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2화 (12/649)

〈 12화 〉 1. 첫 번째 편지(12)

* * *

한낮의 아카데미는 평온했다.

가로수 사이로 새들이 지저귀고,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건물들이 햇빛을 새하얗게 반사했다. 이제는 익숙한 정경이었다.

아카데미의 역사는 무려 1,000년에 가깝다. 제국이 건국되기도 이전의 일이었다.

당대의 대륙은 혼란스러웠다. 세계를 통일한 대제국이 무너져 내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자 수많은 국가들이 난립했다. 세상은 곧 하나의 거대한 전쟁터가 되었다.

그리고 전쟁이 이어질수록 고통 받는 것은, 언제나 그랬듯 민초들이었다.

전쟁에 들어가는 무시무시한 물자, 그리고 적군에 의한 약탈, 전선에 병력이 집중되다 보니 필연적으로 놓칠 수밖에 없는 마수들의 번식.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전쟁은 풍요로운 대륙을 신음하는 시체로 만들었다. 각국의 지도자들이 위기의식을 느낀 것은 그때쯤이었다.

국토가 아무리 넓어지더라도 그곳을 채울 백성들이 없으면 무의미할 뿐이었다. 너무 오랜 시간 이어진 전쟁은 대륙의 인구를 급감시켰다.

게다가 인류에게는 공통의 적이 존재했다. ‘마수’라고 불리는, 잔학성과 강인함을 두루 갖춘 괴물들이.

몇 년에 걸친 영수회담 끝에 전쟁은 끝이 났고, 그 평화협정의 증거로 중립지대에 세워진 곳이 바로 이 아카데미였다.

분란의 시대를 끝내고 화합과 공존의 시대로 나아간다는 의미가 있다나.

그후 500년쯤 중립지대를 유지하고 있던 아카데미가 ‘제립 아카데미’가 된 것은 제국의 정복황제 시절의 일이었다.

대륙의 절반을 말발굽으로 짓밟은 그조차도 아카데미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군대를 부지 내에 들이지는 않았다고 전해진다. 다만, 그날 이후 아카데미 앞에는 ‘제립’이라는 수식어가 하나 붙게 되었다.

오늘날에 이르러 아카데미는 제국이 세상의 중심임을 천명하는 상징이 되었다. 각국의 인재들은 여전히 아카데미 입학을 선망하며, 아카데미 곳곳에 걸린 제국의 휘장을 마주해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제국은 천문학적인 아카데미의 운영비를 감당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높으신 분들의 판단이니, 나 같은 시골 자작의 차남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나는 감탄스러웠다. 그토록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아카데미의 교정이, 이토록 잘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만큼이나 제국이 아카데미 운영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재학생으로서는 감사할 만한 일이었다.

이처럼 평온한 심정으로 아카데미의 교정을 구경하고 있는 나와 달리, 레토는 믿기지 않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그와 함께 찻집에서 산 음료가 당장이라도 떨어져 내릴 듯했다. 내가 조금 우려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레토는 곧 고개를 맹렬히 저어 정신을 되찾았다.

그리고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잘못 들었나 싶은 얼굴이었다.

“……뭐라고?”

“여자는 어떻게 꼬시는 거냐고 물었는데.”

레토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진심으로 당황한 눈치였다. 그는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 이안 맞냐? 또 이상한 저주라도 받은 거 아니야?”

“아니,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야?”

나는 레토의 격한 반응에 당황해서 그렇게 되묻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레토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동안 관심도 없던 놈이 갑자기 그러니까 그러지! 그 목석같던 놈이 말이야…….”

그러면서 레토는 음료를 고쳐 쥐고 빨대로 내용물을 쪽쪽 빨았다. 목이 타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조금 뜬금없기는 했다.

어제만 하더라도 헛소리를 하며 숙소에 뛰어 들어가길래 걱정하고 있었더니, 다시 만나자마자 평생에 하지 않던 질문을 던진 것이다.

내가 레토라도 당황했을 터였다.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도, 응? 남자인데 당연히 여자한테 관심 많지. 그런데 이 나이 먹고도 여자를 잘 모르다 보니, 미리 알아둬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러나 레토는 내 구구절절한 해명에도 미심쩍은 기색을 지우지 않았다. 그는 흐음, 하고 잠시 나를 훑어보다가, 결국 아무래도 좋다는 듯 몸을 벤치 등받이에 기댔다.

그가 무심한 가정을 던졌다.

“혹시, 뭐 그런 거냐? 사실 엠마를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빈자리를 다른 여자로 채우고 싶다는…….”

“절대 아니니까 헛소리 하지 마라. 엠마한테 실례야.”

그렇겠지, 내 단호한 부정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레토는 피식 웃고 말았다. 슬슬 그도 꽤 흥미가 도는 모양이었다. 그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이채가 감도는 걸 보면.

“그럼 목표는 누군데?”

“……목표?”

