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1. 첫 번째 편지(15)
* * *
셀린은 최근 들어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세리아와 함께 훈련을 시작했다는 소식은 들은 뒤부터 그랬다.
오늘은 셀린과 함께 검술 실습을 들으러 가는 날이었다. 특별히 검술 훈련장이 아니라 아카데미 남쪽에 위치한 숲으로 집합하라는 지시였다.
검술 훈련장과는 달리 숲은 꽤 거리가 있었기에, 셀린과 나는 중간부터 합류해서 함께 걷고 있었다. 그녀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안 오빠, 병신이야?”
“……또 왜.”
그녀의 왼손이 턱, 하고 허리춤에 얹어졌다. 그리고 오른손은 살랑거리며 내 신경을 긁었다.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도 그렇잖아? 그렇게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쳐맞고 나서, 도와달란다고 그 년을 도와줘? 아니, 병신이 아니라 호구인가?”
“그렇게 따지면 나도 세리아를 두들겨 팼잖아.”
“그건 그거고!”
셀린은 화가 난 고양이처럼 몸을 꼿꼿이 세우며 으르렁거렸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세리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선배가 후배를 교육적 목적으로 패는 거랑, 어? 후배가 선배를 패는 게 같아?”
“대련에 선후배가 무슨 상관이야. 선배가 후배를 상대할 땐 날이 무뎌지기라도 하든?”
내가 세리아를 편들수록 셀린의 불만은 높아져만 갔다. 그녀는 씩씩거리면서 나를 설득하려 들었지만, 내 생각이 달라질 일은 없었다.
며칠간 지켜본 세리아는 다소의 오해가 있었을 뿐, 인격적인 결점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쯤은 여리다는 인상까지 받았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었는데, 아무래도 며칠을 함께하다 보니 약간 신경 쓰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대로 두다간 사회 부적응자를 사회로 배출할지도 모른다는, 그러한 위기감.
최소한 인간관계에 대한 상식 정도는 갖춰야 하지 않을까. 선배로서 그 정도의 감상을 품는 건 당연했다.
아무래도 한동안은 붙어 다니며 그녀를 돌봐주어야 할 듯 싶었다. 그녀와 수렵제, ‘세피아’의 관계도 신경 쓰이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오늘 강의도 그 미래에서 온 편지와 관련이 있었다.
숲에서 하는 검술 실습, 누가 보아도 마수의 습격이 있었다던 그 강의가 아닌가.
편지에는 적절한 대처로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면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막아야만 했다. 일단 그러한 생각으로 나오긴 했는데.
문제는, 그 마수의 정체를 짐작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마수도 그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생물이 무엇이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마수는 정제되지 못한 마력의 밀도가 지나치게 높아졌을 때, 근처의 생물을 오염시키면서 탄생한다. 그 생물의 특성에 따라 마수의 특징도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마수는 주로 동물일 때가 많았지만, 때로는 식물도 마수가 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마력 밀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을 때에 한해 인간도 마수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마수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뿐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외부 생명체에 적대적이라는 점.
그 외에는 모든 부분이 달랐다. 생태, 습성, 약점과 같은 대다수의 특징들이 그랬다. 그래서 나로서는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는 아직도 이 편지가 미래에서 온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7년 뒤의 미래에서 온 편지가 아닌가.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그 편지가 진짜일지, 혹은 누군가의 장난일지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후자를 택할 터였다. 나 또한 아직 확신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다만, 그 편지가 진짜라면 오늘 강의 중에 사건이 발생할 터.
나는 미리 마음을 가라앉히며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한없이 진지한 나와는 달리 셀린은 아직도 옆에서 떽떽거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안 오빠, 내 말 듣고 있어?”
“……으, 응? 어, 그래. 듣고 있지.”
“다 티나거든?”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셀린과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마저 깜빡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셀린이 더욱 화를 낼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나는 레토에게 배운 기술을 써먹어 보기로 했다.
