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1. 첫 번째 편지(9)
* * *
그날, 세리아는 시무룩해져서 돌아갔다.
그녀로서는 예상치 못한 사태였던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후배가 자존심까지 굽혀가며 선배에게 가르침을 청하는데, 매정하게 내치다니.
그러나 나로서는 무척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내가 미쳤나? 객관적으로 볼 때 세리아는 나보다 뛰어난 검사였고, 내가 그녀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의미한 일에 시간을 쏟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었다. 내가 도움만 될 수 있다면 아카데미 후배에 대한 의리로 몇 번은 시간을 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 일부러 그녀에게 가르칠 점을 일일이 찾아 지도할 만큼 그녀와 내 사이가 각별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그녀와 며칠이고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녀 스스로는 발견하지 못한 문제점을 내가 짚어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친하지도 않은 후배를 위해 그렇게까지 시간을 희생할 만큼 내가 한가한 사람은 아니었다. 사실 한가한 사람은 맞았지만, 그 시간에 레토나 셀린 같은 절친한 친구들과 함께하는 편이 더 즐거우리란 건 명약관화했다.
그러나 너무 단칼에 거절한 탓일까, 세리아를 떠나보내는 내 마음도 마냥 편하지는 못했다.
낙담한 듯 어깨를 툭 떨어트린 채 걸어가는 세리아의 모습은, 평소의 도도하고 꼿꼿한 이미지와 대비되어 더더욱 처량한 느낌을 주었다.
오죽하면 레토와 셀린이 나를 힐난할 정도였다.
“야,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단칼에 거절하냐? 좀 더 우회적으로 말했어야지.”
“그, 그래. 이안 오빠. 내가 봐도 이건 조금 심했는데?”
레토는 그렇다 치지만, 금방이라도 세리아와 드잡이질을 할 듯 굴었던 셀린이 그러니 어이가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조금 너무했다 싶긴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휘휘 저어 잡념을 털어냈다.
“됐어, 이미 끝난 일인데 뭐. 그보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당사자인 내가 그렇게 나오니 레토와 셀린 또한 더 나를 나무라지 못했다. 오히려 셀린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편이 더 낫다 싶었던지, 곧 생글거리는 미소를 되찾았다.
오로지 레토만이 핼쑥해진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가 무기력한 목소리로 한탄했다.
“아니, 그럴 시간도 없어… 바빠 죽겠거든.”
“그렇게나 과제가 많아?”
“마법학부가 다 그렇지, 뭐. 교수님들 다 죽여 버리고 싶다…….”
한창 바쁠 시기의 마법학부 학생답게 무시무시한 소리를 중얼거리던 레토는, 곧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이따 연금학부 강의동도 찾아가야 하는데 어떡하냐. 이제 어디 움직일 기력도 없다.”
그러면서 레토가 흘깃흘깃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속이 빤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아~ 누가 대신 가주지 않으려나… 그러고 보니 이안, 너 교양 강의 하나 연금학부 강의동 근처에서 듣던가?”
셀린이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무어라 한 마디를 꺼내려 했으나, 내가 기꺼이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면서 무산되었다. 내게 말할 타이밍을 빼앗긴 셀린이 부루퉁해졌다.
“그래, 그래. 내가 대신 가줄 테니 너는 좀 돌아가서 쉬어라… 눈이 아주 퀭해.”
내 연민이 담긴 수락에 레토는 희희낙락하며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전해 주었다. 그리고 대략적인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거, 내 연구에 필요한 재료들인데 연금학부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야 해서 말이야. 교수님께서 학생 몇 명한테 말을 전해 두셨다니, 오늘 저녁 전에 연금학부 강의동에 가면 찾을 수 있을 거야. 엠마한테 가봐.”
“엠마?”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연금학부 3학년, 나와 절친한 사이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즐겁게 잡담을 나눌 수 있는 사이였다.