느닷없는 말에 내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그러나 레토는 무척 당연한 진리를 설파한다는 듯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 임마. 목표! 여자도 여자 나름이지, 모두의 취향이 똑같을 리가 없잖아? 평민이냐, 귀족이냐. 연상이냐, 연하냐… 성격이나 인간관계까지 포함해서 접근법을 골라야 돼. 그러지 않으면 성공확률이 너무 낮아.”

그래서 상대는 잘 아는 사람일수록 좋은 거고, 레토는 그렇게 덧붙였지만 내 머릿속은 이미 복잡해진 지 오래였다.

목표가 있긴 있는데, 누군지를 모른다.

‘세피아’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꽃에서 딴 예명 같은데, 내 주변에 ‘세피아’라고 불릴 만한 여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 확신할 수 있는 건, 그녀가 수렵제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사실뿐.

그러나 이는 레토가 요구하는 종류의 정보가 아니었다. 나는 빨대를 쪽쪽 빨면서 곤란함에 눈살을 찌푸렸다.

내 반응을 보고 레토는 다시 한 번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누가 목표인지도 아직 결정 못했어?! 아무튼 여자이기만 하면 다 된다, 이거야?”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소리까지 지를 일인가, 나는 내심 서운함을 느꼈지만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레토로서는 꽤 진지하게 내 상담에 응해주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마법사란 족속들이 본래 그렇다. 고집도 강하고, 진지해지기 시작하면 한없이 깐깐해진다.

나중에 어느 한적한 영지의 자문 마법사로 취직해서 일평생을 놀고먹겠다는 레토였지만, 그 또한 한 사람의 마법사인 이상 그러한 기질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필 그 문제가 여자 문제라는 점은 역시 레토답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지만.

레토는 그러한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찰 뿐이었다.

“쯧쯧, 이래서야 여자 하나 제대로 꼬시기야 하겠어? 이안, 잘 들어. 자고로 남자가 여자를 꼬시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해.”

“세 가지나?”

“솔직히 셋 중 하나만 있어도 되긴 하는데, 다다익선이라고 다 가지고 있으면 좋지.”

그러면서 레토는 검지를 펼쳤다. 이제부터 하나하나 설명해 주겠다는 듯이.

“첫 번째, 얼굴. 너 정도면 잘 생긴 편이니까 이건 괜찮아.”

그런가, 그런 것치곤 지금껏 호감을 표해 온 여성은 없었던 것 같은데.

내 머릿속에 일순 그러한 의문이 스쳤으나, 곧 접어두기로 했다. 어차피 이 분야의 전문가는 내가 아니라 레토였으니까.

그가 괜찮다면 괜찮을 터였다. 잘 생긴 편이라는 평가가 은근히 기분 좋기도 했고.

“두 번째, 능력. 으음, 솔직히 아카데미 재학생인 것만으로도 능력은 충분하지만…….”

검지에 이어 중지를 펼치려던 그는, 말끝을 흐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나도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 재학생쯤 되면 어딜 가도 그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카데미 바깥에서의 이야기.

아카데미 안에서 아카데미 재학생이라는 신분이 특별한 취급을 받을 리는 만무했다. 널리고 널린 게 아카데미 재학생이 아닌가.

애매했다. 두 번째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서는 아카데미 내에서도 특출난 실력을 갖춰야 할 터였다. 레토는 일단 그 문제까진 거론하지 않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그의 약지가 마저 펼쳐졌다. 마지막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의지. 사실 앞의 두 가지보다는 이게 제일 결정적이지. 아무리 잘 생기고 능력 좋으면 뭐해? 꼬시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꼬실 텐데… 그런데 지금 너한테는 이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단 말이야!”

내 입에서 끄응, 하는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말해봐야 상대도 모르고, 일종의 의무감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다. 내게서 의지가 느껴질 리가 만무했다.

단지 더 이상의 피해자를 만들지 않겠다는, 막연한 책임감만이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을 뿐.

결국 레토는 반쯤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음료를 빨았다. 그의 입에서 어쩔 수 없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가장 기초적인 것만 알려줄게.”

“오, 그것만 알면 충분한 거야?”

나는 반색하며 물었지만, 레토의 어처구니없다는 시선만이 되돌아올 뿐이었다. 시무룩해진 내 입이 다시 다물어졌다.

“아니, 미쳤냐? 당연히 그것만으론 부족하지. 하지만 뭐, 그 이상은 사람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딱 두 가지만 기억해. 칭찬이랑, 스킨십.”

“칭찬이랑 스킨십?”

‘칭찬’이랑 ‘스킨십’, 무슨 의미인지는 조금 더 들어봐야 알겠지만 나는 우선 그 두 가지를 마음에 새기기로 했다.

레토는 그러한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걸쳤다.

“그래, 일단 여자를 보면 은근슬쩍 칭찬을 해줘. ‘오늘따라 예쁘네?’ 같은 뻔한 말도 괜찮아. 어차피 넌 반반하게 생겼으니까.”

