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7화 (7/649)

〈 7화 〉 1. 첫 번째 편지(7)

* * *

세리아 유르디나는, 두려웠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천출이라 무시 받으며 눈칫밥을 얻어먹던 그녀에게 두려움이란 일종의 생존 기술이었다. 그녀의 생사여탈권을 쥔 존재를 향한 동경과 공포.

그처럼 비참한 삶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나약했던 과거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그녀는 검술에 매진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결과가 나타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유르디나의 성을 받던 날, 그녀를 내심 깔보던 영주성의 하인들이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래, 이것이 강자의 시선이다.

오로지 약자만이 강자의 눈치를 본다. 강자의 눈길이 닿을 때마다 몸을 굳히고, 떨고, 그리고 우물쭈물하며 상대의 의도를 알고자 애를 쓴다.

검을 쥔 이후, 그녀는 더 이상 그러한 약자의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예외가 있다면 오직 둘, 그녀의 아버지와 이복 언니뿐. 그마저도 아버지는 이제 병마로 기력도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녀는 지난 대련 이후 다시 이안 앞에 섰을 때, 낯선 감각을 느껴야 했다.

이안의 눈이 그녀를 훑을 때마다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근육이 뻣뻣하게 굳었고, 무지막지한 폭력을 기억하고 있던 심장이 멋대로 날뛰어 거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무섭다. 지난번에 느꼈던 어찌할 수 없던 무력감, 그리고 통각 세포 구석구석에 각인된 아픔, 일말의 망설임도 없던 그의 검격까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 어린 시절의 그 비참한 신세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어서, 세리아는 이를 악물고 목검을 쥐었다.

이겨낼 것이다. 극복해서, 다시 그녀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낼 것이다.

그녀의 적, 이안은 조금 떨떠름해 보이긴 했지만 순순히 그녀의 대련 신청에 응해 주었다. 하기야 지난번에 그토록 압도했던 상대였다.

일주일만에 도전한다고 해봐야 우습지도 않겠지, 그러나 세리아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시급한 문제였다.

오직 승리, 지난번에는 상대의 역량을 잘못 판단했던 것이 실책이었다. 오늘만큼은 몸 상태가 가장 온전할 때 전력을 다해 상대하리라.

그래서 세리아는 데렉 교수의 ‘시작!’이라는 말이 끝마쳐지기도 전에, 곧바로 몸을 날렸다.

직선은 아니었다. 조금 비스듬히, 그러나 검과 상대의 몸이 접점을 만들 수 있을 만큼.

긴장으로 뻣뻣이 굳은 몸이었지만, 그래도 오랜 수련은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녀의 검이 그대로 상대의 신형을 때렸다.

그리고 텅, 하고 울리는 소리.

가죽을 몽둥이로 두드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내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그러자 세리아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녀는 명백히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그녀는 이미 다음과 그 다음 수까지 치밀한 계산 속에 넣어두었다. 그러나 그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도, 첫 일격에 사내가 허공을 난다는 예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애를 써도 스치지도 못했던 상대가 아닌가.

그녀가 일격을 가하더라도 우수한 신체능력과 마력량을 바탕으로 몇 번의 공방을 교환한 뒤에야 가능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안은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혹시 이조차도 함정인가? 세리아의 짙푸른 눈동자에 의혹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러든 말든, 사내는 끄으으,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킬 뿐이었다.

“크으… 살살 하자, 살살… 응?”

비틀거리면서도 몸을 일으키는 걸 보면, 타격은 가해졌지만 치명상까지는 아닌 모양이었다. 목검으로 급소도 아닌 부위를 후려쳤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사내가 신음을 흘리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세리아는 여전히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이대로 끝날 리가 없다. 상대는 지난번 세리아에게 비참한 패배를 안긴 사내였다. 세리아는 다시 한 번 쇄도했다.

몸을 웅크리고 들어간 세리아의 품에서 검격이 폭사됐다. 좌하단에서 우상단으로 이어지는 깔끔한 대각선, 이안은 방어를 시도했으나 그 결과는 지난번과 같았다.

쾅, 하고 차라리 폭음에 가까운 소리가 울리며 사내의 자세가 무너졌다. 세리아는 입술을 짓씹었다.

