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1. 첫 번째 편지(8)
* * *
아카데미에서 보내는 하루는 한결같았다.
주말을 제외하면, 시간표에 따라 일정이 강제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낙제가 곧 퇴학을 의미하는 아카데미에서 강의 성적을 신경 쓰지 않는 학생은 없었다.
나만 하더라도 지난주 세리아와의 대련으로 부상을 입었지만, 그날 하루를 제외하면 모든 강의에 출석했을 정도였다. 아무리 병결 처리가 된다고 해도 강의를 빼먹으면 성적에 악영향이 갈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대개의 아카데미 재학생들은 그날 하루의 일정이 강의에 맞춰져 있는 편이었다.
예를 들어 특정 강의를 함께 듣는 수강생이 있다면, 강의를 끝마치고 함께 식사를 하러 간다든지. 혹은 다음 강의까지 시간이 비면 근처의 수련장에서 자체적인 훈련을 진행하기도 했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벌써 세리아와 대련을 한 지 일주일, 내 일상은 서서히 평온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내 일상은 단순했다. 강의를 듣고, 셀린이나 레토와 함께 어울려 다니다가, 저녁 무렵에 하루를 마무리하는 훈련을 시작한다.
쳇바퀴 돌 듯 뻔한 일정이었지만 나는 그 무난함이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지난주에 겪었던 사건들은 내 일상에 너무나 큰 균열을 만들었다.
일주일 동안의 기억을 잃은 사이, 내가 저지른 미친 짓들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을 정도였다. 들어 보니 그 ‘유르디나의 싸가지 반죽음 사건’이 워낙 유명해져서 묻혔을 뿐이지, 그 외에도 여러 이상행동을 보였던 모양이었다.
느닷없이 성녀를 찾아가 아무 말도 없이 쳐다보고 있질 않나, 셀린에게는 검 말고 다른 무기를 사용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나.
성녀님께는 나중에 따로 사죄의 뜻을 전해야 할 듯했다. 그 온화한 성녀님께서 당황했는지 무슨 일 있냐고 몇 번을 물었을 정도라니까.
그리고 나는 그 질문에 대답조차 하지 않고 휙 돌아서 가버렸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어째서 기억을 잃었을 때의 나는 그토록 무례하고 싸가지 없었던 걸까?
이래서야 지난주 세리아에게 건넨 ‘싸가지 좀 챙기라’라는 조언이 머쓱해질 지경이었다. 그러한 소문들을 접할 때마다 내 입에서는 한숨이 떠나가지 않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언제쯤 성녀님께 찾아가야 할까 고민하며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곧 누군가 내 옆구리를 쿡, 하고 찌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셀린이었다. 그녀는 그 황갈빛 눈동자에 반가움을 가득 담아 배시시 웃었다.
“안녕, 이안 오빠!”
“……그래, 안녕.”
한숨 섞인 내 목소리에, 셀린은 입을 가리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보자마자 내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는 듯.
벌써 10년이 넘은 우정이었다. 여덟 살 무렵부터 교류했으니, 그녀로서는 내 얼굴만 보더라도 내 속이 훤히 보일 터였다.
“기억을 잃었을 때 생각하는구나?”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그녀에게 속내를 들킨 것이 처음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놀란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는 꽤 불행한 역사였지만, 셀린에게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도리어 우쭐해서 어깨를 쭉 펴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말랑거리는 촉감이 청각적으로 구현됐다. 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왜, 나는 멋졌는데? 우리가 그동안 좀 무시 받았어? 고위 귀족, 그 새끼들이 꺼드럭거리면서 ‘떨거지’라고 부르질 않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 그리고 아카데미 내에서는 신분에 의한 차별이 금지되어 있으니까.”
“그거야 낡은 학칙 속의 활자일 뿐이고.”
내 원론적인 답변에 셀린은 단호한 어조로 내 말을 끊어버렸다. 나는 주위를 살폈다. 괜히 이런 말이 남들 귀에 들어가 봐야 좋을 것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주변 사람들은 딱히 셀린에게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가끔 지나가면서 나를 두고 수군거리는 소리는 남아있었지만 말이다.
지난주 세리아와의 승부에서 무승부를 이루면서, 오히려 내 유명세가 더 강해진 탓이었다.
처음은 우연이지만, 두 번은 필연이다. 게다가 첫 번째 소문보다 두 번째 소문의 신빙성이 더 높기도 했다.
아무리 1년 선배라지만 중하위권의 검사가 학년 수석을 압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재능의 격차란 그처럼 말랑하고 상냥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 비하자면, 학년 수석의 빈틈을 노려 의표를 찔렀다는 이야기는 얼마나 모범적이고 아름다운 풍문인가.
