었다. 사내의 상대가 세리아 유르디나만 아니었다면.

쾅, 하고 폭음과 같은 충격파가 울려 퍼졌다. 밀도 높은 마력으로 강화된 검격은 굳이 오러를 덧씌우지 않아도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내의 목검이 하늘 위로 퉁겨지며, 그의 어깨가 자연스레 열렸다. 마력량만큼은 세리아가 월등하다는 증거였다.

안타깝게도 검을 손에서 놓치게 하진 못했지만, 상대는 이제 무방비한 상태였다. 세리아는 승리를 직감했다.

그래, 당연히 이래야 했다. 평생을 검술에 바친 그녀였다. 그 간절한 노력이 그녀를 천재로 만들었다. 이제 와서 부정당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세리아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계 동작으로 다시 목검을 내리쳤을 때.

훅, 하고 그녀의 검이 허공을 갈랐고.

콱, 하고 사내의 목검이 그녀의 명치를 후려쳤다. 맹렬한 통증과 함께 세리아의 입에서 토막 난 숨결이 새어나왔다.

느닷없이 급소를 강타당한 그녀는 다시 한 번 튕겨나가듯 땅을 몇 번이고 굴렀다. 마력으로 강화된 일격이었다. 단순히 위력으로만 따지자면 그녀가 월등하다지만, 상대도 아카데미의 3학년.

군살 없는 소녀의 몸 하나쯤은 탄력 있는 공처럼 퉁겨 버릴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일격을 허용한 세리아의 입에서 끄으으, 하는 신음이 새어나왔다.

숨이, 턱 하고 막힌다.

얼마만에 겪는 고통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다. 숨은 제대로 쉬어지지 않고, 알싸한 고통이 척수의 신경 세포 하나하나를 파고들어 날을 세운다.

저릿한 통증이 전신으로 번졌다. 그녀는 무심코 목검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만큼은 견딜 수 없었다.

그 지독한 고통의 와중에도, 세리아는 더듬거리며 다시 제 목검을 쥐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다시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

방금 전의 웅성거림이 꼴좋다는 반응이었다면, 지금의 웅성거림은 당혹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의외의 결과.

그들이 당황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무언가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그들도 슬슬 눈치 채고 있었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남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살아가기로 한 세리아였다.

단지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일전의 공방을 복기하는 데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피한 거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자세도 무너졌다. 그런데 그의 신형은 마치 자연스레 그래야 한다는 듯 간발의 차로 검격을 스쳐 지나가더니, 그대로 세리아의 검이 내리쳐지는 방향을 피해 검신을 복부에 처박았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것은 무섭다. 오랜만에 겪는 그 강렬한 통증과 더불어, 세리아의 눈이 옅은 공포심을 담아 이안을 향했다.

그는 말없이 다시 세리아의 맞은편 자리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서서, 다시 세리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쩌겠냐는 눈빛. 세리아는 이를 악물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헐떡이는 숨이 가파르다. 그래도 다시 세리아는 검극을 겨누었다.

“……다시,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몇 번을 반복해도 결과가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세리아는 몇 번이고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했으나, 그 다음 순간 땅을 구르고 있는 것은 언제나 그녀 자신이었다. 차라리 땅만 구른다면 다행이었다.

검의 옆면으로 관자놀이를 강타당하고, 복부에 발길질이 꽂히고, 팔과 다리는 수십 번은 후려쳐져 감각조차 멀쩡하지 못했다.

몇 번의 공방이 지났을 때, 세리아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누적되는 충격에 볼 안쪽이 터져나가고 만 것이다.

그리고 몇 번의 공방이 더 지났을 때, 세리아는 샛노란 위액을 토했고.

마지막 공방이 끝났을 때, 세리아는 일어나지조차 못했다.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못해도 몇 곳에 골절상이 남은 듯했다. 지독한 아픔은 팔다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시야가 흐릿했고,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폐가 다쳤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웅성거림이 잦아든 건, 이미 몇 번의 공방이 반복된 뒤의 일이었다.

그들은 무자비한 폭력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반항은커녕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연약한 소녀의 신체에 가해지는 무수한 폭력.

부러지고, 찢어지고, 피가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이안은 기계적으로 목검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비명과 함께 살점과 피가 튀었다. 마지막 일격을 허용하고 쓰러진 세리아의 몸은 옅게 경련하고 있었다.