빈틈을 노릴까? 유혹적인 선택지였지만 그녀는 금세 포기했다. 또 다시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보법으로 반격을 노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녀는 그대로 몸을 밀 듯이 짓쳐 들어갔다. 그리고 비어버린 이안의 품에 당도한 순간, 그녀는 칼 손잡이로 그의 명치를 찍어버렸다.

콱, 하고 들어간 깔끔한 일격. 이안은 신음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허리가 꺾이고, 그대로 날아가서 몇 번을 구른다.

사내는 숨조차 제대로 몰아쉬지 못했다. 허억, 하는 무너진 숨소리가 흘러나올 때까지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상하다. 세리아는 이때쯤 그러한 의문을 품었다.

지난번과 흘러가는 흐름은 같은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사실, 이래야 정상이긴 했다. 아무리 1년 후배라지만 그녀는 학부 수석, 상대는 고작해야 중하위권에 불과했다.

세리아가 승기를 가져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공포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사내가 다시 한 번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이안은 용케도 다시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자세를 잡았다.

마치 일전의 세리아를 보는 듯했다. 그렇기에 세리아는 더더욱 차가운 눈으로 이안을 응시했다.

알고 있었다. 패배를 시인하기 전까지는, 결코 패배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녀 또한 승리할 수 없다. 언제고 그가 다시 그녀를 약자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세리아는 완전무결한 승리를 원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초조한 기색이 섞여 들어갔다.

그녀가 내달린다. 마치 공간을 압축한 듯한 질주, 칼날이 측면으로 날아들자 이안은 검신을 들어 가까스로 막아냈다.

쿵, 하는 충격파와 함께 그의 몸이 비스듬히 흔들렸다. 세리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쿵, 쿵, 쿵, 하고 마치 도끼로 나무를 찍어내듯 세리아의 검이 사내의 검신을 미친 듯이 두들겼다. 압도적인 신체 능력과 마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안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옅은 신음을 흘리던 그의 자세가 다시 무너졌고, 세리아는 검신으로 사내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컥,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다시 바닥을 굴렀다. 어느새 은근한 기대를 품고 그녀와 그를 바라보던 관중들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그렇지, 그러한 조롱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리아는, 조금 웃겼다. 이 대련장으로 올라올 용기조차 없는 이들의 비웃음이.

그러나 관중들을 향한 그녀의 관심은 그것이 끝이었다. 오히려 말하자면 관중들이 조금 더 야유하기를 바라는 마음마저 있었다.

사내의 마음이 일찍 꺾을수록, 세리아의 승리도 더 가까워질 테니까.

그러나 사내는, 다시 한 번 일어섰다. 신음을 흘리면서, 고통이 역력한 안색임에도 불구하고.

세리아의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무리 그녀라도 일방적으로 사람을 두들기는 것이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아직도, 합니까?”

“어, 너도 지난주에 그랬다며.”

정론이었다. 선배가 후배에게 하는 대사치고는 구차했지만.

세리아는 결국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녀의 눈빛에 다시 서늘한 적의가 감돌았다. 그렇다면 바라는 대로 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안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난주에 비해 현저히 약해진 상태였다. 지금 승리를 따내지 못한다면, 앞으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그것이 세리아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짓쳐들면, 사내가 받아치고, 결국 다시 그녀에게 일격을 허용해 사내가 땅바닥을 구르는 반복.

지난주의 반복이었다. 다만 그 구도가 정반대였을 뿐이지.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쪽은 세리아였다.

점점 더 사내가 세리아와 공방을 나누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받아치지도 못하더니, 어느 순간 두어 번의 공방이 오고갔고, 이제는 몇 번의 공방이 오가야 사내가 땅바닥을 굴렀다.

다시 감을 되찾고 있는 걸까? 비논리적인 생각이었지만, 조급함에 몰린 세리아는 그 추측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였다. 세리아가 무리수를 둔 것은.

사내와 힘겨루기를 하던 세리아는, 그대로 검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사내의 몸이 앞으로 엉거주춤 기울었고, 그 순간 세리아의 눈에 사내의 급소가 들어왔다.