“……못 생겼으면?”

“못 생긴 주제에 추파를 던지면 그건 범죄야. 그쪽은 그쪽 나름대로 방법이 있겠지만, 우리야 신경 쓸 거 없지.”

레토는 무심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다시 빨대를 물었다.

잘 생긴 녀석이 저렇게 말하니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었지만, 나 또한 잘 생긴 편이라니 한 번은 참아주기로 했다.

오랜만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부모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우러나왔다. 그러고 보면 내 여동생도 생김새만큼은 예쁘고 사랑스러웠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레토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스킨십은 거리감을 재는 게 중요해. 적당히 친해졌다 싶으면, 은근슬쩍 몸의 접점을 늘려. 몸이 가까워질수록 마음도 가까워진다, 이건 진리야.”

“그 거리감은 어떻게 재는데?”

“그건 말이지…….”

그렇게 레토의 일장연설이 이어지기 직전의 일이었다.

저 멀리에서 누군가 우리 둘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토와 내 시선이 동시에 그 진원지를 향했다.

활달한 인상의 소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등에 걸친 갈색의 망토까지.

셀린이었다. 레토는 마침 잘 됐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잘 됐네, 한 번 실험해 봐.”

무엇을, 이라고 질문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셀린이 도도도 달려와 내 앞에 착지하듯 내려섰다. 그녀의 아담한 몸이 소리조차 내지 않고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 당혹스러운 표정을 본 모양이었다.

“……? 왜 그래, 이안 오빠?”

“으, 응? 아무것도 아니야. 단지…….”

내 눈이 슬쩍 레토를 향했다. 그는 눈빛에 강렬한 의지를 담아 내게 말하고 있었다.

‘얼른 해.’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어쩔 수 없이 셀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선 ‘칭찬’하라고 했지.

셀린은 멀뚱멀뚱 나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러한 그녀에게 기습적인 칭찬을 건넸다.

“오늘따라 예쁘다 싶어서.”

“……으, 응?!”

셀린은 내 말을 듣자마자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을 움찔, 떨며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어찌나 놀랐는지 가슴 앞에 두 손으로 깍지를 끼었을 정도였다.

효과가 있는 건가? 아직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조금 더 셀린을 칭찬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좋은 향도 나는 것 같고… 혹시 향수 바꿨어?”

“으, 응… 에헤헤… 향수는 아니고, 요즘 여자애들 사이에 유행하는 세안용품이 있어서 바꿔 봤거든. 그, 그렇게 티나?”

셀린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배배 꼬았다. 그리고 은근슬쩍 옆머리를 뒤로 넘기며 향긋한 목덜미를 드러냈다.

얼굴에 살짝 홍조가 올라온 것으로 보아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나는 슬슬 ‘스킨십’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킨십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잠시 고민하던 내 시야에 그녀의 드러난 목덜미가 포착됐다.

나는 셀린에게 다가가, 손등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걷어냈다.

“히, 히얏?!”

살갗을 스치는 감촉에 셀린은 바짝 몸을 굳히며 이상한 소리를 냈지만, 어차피 내친김이었다.

나는 슬쩍 그녀의 목덜미 근처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잠시 향을 맡았다.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한 순간.

그러나 그 여파는 상상 이상이었던지, 셀린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녀의 입에서 고장 난 듯 아, 아, 하는 소리만이 흘러나왔다. 달싹이는 입술은 아무런 언어로 성립시키지 못했다.

“……음, 그렇네. 향이 좋아.”

그리고 내가 그렇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감상을 말하자,

“으, 아, 으, 으, 아, 으으으으!”

셀린은 그러한 말과 함께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곧 견딜 수 없다는 듯 몸을 되돌려 내달리기 시작했다.

“나, 나, 나는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

말도 안 되는 핑계만을 남기고,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레토를 바라보았다.

레토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고 있었던지, 끅끅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아예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그의 폐부에서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귓가를 쟁쟁히 울렸다.

“큭큭큭… 푸하하하하하! 봤냐, 이안? 그 시건방진 셀린이 얼굴이 새빨개져서 도망치는 거? 너무 노골적이긴 했지만, 잘했다. 잘했어. 큭큭큭…….”

“효과가 있긴 한 거야?”

내가 여전히 확신이 담기지 못한 목소리로 묻자, 레토는 두고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있지! 큭큭… 두고 봐라, 지금 쟤 돌아가서 그 세안용품인가 뭔가 잔뜩 주문하고 있을걸? 한동안 저것만 쓴다는 데 내기도 할 수 있어! 나중에 한 번 봐라?”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레토가 하도 자신만만하기에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과연 레토의 말이 맞는지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다음날, 셀린은 레토의 말처럼 더욱 짙은 향을 풍기며 나타났고.

세리아가 다시 한 번 내게 찾아왔다.

“소, 소정히… 으으… 소정의 대가입니다!”

금화가 잔뜩 든 주머니를 들고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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