그러나 내가 그 이름을 듣고 잠시 고개를 갸웃한 것은, 그 이름을 최근 어디선가 들어본 듯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엠마를 찾아갈 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다. 차차 생각해 보면 되리라.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걱정 마. 내가 전해둘게.”
그렇게 그날 오후, 나는 연금학부 강의동에 들어서게 되었다.
1층의 로비에는 기기묘묘한 실험도구들이 즐비했다. 아무래도 전시품인 모양인데, 검술학부인 나로서는 용도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레토가 넘긴 쪽지를 보니, ‘506’이라는 숫자가 맨 위에 적혀 있었다. 연금학부 강의동의 506호를 찾아가면 된다는 뜻이겠지.
층계를 오르고 올라 5층, 나는 ‘506’이라는 팻말이 달려 있는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곧 ‘들어오세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낯익은 목소리였다. 나는 제대로 찾아왔음을 확신하고, 벌컥 문을 열어제꼈다.
그러자 그곳에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유순한 인상의 여성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방문할 줄은 미처 몰랐다는 듯이.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엠마! 오랜만이야.”
“……이안? 네가 어쩐 일이야?”
엠마의 놀라움과 반가움이 반씩 섞인 목소리에, 나는 연구실 중앙에 마련된 응접용 테이블의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심부름, 레토가 너한테 전해 달라는 쪽지가 있었거든. 무슨 연구에 필요하다던데?”
“아, 아아! 아드리아나 교수님의 강의 말이구나… 응, 알겠어. 다음에 레토를 보면 사흘 후에 찾아오라고 해줘.”
엠마는 그러면서 내가 건네는 쪽지를 얌전히 받아들었다.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천천히 활자를 훑었다. 무슨 재료를 준비해야 할지 확인하는 듯했다.
그 사이에 나는 엠마의 실험실을 둘러보았다. 학교 측에서 빌려준 것이겠지만, 연금술사의 실험실이란 늘 호기심을 자극하는 면이 있었다.
플라스크 손에 담긴 눈동자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은빛 가루, 그리고 발톱이나 심장 같은 마수의 부산물들까지.
저 물건들이 어떤 물약으로 재탄생할지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엠마에게 듣기로는, 복잡한 수식과 이론을 바탕으로 빈틈없이 조제해야만 하기에 실제로는 꽤 어려운 작업이라고 들었지만.
상상은 자유였으니까, 나는 연금술사의 실험실을 가벼운 마음으로 구경했다. 그리고 엠마가 쪽지의 내용을 모두 읽었을 때쯤, 그녀에게 안부를 물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어때? 지난 학기에 보고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으응, 나야 늘 그저 그렇지. 요즘에는 숲을 좀 오고가고 있어. 의외로 재료들이 많더라고.”
‘숲’이라,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 떠오를 듯한, 그러한 감각.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숲이라면, 남쪽에 있는 그?”
“응, 수렵제가 열리는 그곳 맞아.”
“거긴 위험하지 않아? 맹수들도 나올 텐데.”
내 의문이 담긴 목소리에 엠마는 풋, 하고 웃고 말았다. 그녀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얘는, 숲의 맹수들은 어지간하면 외곽으로 나오지 않아. 안으로 들어갈수록 먹이가 풍부하거든. 다들 맹수를 걱정하느라 숲에는 아예 들어가지도 않으니, 나야 재료가 많아서 좋지.”
“……확실한 거야?”
여전히 미심쩍다는 기색이 가시지 않은 내 물음에, 엠마는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 약초꾼 출신인 거 몰라? 숲이라면 내가 제일 잘 알지. 이안, 너도 아닌 척 하더니 결국 귀족 도련님이었구나?”
나는 엠마의 말에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나도 시골 귀족가의 차남에 불과했지만, 엠마 같은 평민 출신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평민들은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순간 절반 이상이 장학금을 수혜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 재학생 중 평민의 비율은 1/3 남짓에 불과했다.
귀족들은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종일 수련이나 공부에 매진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평민들은 달랐다.