약자도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강자를 쓰러트릴 수 있다. 하위권에게는 희망을, 상위권에게는 경계심을 심어주는 교훈 섞인 미담인 것이다.
더불어 그 과정에서 그동안 나를 하위 귀족이라 무시하던 몇몇 학생들의 인식에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셀린이 말하고자 하는 건, 아마도 그러한 쪽의 이야기겠지.
“그동안 부모 좀 잘 뒀다고 티내던 애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아? 나한테 찝쩍대면서 하는 말이 ‘흠, 너 정도면 첩으로 괜찮겠군’, 으으으…….”
“그 자식 이름 좀 대봐. 한 대 갈기러 가게.”
셀린이 질색이라는 듯 몸을 떨자, 내 입에서 절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말투부터 내용까지 속을 느글거리게 하는 재주가 있는 놈이었다. 한 대 후려갈기고 싶다는 욕구가 앞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고위 귀족에게 찾아가 후려갈길 만큼 내가 멍청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아니다, 유르디나의 싸가지도 팼으니 이제 가능한가?
내가 진지한 고민에 빠지자 셀린은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조금 더 우쭐한 눈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흐응, 그래도 누가 나한테 찝쩍댄다니 화가 나긴 하나 봐?”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초리였다. ‘그래, 너도 남자긴 하구나’하는 그 눈빛.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녀가 원하는 답을 곧이곧대로 해줄 내가 아니었다.
“아니? 그러다 황제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민 가문 하나가 엉망이 될까 봐… 아아악!”
내 빈정거림을 향한 셀린의 응징은 즉각적이었다. 그녀의 발이 내 발등을 짓밟았고, 나는 즉시 비명을 내지르며 한 쪽 발을 든 채 콩콩 뛸 수밖에 없었다.
셀린은 차게 식은 눈으로 나를 흘겨보더니, 이내 팔짱을 낀 채 흥, 하는 콧소리를 냈다. 무어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아무리 10년 이상을 알고 지냈더라도 소녀의 마음이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내가 억울하다는 눈으로 셀린을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곧 본론으로 돌아가야 할 시점이라 느꼈는지 이야기를 정리했다.
“아무튼 간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안 오빠의 활약 덕에 고위 귀족들도 더는 내게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거야. 그러다 이안 오빠가 미쳐서 초주검으로 만들어버릴지도 모르니깐.”
“아무리 그래도 그런 미친 짓은 두 번 안 해…….”
얼얼하게 올라오는 통증을 느끼며, 나는 그렇게 한숨 섞인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소문이 퍼지는 데에 내 의지가 필요하지 않다. 지난 일주일간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었기 때문에 내 목소리에는 일종의 체념과도 같은 감정까지 담겨 있었다.
어차피 내가 이렇게 말해봐야, 세상 사람들이 기억하는 나는 제국 북부의 유력 가문 자제를 두들겨 팬 또라이일 테니까.
그 점이 못내 자랑스러웠는지, 셀린은 슬쩍 눈웃음을 지으며 내 팔에 바짝 달라붙어 왔다.
뭉클한 감촉이 느껴졌다. 셀린도 어른은 어른이구나, 문득 내 머릿속에 그러한 생각이 스치는 순간이었다.
“아예 이안 오빠의 여자라고 소문내고 다닐까? 그럼, 진짜로 아무도 못 건드릴 것 같은데.”
“그러다 네 혼삿길까지 막으려고?”
“그럼 이안 오빠가 책임지면 되잖아?”
나는 셀린의 넉살 좋은 말에, 잠시 셀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황갈빛 눈동자는 장난기로 반짝거렸고, 그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농담도, 참.
나는 쯧, 하고 혀를 차며 그녀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셀린은 귀여운 비명과 함께 제 이마를 가리며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아얏!”
“기왕 예쁘게 태어났으면 인생을 즐겨라, 응? 그 외모면 잘 나가는 귀족 가문 중에서도 처로 받겠다는 곳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
내 말에 셀린의 인상이 팍, 하고 구겨졌다. 이내 그녀는 빽 소리를 내질렀다.
“내, 내가 무슨 조건만 보고 시집가는 사람인 줄 알아!”
“젊을 때는 다 그렇게 말하지, 하지만 결혼은 현실이야.”
내가 혀를 쯧쯧 차며 말하자, 셀린의 눈빛에 불퉁한 감정이 어렸다. 하지만 내 말은 상당 부분 진실이었다.