관자놀이. 세리아는 저도 모르게 검을 휘둘렀다.

팍, 하고 무언가 깨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강한 충격이 두개골에 가해졌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순 정신을 잃은 사내의 몸이 옅게 경련했다.

세리아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너무 강하게 후려쳤다. 마지막에 힘 조절을 했으니 죽지는 않았을 테지만, 너무 위험한 행동이었다.

이러다 상대가 영구적인 장애라도 얻는다면? 세리아는 솜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그와 더불어 대련장 바깥에서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

화들짝 놀란 세리아의 시선이 소리의 진원지를 향했다. 그곳에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하고 그녀를 노려보는 소녀 하나가.

“너, 너… 미쳤어?! 지금 누구 머리를 후려치는 거야! 그러다 이안 오빠가 큰일 나기라도 하면, 넌. 내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소녀의 일갈이 이어질수록 세리아는 더욱 당혹스러웠다. 본의가 아니었다고, 실수였다고.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데, 인간관계에 익숙하지 못한 그녀는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어서 마땅한 변명조차 내놓지 못했다.

단지 고개를 숙이고, 우물쭈물 할 뿐.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 이를 악문 흑발의 소녀는 아예 대련장으로 들어오려고 하고 있었다.

한 대 후려패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그처럼 화가 머리끝까지 난 셀린을 말린 것은, 단 한 마디였다.

“……그만.”

아직도 어지러움이 가시지 않은 듯, 비틀거리며 사내가 일어나며 뱉은 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후유증은 없는 모양이었다.

마지막에 힘 조절하길 잘했다고, 세리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끄러우니까 골 아프잖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만해.”

“아니, 미쳤어?! 데렉 교수님!”

셀린은 이제 발을 동동 구르며 애원하듯 데렉 교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데렉은 묵직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지난주 대련에서도 세리아는 관자놀이를 맞고 일어섰다. 그래도 본인의 의지가 있다면, 존중해 주고 싶구나. 하지만 너무 심한 부상을 입으면 안 되니, 앞으로는 제한을 두마. 두 판을 더 따내면 세리아의 승리다.”

산전수전을 다 겪어 실전을 중시하는 데렉이 아니었다면 상상도 못할 결정이었다. 관자놀이를 맞고 비틀거리는 사내를 그 자리에 그대로 세우다니.

그러나 세리아에게는 잘 된 일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상대에게 부상을 입히는 것이 신경 쓰이던 차였다.

그녀의 몸이 다시 뻣뻣하게 굳었다. 긴장에 더해, 상대의 관자놀이를 후려치고 그의 친구가 비난하듯 소리쳤다는 일련의 사건이 그녀를 위축시켰다.

사내의 머리에서는 어느새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땅바닥을 구를 때 어디에 박았거나, 혹은 관자놀이를 쳤을 때 어딘가가 터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리아의 마음에 더욱더 무거운 죄악감이 깃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짓씹었다.

단 두 번, 이제 두 번이면 이 짓도 끝이다. 그러면 다시 그녀는 승자가 될 수 있었다. 아카데미에 퍼진 소문도 잠잠해지겠지.

그래야 다음에 그녀의 이복 언니를 만나더라도, 부끄러움이 조금은 덜하리라.

후우, 하고 숨을 내쉬고 세리아는 다시 검극을 사내에게로 향했다. 옅은 망설임, 그러나 그것은 짧았다.

그녀가 다시 땅을 박차고, 매서운 파공성을 내며 그녀의 검격이 직선으로 쏘아졌을 때.

턱, 하고.

무언가 익숙한 저항감이 느껴져서, 세리아의 눈빛에 일순 의문이 맺혔다.

그녀의 눈동자가 검신을 향했다. 그곳에는, 올곧게 내뻗어진 그녀의 목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검신을 붙잡고 있는, 긁힌 상처가 가득한 손.

그럴 리가, 세리아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도 지난주에 그와 같은 상황이라서 알고 있었다.

이미 만신창이일 텐데, 몸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어떻게?

세리아의 보석을 닮은 눈동자가 천천히 사내의 얼굴을 향했다. 그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머리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 피투성이의 몰골을 한 사내는, 웃었다.