삿대질을 하며 내게 다가온 소녀의 향기, 지난번에 칭찬해 주었던 그 향기였다.
“셀린.”
“누구? 혹시 이안 오빠한테 개무시 당하던 하스터 가문의 셀린이? 웬일이야, 이안 오빠가 관심도 다 가져주고? 조금 눈물 날 것 같…….”
“오늘도 향이 좋네.”
조롱하듯 말을 배배 꼬던 셀린은, 내 한 마디에 그대로 멈칫했다. 그러기를 잠시.
슬쩍 얼굴을 붉히며 내 시선을 피했다. 그녀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팔짱을 꼈다.
“그, 그래?”
“지난번에 쓰던 그 세안용품이지? 어울리네.”
그러자 셀린은 조금 우쭐하면서도 머쓱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크흠, 흠, 흠, 하고 부자연스러운 소리를 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무, 뭐… 딱히 이안 오빠가 좋다고 해서 계속 쓰는 건 아니지만? 어, 어울린다니 다행이네?”
그녀의 목소리 톤이 묘하게 높아져 있었지만, 셀린은 그조차도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기분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었다. 나는 그녀의 기분이 풀렸음을 직감하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레토에게 빚을 진 기분이었다. 삐진 셀린을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이 생기다니.
한동안 잘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저 멀리서 숲이 보이고 있었다.
마수가 살고 있어 출입이 드문 빽빽한 삼림은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엠마가 정체불명의 마수에게 습격을 당한 장소. 사람들은 아직 이를 우연한 사고로 치부하고 있었지만, 글쎄.
과연 그 안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는, 들어가 봐야 알 수 있을 터였다.
**
숲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나오는 넓은 공터에는 이미 수강생 대부분이 자리하고 있었다. 셀린과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조금 늦어진 모양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지각까지는 아니었던지, 나와 셀린이 출석한 것을 확인한 데렉 교수님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언제나 그렇듯 우렁찬 소리로 학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장년에 접어든 나이답지 않은, 패기 넘치는 목소리였다.
“자, 다들 주목! 오늘은 특별한 훈련을 실시하겠다!”
데렉 교수님께 시선을 옮기다가, 앞자리에 있던 세리아와 슬쩍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하자, 세리아 또한 목례를 했다. 그래도 인사를 받아줄 정도까지는 가까워졌다는 증거였다.
처음에는 인사를 하다가 혀를 깨물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던 기억이 났다. 누가 보면 내가 그녀를 협박하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사실 세리아가 내게 유독 깍듯한 건 지난 ‘유르디나의 싸가지 반죽음 사건’의 영향도 있었기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는 점이 뼈아팠다.
도대체 기억을 잃은 동안 내 인격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여전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뒷수습은 이미 어느 정도 끝난 뒤였기 때문에,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혹시나 또 한 번 기억을 잃는 사태가 생긴다면, 그때는 조금 더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미래에서 온 편지 내용을 신경 쓰기도 바빴다.
“너희들도 검사라면 주변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거다. 그중에서도 나무가 빽빽이 자란 숲은 가장 까다로운 환경 중 하나지.”
그러면서 데렉 교수님은 시범을 보이려는 듯 옆에 자리한 나무들의 틈새로 들어갔다. 그가 검을 뽑자마자 그 틈새가 얼마나 좁은지 확연히 드러났다.
아카데미 재학생쯤 되면 누구나 상대의 공격권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읽어낸 공격권 내에서 걸리적거리는 나무만 세 그루는 되어 보였다.
그것도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실제 전투는 보다 유동적인 움직임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 데렉 교수님이 검을 휘두를 때 걸리적거리는 나무는 한두 그루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는 비단 데렉 교수님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터였다. 나도, 셀린도, 심지어는 세리아조차도 그렇겠지.