귀족은 태어난 순간부터 가문의 운명을 짊어진다. 굳이 가문을 이어받지 않더라도, 가문의 위세와 영달을 위해 제 인생을 희생해야 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셀린도 로맨스 소설 속 주인공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겠지만, 혼처를 결정할 나이가 되면 가문의 미래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 앞날이 창창한 여인의 혼삿길을 내가 막을 수는 없었다. 그 씁쓸한 현실에 내 입가에도 고소가 맺혔다.
셀린은 아직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투덜대고 있었지만.
“흥, 귀족 가문이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귀족 가문이기만 하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그러나 나는 굳이 셀린에게 싫은 현실을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더 말해 봐야 눈치 없는 짓이기도 했고.
대신 셀린을 적당히 달랠 말을 고민하고 있을 무렵, 맞은편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제는 밤을 샜는지 정리되지 않은 갈색 곱슬머리와 피로를 숨기지 못하는 녹색 눈동자, 너무나 익숙한 모습의 그는 나와 셀린과 함께 ‘제국 하위 귀족 3인방’을 이루는 한 축이었다.
레토 아인스턴, 그가 비척비척 걸어오고 있었다.
“레토!”
나는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었지만, 셀린은 레토의 얼굴을 보더니 더더욱 못마땅한 표정이 되어 헛구역질을 하는 시늉까지 냈다.
사촌이라 사이는 좋은데, 워낙 친남매처럼 자라다 보니 셀린은 레토에게 특히나 쌀쌀맞았다.
물론 레토도 만만찮긴 했다. 그는 내 인사를 반갑게 받아주다가, 셀린을 보자마자 인상을 팍 구겨버렸다.
“이야, 이게 누구야. 요즘 아카데미를 달구고 있는 중하위권의 영웅 아니야! 그리고… 못 생긴 년이 하나.”
“누가 누구 보고 못 생겼대? 삶은 감자처럼 생긴 게.”
“아니 이 멍청한 계집애가 진짜…….”
셀린의 반격에 그러지 않아도 피곤했던 레토는 울컥한 듯 보였지만, 셀린은 베에, 하고 혀를 내밀고는 내 등 뒤로 쏙 숨어들 뿐이었다.
레토는 셀린의 머리채라도 잡을까 싶었는지 한 걸음을 내딛었다가, 이내 그럴 기력조차 없는지 축 늘어지고 말았다.
마법학부 학생들의 특징이었다. 과제나 연구가 길어지면 이처럼 기력이 급속도로 쇠하곤 했다. 심지어 음주가무를 즐기는 레토라면야.
나는 그를 조금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보다가, 그의 말에 걸리는 점이 있어 물었다.
“그 ‘중하위권의 영웅’이라는 말은 뭐야?”
“뭐긴 뭐겠어? 너를 부르는 말이지. 워낙 어중간한 취급을 받고 있던 애들이었는데, 네 덕에 ‘혹시 이 녀석도?’라는 인식이 생겼나 봐.”
내 입에서 피식, 하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무슨 헛소리인지.
“나도 내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구만…….”
“그래도 기억을 잃은 이후에 감이 날카로워졌잖아? 마력량도 늘고, 혈도도 뚫려… 쓰읍… 연구해 보고 싶단 말이지.”
레토는 여전히 내 상태에 흥미가 있는 듯했으나, 워낙 내가 질색하는 기미를 보이니 곧 입맛을 다시며 관심을 거두었다.
그 대신 그는, 마침 잘 됐다는 듯 슬쩍 미소를 지었다. 언제 봐도 멋진 미소였다. 그것이 주로 무언가를 캐묻거나 부탁할 때 나온다는 점이 안타깝긴 했지만.
레토는 흥미가 철철 넘치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호기심의 힘으로 기력을 조금 되찾은 듯했다.
“그러고 보니, 그게 사실이냐?”
“……뭐가?”
내 순수한 의문이 담긴 반문에, 레토는 뭘 모른 척 하냐는 듯 내게 다가와 어깨를 툭, 하고 한 대 쳤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 유르디나의 싸가지가 네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닌다던데.”
“……뭐?”
대답은 내 등 뒤에서 흘러나왔다. 나를 방패막이로 숨어있던 셀린의 자그마한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녀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황갈빛 눈동자가 싸늘한 빛을 품었다.
“그 썅년이? 왜?”
그리고 두 남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면서, 뒤쪽을 눈짓했다.
교정 곳곳에는 미관을 위해 가로수가 심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로수 중 유독 덩치가 큰 나무가 하나, 그리고 그 뒤에는 회색 머리카락이 얼핏 비쳤다.
세리아 유르디나, 요즘 내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레토는 흥미롭다는 듯 옅은 웃음을 터트렸고, 셀린의 눈동자에서는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지가 뭐라고 이안 오빠를 졸졸 따라다녀? 얼마 전에 죽어라 패던 건 기억도 나지 않나 보지? 싸가지도 없는 게…….”