부유한 일부 상인의 자제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평민들은 먹고 자는 시간을 아껴 가며 공부하고 수련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 가까스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들이었다.
아무리 내가 혹독한 훈련을 거치며 자랐다고 하더라도, 평민 출신 학생들 앞에서는 한 수 접어주는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나는 조금 머쓱해져서 아무런 변명이나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아니, 평민이라고 다 숲을 잘 아나… 약초꾼 출신이라서 아는 거지. 내가 귀족 출신이라서 숲을 모르는 건 아니야.”
부끄러움이 묻어나는 내 목소리에, 엠마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녀의 심성을 닮은 맑은 웃음소리였다.
“응, 알고 있어. 하도 이안이 귀족 같지 않아서 그냥 해본 말이야. 그러지 않으면, 이안이 귀족이라는 것도 잊어버릴 것 같거든.”
“잊어버리면 되지, 뭐. 어차피 아카데미에서는 의미도 없는데.”
엠마의 자조 섞인 말에, 나는 별 것 아니라는 듯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토록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쯤은 나 또한 알고 있었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세리아를 초주검으로 만들었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지 않았던가.
이는 고작해야 중하위권에 걸치는 수준에 불과한 내가 학년 수석을 쓰러트린 탓도 있지만, 제국의 하위 귀족이 고위 귀족의 자제를 박살내버린 탓도 있었다.
아카데미 내에서 신분에 따른 차별이 없다곤 하지만, 바깥세상마저 그렇지는 못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평민은 다시 평민, 귀족은 다시 귀족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약초꾼의 딸임에도 아카데미에 입학할 만큼 총명한 엠마였으니, 그녀 또한 내 말이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한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곧 따스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진심을 담은 감사와 함께.
“……응, 고마워.”
상냥한 여인이었다. 조금만 더 자신감을 가진다면 좋을 텐데, 그러나 그처럼 깊숙한 문제까지 참견할 사이까지는 아니라 나는 말을 아꼈다.
다만 엠마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편지, 7년 뒤의 미래로부터 날아왔다던 그 편지가 어째서인지 머릿속을 스쳤다.
“……그, 엠마. 혹시 말이야.”
“응? 왜 그래?”
엠마는 더 할 말이 남아 있었냐는 듯, 조금 의외라는 눈치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기야 슬슬 떠나야 할 무렵이긴 했다.
그러나 문득 떠오른 의문을 질문할 사람이 엠마밖에 없어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7년 뒤의 미래로부터 편지가 날아오는 게 가능할까?”
엠마는 내 질문이 뜬금없다고 느껴졌는지, 말없이 나를 쳐다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하기야,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7년 뒤의 미래로부터 편지가 날아오다니.
기억을 잃은 일주일 동안 누군가의 장난으로 전해진 편지였겠지.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내가 괜한 질문을 했네. 그럼 나는 이만…….”
“불가능하지는 않아.”
그러나 잠시 고민에 잠겨 있던 엠마가 내놓은 대답이 워낙 의외라서, 나는 몸을 일으키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내 의아한 시선이 엠마를 향했다. 엠마는 흐음, 하고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곧 그녀가 실험실 구석을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버튼 하나를 누르자, 허공에 반구형의 지도가 펼쳐졌다.
천문도해(?文??), 점성술을 기초로 하는 모든 마법과 연단술이 사용하는 지도였다.
“하늘에 존재하는 별 하나하나가 신화와 역사를 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어, 들어본 적은 있는데…….”
엠마는 내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을 휘저었다. 훅,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 중앙에 박힌 일곱 개의 별들이 확대되었다.
“해와 달을 제외하면, 그중에서 가장 강한 힘을 담고 있는 별이 이 일곱 개야. 인류 최초의 배신자인 델피렘과, 그가 지은 일곱 개의 죄를 상징하는 별이지.”
델피렘, 나는 그 이름을 듣고 우뚝 굳었다.