“……잡았다.”

이제야 감을 잡았다는 듯이.

**

세리아와의 대련에 임하면서, 내가 결심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조금 치사하고 구차하더라도 일단 이긴다.

후배와의 대련이었다. 지난주처럼 압도적으로 이길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승리는 거두어야 수치를 당하지 않을 터였다.

테안에게 큰소리를 친 것도 있고, 선후배간의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다. 사실 지난주에 대련만 하지 않았더라도 ‘그럴 줄 알았다’라는 말을 들었을 테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 물을 내가 엎지르지 않았다는 것이 못내 억울할 뿐이지.

두 번째, 어떻게든 구르면서 기회를 노린다.

신체 능력도, 마력도, 심지어는 노력조차도 세리아보다 부족한 나였다. 그 격차를 때우기 위해서는 오로지 많이 구르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지난주에 세리아도 몇 번을 굴렀다니, 그 죗값을 치르는 셈 치기로 했다.

물론, 그 죄도 내가 지은 것은 아니었지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첫 일격까지는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는데, 명치를 직격 당했을 때는 그대로 토악질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저릿한 고통이 근육을 마비시키고, 시야가 좁아지며 숨이 거칠어진다.

지난주의 세리아도 이랬을까? 그랬다면 어지간히 독한 년이었다. 맞다 보니 오기가 생겨 이를 악물고 버티는 나도 만만치는 않았지만.

왜 그럴까, 오늘따라 전신에 느껴지는 통증이 낯익다고 느꼈다. 평소의 나였다면 슬슬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포기했을지도 모르는데.

무엇보다, 땅을 몇 번 구르다 보니 세리아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나, 세리아는 긴장해 있다. 그 뻣뻣한 움직임이 눈에 익을수록 선명히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내 눈은 점차 세리아의 ‘낌새’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녀가 긴장하지 않았다면, 눈치 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지난주의 트라우마 탓인지 평소와 같이 유려한 연계 동작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또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세리아는 망설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지만, 내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킬 때마다 그녀의 눈에 초조함과 망설임이 동시에 맺히는 걸 느꼈다.

내가 마지막까지 가봐야겠다고 결정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비겁한 수였다. 상대의 트라우마와 죄의식을 이용해서, 단 한 번의 빈틈을 노리는 구차한 행동.

그러나 몇 번이 공방이 오가고, 점점 더 세리아의 움직임과 ‘낌새’가 눈에 익을수록 상황은 내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결정적인 순간은 관자놀이를 맞았을 때였다.

얻어맞는 순간 눈앞에서 새하안 불꽃이 튀었다. 과장이나 농담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시야이 암전하며 무언가가 번쩍 빛났다.

정신을 차려 보니, 셀린이 세리아에게 삿대질을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머리가 아팠다. 나는 흐릿한 시야 사이로, 세리아의 낯빛을 살폈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그래서 나는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어차피 마력으로는 상대도 할 수 없으니, 아껴두었던 마력을 돌려 몸의 컨디션을 최대한 정상으로 만들었다.

뼈가 맞물리는 구석마다 삐걱거리는 소음이 들렸다. 근육이 비명을 내지른다. 손이 덜덜 떨리며 그만두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리아가 다시 자세를 잡고 검극을 내게 향한 순간.

나는 흐, 하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보인다. 어디로 올지, 그리고 어디서 그 검이 멎을지.

초조함으로 떨리는 눈빛, 긴장으로 굳은 근육, 망설임으로 흐려진 판단력.

모든 것이, 하나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낌새’였다. 나는 비로소 데렉 교수님의 말을 이해했다.

지능이 없는 마수를 상대한다면, 하다못해 지능이 있더라도 실력이 부족한 적을 상대했더라면 모를 수밖에 없는 버릇이었다.

근육은 늘 솔직하다. 그것은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근육뿐만 아니라, 눈과 호흡, 장기를 비롯한 그 모든 것이 그랬다.

그래서 세리아가 다시 땅을 박차고, 벼락과 같이 검을 내찔렀을 때.