찌르기에 특화된 세검과 같은 무기가 아니라면, 숲 안에서 운신이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봐라, 이처럼 나무의 간격이 좁은 곳에서는 검 한 번 휘두르는 것조차 까다로워진다. 상대가 지성이 없는 종류의 적이라면 좋겠으나, 혹 네임드(named)급의 마수나 인간이 상대라면 검로마저 제한되어 공격이 읽히기 쉽지.”
심지어 숲에서 마주친 마수라면 그 환경에 적응을 끝마친 토착 생물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면 숲 안에서 검사는 더더욱 불리해진다.
데렉 교수님은 그처럼 상식적인 내용을 읊다가, 이내 검에서 오러(aura)를 피워 올렸다.
흐릿한 안개와 같이 피어오르던 마력이 곧 찬연한 빛을 흩뿌리며 결속되었다. 그 핏빛 오러는 데렉 교수님이 이미 검사로서 완숙된 경지에 올랐다는 증거였다.
소드 익스퍼트(sword expert), 오러를 결정화시킬 수 있는 단계. 그중에서도 데렉 교수님은 상위권에 속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도 아카데미 3학년이니만큼 오러를 피워 올릴 순 있었지만, 저처럼 응집된 오러를 덧씌우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수강생 중에는, 세리아 정도가 그나마 가능할까.
그녀도 소드 익스퍼트에 입문한 수준에 불과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평생을 마수 사냥에 헌신한 전설적인 사냥꾼을 순수한 실력으로 이길 수 있는 학생은 없었다.
“다만 너희가 오러를 결정화시킬 수 있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검로가 막히든 말든, 휘두르면 휘두르는 대로 잘려나가거든.”
그러면서 데렉 교수님이 보란 듯이 검을 휘둘렀다. 소리조차 나지 않는, 무음의 검격.
절삭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가 검을 휘두르는 궤적 그대로 모든 것이 잘려나갔다. 나무, 공기, 그리고 소리까지도.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마치 눈을 감았다 떴더니 틀린 그림 찾기처럼 세계에 실선이 그어져 있었다. 소드 익스퍼트쯤 되니 보일 수 있는 기예였다.
“하지만, 아무리 소드 익스퍼트라도 환경을 무시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 자, 이 나무 보이지?”
데렉 교수님은 검의 궤적에 걸려 잔뜩 패인 나무 하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 나무 옆으로 돌아가더니, 나무를 그대로 발로 차버렸다.
툭, 하고 강하지도 않은 충격.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나무는 뚜드득, 하는 굉음과 함께 홈이 패인 방향으로 그 거체를 무너트리기 시작했다.
홈은 당연히 궤적을 그은 방향으로 파여 있었다. 즉, 자칫하다가는 저 나무 아래에 깔려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소드 익스퍼트쯤 되면 그렇게 간단히 죽지는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환경이 상당히 거슬린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물며 전투 중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수강생들의 시선이 조금 진지해졌다.
“지금 보듯이 숲 안에서 칼잡이들은 꽤 불리한 싸움을 해야 한다. 그러니 최대한 숲을 전장으로 삼지 않는 편이 최선이겠지만, 마수 토벌 중에는 그럴 수 없을 때도 많지. 그러니까 오늘은 숲의 주변 환경을 이용하는 실습을 할 거다.”
그러면서 데렉 교수님은 다시 검집에 칼을 수납했다. 어느새 핏빛 오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특히 얼마 뒤에는 수렵제가 있다는 거, 알고 있지? 수렵제는 기본적으로 숲 안에서 마수를 사냥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오늘 미리 현장을 익혀 두면 도움이 꽤 될 거다. 이중 몇 명이나 수렵제에 참가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데렉 교수님은 그렇게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말을 마쳤다. 그리고 그는 늘 그렇듯 수강생들끼리 알아서 하라며 손을 휘휘 저으려다가, 무언가를 깜빡했는지 잠시 멈칫했다.
그는 홀로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마지막으로 말을 덧붙였다.
