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1. 첫 번째 편지(13)
* * *
내 황망한 시선이 세리아를 향했다.
도도하고 강한 인상의 소녀는, 지금 고개를 숙인 채 금화가 가득 든 주머니를 내게 내밀고 있었다.
누가 보면 질 나쁜 선배가 심약한 후배를 갈취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는 광경이었다. 세리아의 몸은 불쌍할 정도로 오들오들 떨리고 있었으니까.
그만큼 긴장했다는 뜻이었다. 아직 나에 대한 공포가 가시지 않았을 수도 있고.
주머니의 크기를 보아, 안에 든 금화는 최소 200개 이상.
제국 금화 하나는 평민 4인 가정의 한 달 생활비 정도의 가치를 가진다. 그 이상 가치가 폭등하거나 폭락하면 제국이 나서서 물가를 조정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저 주머니 안에는 엠마와 그 약초꾼 아버지 둘이서 33년 이상을 살아갈 수 있는 금액이 들어가 있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귀족이라도 나 같은 하급 귀족은 수십 골드의 지출조차 부담스러워 한다. 그런데 200 골드 이상의 금액을 ‘소정의 대가’라고 부를 정도면, 서녀라고 해도 과연 유르디나 가문의 여식이라고 할 만했다.
문제는, 도대체 내가 무얼 했다고 이 정도의 거금을 건네냐는 것이다.
그러나 눈을 질끈 감고 덜덜 떨고 있는 여인에게 어이없다는 반응을 그대로 돌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조금 순화한 어조로 말했다.
“그, 세리아? ‘대가’라니 무슨 소리야?”
“……아, 앗!”
세리아는 그제야 그 부분이 생략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라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와 내 눈이 마주쳤다. 아쿠아마린처럼 영롱한 눈동자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슬쩍 바닥을 긁었다.
예전에는 상대를 무시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의 반응을 보니 마냥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을 대할 때 너무 긴장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또 그녀가 혀를 씹을까 싶어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천히 말해도 돼, 어차피 나 어디 갈 곳도 없으니.”
사실 갈 곳이야 많지만, 세리아가 조금이라도 진정하길 바라서 한 말이었다.
내 위로가 효과가 있었던지 세리아의 떨림이 약간 잦아들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곧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지난번에 지도를 요청드렸을 때… 대가도 없이 부탁을 드리는 게 무례한 일이 아닌가 싶어서…….”
그 말에 나는 헛웃음을 삼켜야 했다.
선후배 사이에 그 정도 부탁도 하지 못할 건 뭐란 말인가? 물론 시간을 쓰는 만큼 식사 정도는 대접할 수 있겠지만, 금화 200개는 과했다.
아무래도 세리아는 인간관계 전반에 대한 상식이 부족한 듯했다. 내 손가락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어떤 대답을 들려주어야 할지 난감했다.
금화를 받는다면 두고두고 쓸 거금이 생기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딱히 내키지 않았다.
일단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먹고 살 길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았다. 내가 돈에 연연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아직 하지도 않은 일의 대가를 받는 것이 꺼림칙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200골드만큼의 가치가 없다면?
귀족이라면 지켜야 하는 법칙이 있었다. ‘받은 만큼 돌려주기’, 그것이 호의든 적의든 귀족들은 늘 받은 만큼을 돌려주었다.
그것이 귀족의 자존심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자존심을 굽힐 만큼 돈이 급한 상황도 아니었고, 세파에 찌들지도 못했다. 내가 금화 주머니를 사양하는 결말은 필연적이었다.
“……세리아. 내가 지난번에 단호하게 말했더니 오해한 모양인데, 딱히 지난번의 일이 무례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하물며 내가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고 해도 이 정도의 대가는 받을 수 없어.”
세리아는 내 한숨 섞인 목소리에, 무어라 반박하고 싶었던지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 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 없어, 세리아.”
못을 박듯 강한 의지를 담아 던진 한 마디, 세리아는 결국 다시 시무룩해져서 팔을 내렸다.
그러나 이쯤 되니 세리아가 왜 이토록 간절한지 궁금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이러고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었다.
조심스레 세리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녀가 또 다시 긴장하지 않도록,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런데 세리아, 도대체 왜 그렇게 내 지도를 받고 싶어 하는 거야?”
“……?”
세리아의 의문이 담긴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 눈빛을 보자 나는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도 그렇잖아? 사실 아카데미에는 나 말고도 대단한 실력자가 많잖아. 4학년은커녕 3학년만 뒤적여도 나보다 실력 있는 검사는 수두룩할걸? 심지어 데렉 교수님이나 검술학부의 여러 교수님들까지 있는데, 왜 굳이 나한테?”
세리아는 잠시 시선을 내리깐 채 침묵했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가 다시 혀를 씹지 않도록, 팔짱을 낀 채 기다려 주었다. 어차피 다음 강의까지 남은 시간은 많았다.
숙소에 돌아가서 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 이상으로 세리아의 사정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야, 그 ‘유르디나의 싸가지’가 아닌가?
그녀가 이토록 집착하는 문제라면,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을 터였다. 그래서 나는 물끄러미 세리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지난번에,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뭘?”