턱, 하고 내 손이 검신을 쥐었다.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팠다. 판단은 일렀으나 몸이 늦은 탓이었다. 그럼에도 세리아의 검을 멈추기엔 충분했다.

세리아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눈.

그래서, 나는 웃음을 돌려주었다.

“……잡았다.”

그 다음은 순식간이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 나는 힘을 주어 그녀의 손에서 검을 뺏어 던졌다.

툭, 하고 그녀의 검이 내던져지자 세리아의 눈에 낭패감이 감돌았다. 아차 싶었겠지만, 이제 그녀가 저항할 수단은 없었다.

이대로 일격을 가하면 끝이다. 누적된 타격을 만회하지는 못하더라도, 최대한 치명타를 가해야 했다. 그래야만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내 눈에 스산한 살기가 감돌았다. 나조차도 눈치 채지 못한, 알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내가 목검을 하늘 위로 치켜들었을 때.

“……흐윽!”

세리아는 그렇게 애처로운 소리를 내며, 머리를 팔로 감쌌다. 그녀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마치 지난주에 가해졌던 폭력을 기억하고 있다는 듯이.

그 순간, 나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

저항할 수 없는 후배를 상대로, 검까지 빼앗아 놓고 ‘치명타’를 가할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세리아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귀까지 틀어막은 것으로 보아 이어질 폭력이 무척이나 무서운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셀린에게 들은 내용만 치더라도 그녀가 이러한 반응을 보일 까닭은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그래서, 나는 검을 치켜들었던 팔에 힘을 풀었다.

대신 오들오들 떨고 있는 세리아의 머리에, 딱, 하고 딱밤을 먹였다. 세리아는 드디어 무자비한 폭행이 시작되리라 여겼는지 몸을 바짝 굳혔다.

“아, 아얏……?”

그러나 정작 돌아온 것은, 머리를 울리는 옅은 통증뿐이라.

세리아는 귀여운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의아하다는 듯 눈을 떴다. 그리고 알 수 없다는 시선을 내게로.

나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뭘 봐? 그럼 내가 검도 없는 후배를 무지막지하게 패기라도 할 줄 알았어?”

“……하, 하지만.”

혼란스러운 눈으로, 세리아는 무어라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

지난주에, 당신이 그러지 않았느냐.

그리고 오늘, 나도 그러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째서.

아마도 그러한 의문이었을 터다. 지당한 의문이었다. 그러나 난 그 의문에 대답해 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지난주의 나는 내가 아니었고, 나는 원래 후배를 그렇게 패는 놈이 아니라는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기에는 너무나 피곤했으니까.

단지, 나는 그녀에게 조언했다.

“너, 긴장하면 많이 티 난다. 특히 움직임이 뻣뻣해져서 어디로 올지 뻔히 보여. 그리고 시선 숨기는 연습 좀 하고.”

그리고 툭, 하고 나는 내 목검을 내던졌다. 더 싸울 생각이 없다는 의사 표명이었다.

그제야 넋을 놓고 내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던 관중들이 정신을 차렸다. 그들 중 몇몇은 감탄한 눈치였고, 몇몇은 의아하다는 눈, 그리고 몇몇은 불만스러운 눈초리였다.

상관없었다. 저들 중 몇 명이 내게 따질 용기가 있겠는가. 나는 말없이 데렉 교수님을 쳐다보았다.

데렉 교수님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련 종료다. 승부는 무승부인 셈 치지.”

결국 이기지는 못했지만, 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였다.

나는 터덜터덜 걸어 대련장을 벗어나려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세리아가 주저앉아 있었다.

“그리고, 참.”

나는 세리아의 멍청한 시선을 마주하면서, 슬쩍 미소 지었다.

“앞으로는 싸가지 좀 챙기고. 오며가며 인사하고 지내자?”

크, 이게 바로 선배의 위엄이지.

나는 선배로서의 면을 세웠음에 만족하며,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셀린이 달려와서 내 등을 마구 두들기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일주일간의 기억을 잃은 것치고는, 최고의 시작이었다. 무엇보다 유르디나의 싸가지와 얽힌 은원을 푼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이제 다시는 유력 가문의 자제와는 얽히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신전의 집중치유실에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세리아가 나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그것도 몰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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