사태를 제지해야 할 데렉 교수마저 낯빛이 창백해진 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인간이 인간에게 이토록 악독한 폭력을 휘두르는 건, 전설적인 마수 사냥꾼인 그조차 드물게 보았던 광경이었기에.

태연한 것은 오직 이안뿐이었다. 그는 저벅저벅 걸어서, 이제 핏물이 섞여 제대로 콜록이지도 못하는 세리아에게 다가섰다. 그것만으로도 세리아의 본능이 절규했다.

도망치라고, 제발 피하라고. 반항조차 할 수 없는 폭력을 체현한 세리아의 몸은 그녀의 의지와 무관하게 오들오들 떨렸다.

그러는 세리아를 보고, 이안은 나지막이 말했다.

“일어나라, 세리아 유르디나.”

그 말을 듣고, 세리아는 흠칫 몸을 굳혔다.

아직도 부족하단 말인가? 최선을 다했다. 그래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아닌가.

몸이 구석구석에서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제발 그만두라고, 저 자는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이라고. 이대로 가다간 죽을 뿐이라고.

세리아의 떨리는 눈빛이 이안을 향했다. 그는, 처음부터 그랬듯 무표정했다.

“앞으로 수도 없이 겪어야 할 고통이다. 설마 이 정도로 꺾일 생각은 아니겠지?”

그녀는 감히 사내의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눈빛이 몸과 함께 애처롭게 떨렸다. 찔끔 눈물마저 나올 지경이었다.

일어서기 무섭다. 오기도 한계라는 것이 있었다. 어차피 일어나 봐야, 다시 고통을 겪을 뿐인데. 아무리 도도하고 자존심 강한 검사라도, 그 이전에 스무 살을 갓 넘긴 소녀였다.

결국 그녀 대신 나선 것은 데렉 교수였다. 멍청한 시선으로 대련이 이루어지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그는, 곧 깜짝 놀라 소리를 내질렀다.

“그만! 대련은 중지다! 세리아는 이미 중상이야. 대련은 이제 중지야!”

그리고 데렉 교수가 터벅터벅 걸어 이안과 세리아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늦은 감이 있는 개입이었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아카데미에는 아무리 중상을 입어도 일주일만에 완치시킬 수 있는 성국의 고위 사제들이 있었으니까.

하다못해 3학년에 재학 중인 성녀에게 맡기더라도 세리아의 상처는 며칠 안에 완쾌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다만, 정신적인 상처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데렉 교수가 다가오자, 그를 잠시 바라보고 있던 이안의 시선이 다시 세리아에게로 내리꽂혔다.

그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렇다는데, 어떡할래?”

그 말을 듣고 세리아는 울컥하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어떡하겠냐고? 당연히, 당연히.

당연히, 포기해야 하는데.

무서워서, 덜덜 떨리는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근육이 아우성을 내질렀다. 마력으로 가까스로 움직이는 몸뚱아리다. 뼈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몇 번이고, 몸을 가누지 못해 엎어지면서.

온몸이 멀쩡했을 때도 이기지 못한 상태였다. 지금 와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 알고 있는데도, 세리아는 목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목검을 쥔 팔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도 사내의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검은 그녀의 인생이었으니까. 이대로 꺾여서, 포기하고 만다면.

그녀의 인생에는 걷어낼 수 없는 그림자가 하나 더 드리울 터였다. 그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세리아는 숨을 몰아쉬면서, 검극을 다시 들었다. 비틀, 하고 순간적으로 그녀의 몸이 갸우뚱 기울었다.

그 의지에, 대련을 중재하고자 걸어오고 있던 데렉 교수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누구라도 그랬을 터였다.

지금 차갑게 타고 있는 세리아의 푸른 눈동자를 보았다면, 누구라도.

“다시, 흐으… 다시, 부탁드립니다.”

세리아의 그러한 결기에도 오직 사내만은 놀라거나 감탄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두어 번 고개를 주억거렸을 뿐이었다.

“……그래. 세리아 유르디나라면, 마땅히 그래야지.”

그리고 그의 검이, 다시금 자비 없이 세리아의 몸을 후려쳤다.