그날 밤 꾸었던 꿈에서, 사내가 내게 말했다.
‘델피렘이 오고 있다’라고,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화 속의 이야기가 아닌가.
“너도 알고 있지? 최초의 인류에게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걸. 그러나 델피렘이 악신에게 일곱 개의 제물을 바쳐 죄악이 생겨났고, 그로부터 죽음이 탄생했지.”
“……그래서?”
나도 모르게 딱딱하게 굳어버린 목소리였다. 그러나 고민에 빠진 엠마는 그러한 내 기색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턱을 쥔 채로 가설을 늘어놓았다.
“천리를 뒤틀어 버릴 정도의 힘을 가진 별이야… 그 힘이 있다면, 시간을 역행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아. 누가 뭐래도 천신의 계획 속에 존재하지 않던 개념을 탄생시킨 사건이었으니까.”
그때까지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어있던 나는, 그대로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그날 밤의, 너무나 생생했던 꿈. 그리고 장난으로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정성을 들인 편지까지.
나는 문득 그 편지의 내용 중 하나를 떠올렸다. 그래, 그 편지에는 엠마의 이름도 나왔었다.
마수에게 습격을 당해 혼수상태에 빠진다고. 나는 깜짝 놀라 벌컥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내가 엠마에게 무어라 경고를 남기려던 그 순간.
“물론,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말이야. 아하하…….”
엠마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곧바로 얼이 빠져 멍하니 엠마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엠마는 그러한 내 반응이 의외였는지, 쿡쿡거리며 웃었다. 마치 지금까지 던진 모든 말이 농담이었다는 듯.
“놀랐어?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정도의 이야기일 뿐이야. 여태껏 저 별들의 힘을 다루려는 시도는 많았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거든.”
“……그, 그래?”
엠마의 확신이 담긴 어조에 설득당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7년 뒤의 미래에서 온 편지라니.
아무래도 최근 이상한 일을 많이 겪다 보니 내 머리가 이상해진 모양이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 털어버리자. 내가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엠마의 말이 내 결정에 힘을 실어 주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헛소문일 거야.”
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한 일에 심력을 소모해 버리고 말았다. 내 몸이 비로소 의자에서 일으켜졌다.
그리고 작별 인사와 함께 길을 떠나려던 나는, 문득 걸리는 점이 있어 엠마에게 물었다.
“엠마, 그러고 보니 숲은 언제쯤 가는 거야?”
“음, 오늘 저녁쯤에 한 번 가볼 생각인데… 왜?”
편지에 나온 내용을 말해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망설였으나, 나는 곧 쓴웃음을 지으며 한 마디만을 남겼다.
“그냥, 조심하라고.”
“얘는, 또… 걱정하지 말래도. 참, 내 정신 좀 봐! 그러고 보니 이걸 말 못할 뻔했네. 나한테는 비장의 물건이 있거든.”
짜잔, 하는 귀여운 의성어와 함께 엠마가 자그마한 물약통을 꺼냈다. 회색 빛깔이 감도는 물약이었다.
"기척을 지우는 물약이야. 얼마 전에 만드는 데 성공했거든. 이걸 양산하기 시작하면 사냥꾼이나 약초꾼들이 죽는 일을 꽤 방지할 수 있을 거야."
그러면서 엠마는 시험해 보라면서 물약 한 병을 굳이 내 손에 쥐어주었다. 연구 성과를 자랑하는 연금술사답게 자부심 어린 얼굴이었다.
아버지가 약초꾼이었니까, 아마 그녀의 오랜 꿈이 담긴 물약일 터였다.
내게 주는 대신 오늘 숲에 갈 때 쓰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어차피 오늘 채집할 재료들의 냄새가 워낙 강렬해서 의미가 없다나.
그렇게 엠마는 늘 그렇듯 상냥한 미소와 함께 나를 배웅해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엠마가 숲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다.
정체불명의 마수에게 습격당해, 배에서 창자를 쏟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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