나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수밖에 없었다. 도무지 짚이는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난번에 무슨 말을 했지?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스물스물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세리아가 던진 말은, 역시나였다.
“혼자서 휘두르는 건, 한계가 있다고…….”
아니, 나는 그런 말 한 적이 없는데.
그러나 그 발화주체가 누구일지는 금세 눈치 챌 수 있었다. 일주일 동안 사라진 나의 기억, 그때 움직였던 ‘이안 페르쿠스’.
그 싸가지 없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그랬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든 말든, 세리아는 우물쭈물하면서도 용케도 말을 이어갔다.
“지, 지금껏 그런 말을 들어본 건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안 선배에게 진 다음에 오래 생각해봤어요. 내가 왜 나보다 노력도 하지 않는 한량에게 져야 했을까……?”
또 싸가지 없는 말이 섞여 들어가고 있었다. 노력도 하지 않는 한량이라니, 이래봬도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아온 몸인데.
그러나 그녀의 기준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생각과 생각을 말로 옮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지만 말이다.
내 시선이 조금 불퉁해졌다. 그러나 세리아는 내 그러한 기색조차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만약 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안 선배겠죠. 그리고 지난번 대련에서도 제게 조언을 해주시기도 했고…….”
“아, 그 말.”
‘낌새’가 눈에 띈다던 조언이었다. 정작 그날 이후 얻어간 것은 내 쪽이 더 많았다.
상대의 움직임을 간파할 수 있는 눈을 얻었으니까.
아직까지는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지만, 상대가 긴장하거나 망설이면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다음 공격이 어디로 올지.
그것만으로도 내 실력이 한 단계는 진보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대련이 인상 깊었던 것은 비단 나뿐이 아니었던 듯했다.
세리아도 그날 이후 여러 가지 고민에 빠졌을 터였다. 어째서 패배한 것인지, 그리고 내가 고치라고 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그녀는 재능 있는 검사였다. 금세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 채고, 문제도 고칠 수 있을 테지. 그래서 그렇게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조언할 깜냥은 된다고, 웃기는 일이었다.
그날의 일은 우연에 행운이 맞물린 결과였다.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던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어.”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그렇게 말했다. 방금 전 세리아가 던진 무례한 말은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세리아였으니까, 그 유르디나의 싸가지가 하루아침에 달라질 리는 없었다.
그리고 아직 추측에 불과하지만, 아무래도 세리아에게는 악의가 없어 보이기도 했고.
지금 세리아가 기대감으로 눈을 빛내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상식적으로 한숨과 함께 말을 시작하면 부정적인 뉘앙스라고 여기지 않나?
눈치가 없다. 혹은 인간관계에 서툴다.
유르디나쯤 되는 고위 귀족 가문의 자제가 그럴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러한 가능성이 가장 유력했다.
“하지만 세리아,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그날도 어쩌다 던진 말이 맞아들었던 거고… 너는 재능 있는 검사야. 그렇게 조급하게 굴지 않아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잖아?”
처음에는 기대로 들떴던 세리아였으나, 내 말이 이어질수록 다시 그녀의 어깨가 왜소해지기 시작했다. 시무룩해진 기색이었다.
괜히 마음이 아파진 나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말을 맺었다. 위로가 담긴 말이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여유를 가지고 살아. 너는 이미 뛰어난 검사고, 나중에는 더 뛰어난 검사가 되어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나는 등을 돌렸다. 이만하면 알아들었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떠나는 내 발걸음을 붙잡은 것은, 세리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 한 마디였다.
“……수렵제.”
우뚝, 하고 발걸음이 멎는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었다. 아니, 그야 들어보기야 많이 들어봤다. 아카데미 내에서 열리는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였으니까.
활의 달에 열리는, 숲에서 누가 강한 마수를 사냥하는지 겨루는 대회.
4명이 한 조를 이루어 참가하는 수렵제는 별다른 일정이 없으면 황제까지 참가하는 중요한 축제였다.
그러나 내가 멈춰 선 까닭은 그래서가 아니었다.
단지 그 낱말을, 최근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났기 때문에.
내 생각이 품속에 넣은 편지의 내용에 닿았다.
‘세피아’와, ‘수렵제’.
“올해가 아니면, 더는 기회가 없어요…….”
떨리는 목소리였다. 눈을 질끈 감은 채, 고해성사를 하는 죄인처럼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내 사고가 순식간에 엉켜 들어갔다. 세리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해 보였다.
올해의 수렵제에, 세피아가 참가하려고 한다는 것. 그리고 그녀에게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
고민하고, 번민하고, 망설인다.
그러나 결론이 내려질 때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나는 입술을 짓씹고는, 다시 몸을 돌려 세리아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에, 두 손을 얹고.
“……세리아.”
“네, 네헷?!”
그녀는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귀여운 소리를 냈다.
치켜들어진 그녀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거리는 가깝다. 서로의 숨결이 섞일지도 모르는, 지근거리.
달콤한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그녀의 짙푸른 눈동자가 멍하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고민하고, 망설인 끝에, 가까스로 내 입이 열렸다.
“너, 오늘따라 예뻐 보인다.”
“……?”
물론, 세리아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지만.
단 둘만의 합동 훈련이 시작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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