“무언가 이유가 있지 않겠어? 예를 들어 이안에게 반했다든지.”
셀린은 레토의 은근한 부추김에 울컥했는지 그대로 세리아에게 따지러 갈 기미마저 보이고 있었다. 내 손이 그녀의 팔을 붙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만, 나한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거슬리니까 그렇지! 아직도 지난주의 일만 생각하면 이가 갈리는데……!”
세리아를 향한 셀린의 적대감은 지난주 대련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는 듯했다. 물론 그 전에는 내가 세리아를 무자비하게 폭행했다지만, 인간의 뇌는 편리한 해석을 좋아한다.
그녀의 뇌리 속에서 내가 세리아를 반쯤 죽을 정도로 팼다는 사실은 이미 지워져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다만 내가 세리아에게 당한 폭력의 순간들만이 남아있겠지.
이대로 가다간 셀린과 세리아의 충돌은 필연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아무리 서녀라도 세리아는 유르디나의 성을 받은 고위 귀족, 그 충돌의 결말이 누구의 패배로 끝날 것인지는 너무나 명확해 보였다.
지난번에는 유르디나를 건드렸다고 모른 척 한다더니, 참 줏대 없는 여인이었다. 또 그 점이 고맙기도 했지만.
나는 으르렁거리는 셀린을 흘깃 바라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가로수 뒤에 얼핏 비치는 회색 머리카락에게 향했다.
그러고 보면,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 둔 문제였다. 벌써 일주일째니까, 아무래도 대화를 나눠보는 편이 좋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셀린의 팔을 붙들고 있던 손을 풀고, 그 손을 곧바로 셀린의 어깨 위에 얹었다.
“기다려 봐, 내가 한 번 이야기해 볼 테니까.”
“……이안 오빠가?”
셀린은 무언가 불만족스러운 얼굴이었으나, 당사자인 내가 나선다니 할 말이 없었는지 일단 분기탱천해 있던 분위기를 누그러트렸다.
레토는 더더욱 재미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는 듯 흥미진진한 눈빛이었다. 그가 조언했다.
“혹시 몰라? 너한테 반해서 졸졸 따라다니는지도. 고백이라면 일단 받아들여. 예쁘고, 가문 좋고, 능력 좋고. 이만한 혼처가 어디… 아아악! 셀린, 너 진짜!”
물론, 그 조언은 끝맺어지기도 전에 응분의 응징을 당해야 했지만.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심호흡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솔직히 말해서 나로서는 세리아 유르디나가 나를 따라다니는 까닭이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반했다고? 목검으로 그렇게 패고 나서, 지난주에는 내가 무서워 덜덜 떨기까지 하던 여자였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상상은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게 된다. 개중에는 몇 가지 불길한 추측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복수라든지.
나로서는 긴장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세리아도 다가오는 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움찔, 하고 머리카락이 흔들렸지만 자리를 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다가오는 나를 확인하기까지 했다. 내가 가로수 앞에 서자, 세리아는 우물쭈물하며 가로수 뒤에서 걸어 나왔다.
“세리아,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거야?”
세리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부드러운 우윳빛 피부에 홍조가 떠올랐다.
아직도 내가 무서운가. 그렇게 내가 씁쓸한 기억을 곱씹고 있을 무렵, 용기를 냈는지 세리아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의지가 가득 담긴 눈으로, 더듬거리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 그, 그러니까…….”
어렵사리 말을 이어가던 그녀는, 그대로 눈을 질끈 감고 허리를 굽혔다. 정중한 부탁의 태도였다.
“지, 지도 편할… 으으… 지도, 편달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또 한 번 혀를 씹긴 했지만, 이 정도면 합격이었다.
고위 귀족이라고 으스대는 태도도 없고, 지난번에 비해 꼿꼿한 면도 한 풀 꺾였고, 후배로서 선배에게 배움을 청하는 자세도 훌륭했다.
단 일주일만에 ‘유르디나의 싸가지’에서 ‘후배’ 정도로 격상한 그녀의 태도를 보며, 나는 속으로 흐뭇함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싫어.”
“그, 그럼 잘 부탁… 네?”
내 대답이 예상 외였는지, 미리 준비해 둔 듯한 감사의 말을 읊고 있던 세리아의 표정이 일순 멍해졌다.
그녀의 넋 잃은 시선이 나를 향했고, 나는 그러한 그녀를 향해 싱긋 웃으며 다시 못을 박았다.
“싫다고.”
세리아는 그대로 동상처럼 굳어 버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