그녀의 몸이 하늘을 날아, 땅바닥을 굴렀다. 대련 중에 몇 번이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일격이 달랐던 점은, 딱 그녀가 버틸 수 없는 지점까지 타격을 누적시켰다는 점.

흐릿하던 정신줄이, 떨어져 나갈 듯 위태로웠다. 세리아는 좁아진 시야 사이로 숨을 몰아쉬며, 손을 더듬거렸다. 어떻게든 검을 쥐어 보려고.

그러나 검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녀에게 잠은 너무나 가까웠다.

단지, 그녀는 혼절하기 전에 사내의 목소리를 들었다.

“마수만 상대하니까, 근육이 너무 솔직하잖아.”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그녀의 의식이 암흑으로 뒤덮였다.

이것이 지난 일주일 동안 아카데미를 뒤흔든 ‘유르디나의 싸가지 반죽음 사건’의 전말이었다.

**

셀린의 말을 모두 듣고 난 뒤, 나는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세리아의 검격을 모두 피하고, 반격까지 해서 초주검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이야기의 요지였다. 그것도 싸가지 없는 말 한 마디 했다고.

심지어 위액까지 토하고 만신창이가 돼서 쓰러진 그녀에게 다시 일어나라 했다고?

“……농담이지?”

“나도 농담이었으면 좋겠어. 그때 이안 오빠는 진짜 또라이 같았거든.”

셀린의 침울한 대답에 나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고 말았다. 모두가 내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것조차 잊은, 격한 반응이었다.

“아니, 또라이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또라이 그 자체잖아! 쓰러져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애를 팬 쓰레기가 나라고?!”

“응, 그러니까 테안 같은 놈들이 엮이려 들지.”

셀린은 안타깝다는 시선으로, 팔짱을 낀 채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창자를 쏟은 채 길바닥에서 죽어가는 고양이를 보는 듯한, 연민의 눈빛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말렸다? 아무튼 이안 오빠가 저지른 죄니까, 달게 그 죗값을 받아. 지금 생각해 보니 몇 대 맞는 걸론 부족하겠는데?”

“아니, 그러니까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니까?!”

나는 답답한 마음을 담아 그렇게 스스로를 변호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란 것은 셀린도 나도 알고 있었다. 물론 세리아에게는 더더욱 먹히지 않겠지.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했다. 이대로라면 세리아에게 맞아죽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끙끙거리면서, 방금 전에 들은 내용 중 쓸 만한 것이 있는지를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마지막으로 내가 했다던 말.

“……야, 그러고 보니 뭐라고?”

“뭐가?”

두 손을 모아 내 명복을 빌고 있던 셀린은, 내 느닷없는 물음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다급했던 나는 셀린의 어깨 위에 두 손을 턱, 하고 올려 그녀를 잡아당겼다.

내 강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셀린은 깜짝 놀란 듯,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내 시선을 피했다.

“가, 갑자기 왜, 왜, 왜 이러는 건데에…….”

“마지막에 말이야. 내가 쓰러져 가던 세리아한테 뭐라고 했다며.”

“그, 그거?”

셀린은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내 강요에 가까운 물음에도 팅기지 않고 곧바로 고민에 빠졌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그 비상한 기억력 사이에서 내가 원하는 대답을 찾아냈다.

“그, 뭐였더라? ‘마수만 상대하다 보니 근육이 너무 솔직하다’라고…….”

“그래, 그거야!”

나는 감탄하면서, 그제야 셀린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얼굴을 붉힌 채 우물쭈물하고 있던 셀린은, 내가 그녀를 밀치듯 털어내자 조금 불만스러운 눈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겠고?”

“……아니, 좆됐는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셀린의 고개가 절레절레 내저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 달리 나는 진지했다.

“하지만 알아내야지, 어떻게든……,”

그러지 않으면, 내가 맞아죽을 테니까.

오늘 강의 중에 대련 신청이 이루어지리란 사실은 거의 확실했다. 박살난 자존심과 참패의 트라우마를 동시에 날려버릴 수 있는 기회였으므로.

그러니 내게는 이제 시간이 없었다. 그녀와의 싸움을 준비할 시간이.

기억에 남지도 않은 일을 책임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다.

아침까지만 해도 평소와 같은 하루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된 걸까.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세리아의 아쿠아마린을 닮은 눈동자는, 지금도 못 박힌 듯 나만을 향해 있었으니까.

* *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