“참고로 오늘은 허공에 검을 휘두르면 안 된다. 2인 1조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대련하도록. 단, 주변 환경을 잘 분석해야 한다. 나무 위에 올라가든, 풀숲에 숨든, 무엇을 해도 자유다. 아무튼 모든 가능성들을 대비해 봐. 나중에 시험해 볼 테니까 대충하지도 말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라.
그 말을 들은 내 눈빛이 차츰 가라앉았다. 내게는 유리하기도, 불리하기도 한 정보였다.
우선 2인 1조로 산발적으로 퍼져 움직이게 되면, 마수의 습격이 현실화 됐을 때 각개격파를 당할 위험이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마땅한 증거도 없는데 마수의 대대적인 습격을 경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유일한 해답은 하나였다. 마수들이 습격하기 전에, 그 정황을 먼저 눈치 채고 데렉 교수님께 보고하는 것.
숲에 도사리고 있는 마수가 얼마나 강할지는 모르겠지만, 한때 이름 있는 마수들을 수없이 토벌한 전적이 있는 데렉 교수님이었다. 하물며 아카데미 재학생만 100명 가까이 되는 곳에서 패배할 리가 없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이를 위해서는 내 말을 전적으로 믿고 따라와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점일까.
내 시선이 자연스레 셀린을 향했다. 그녀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는 듯, 반색을 하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어때, 이안 오빠? 2인 1조라는데, 오랜만에 단 둘이 오붓하게 데이트라도 하는 건?”
“마수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곳에서 칼을 들고 둘이서 데이트라, 낭만적이긴 해.”
내 반어법에 셀린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진행하는 색다른 실습에 꽤 고무된 듯 보였다.
“그래봐야 하급 마수들 아니겠어? 이곳은 아무리 외곽이라도 아카데미 부지 내라고.”
그것이 일반적인 생각이긴 했다. 아무리 마수의 번식을 방치하고 있더라도, 이곳은 아카데미 부지 내였고 심지어 매년 수렵제까지 개최되는 곳이었다.
지난 엠마의 습격 사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스스로 몸을 지킬 능력이 없는 연금학부 학생이 우연히 사고를 당했다고 보는 시선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편지’ 때문에 내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불안함, 초조함, 그리고 의무감과 죄책감.
아무도 이 편지를 믿지 않는다. 오직 나만이, 이 편지가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오늘 나타날 인명 피해를 막아낼 수 있었다.
외로우면서도 괴로운 기분이었다. 나는 잠시 입술을 짓씹다가, 늘 그렇듯이 셀린에게 동행을 권유하려고 했다.
셀린이라면 내 억지에도 적당히 어울려 줄 것이고, 무엇보다 등 뒤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상대였다. 그러나 그러려던 내 입이 다물어진 것은,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을 때.
내 눈이 흘깃 옆을 향했다. 그곳에는, 아쿠아마린을 닮은 눈동자가 나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옅은 기대를 담았다가, 다시 가라앉은 눈동자. 실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스스로를 책망하며 사그라지는 그 눈빛에 나는 멈칫하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고뇌했다. 그러나 망설임은 짧았다.
“……셀린, 오늘은 다른 사람이랑 조 짜라.”
“그래, 그래. 아무리 그래도 이안 오빠에게는 이 셀린이밖에 없… 뭐라고?”
내 입에서 흘러나올 말을 지레짐작하고 미리 우쭐해져 있던 셀린은, 곧바로 인상을 팍 구기며 내게 되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금 내 말뜻을 확인시켜 주었다.
“오늘은 다른 사람이랑 짜라고. 어차피 너 나 말고도 짤 사람 많잖아.”
“그, 그렇긴 하지만… 아하.”
당황한 듯 우물쭈물하던 셀린은, 곧 내 시선이 누군가를 향했는지 깨닫고 차게 식은 목소리를 냈다.
그녀의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감돌았다.
“……저 년이랑 짜시겠다?”
“나 말고는 짤 사람도 없어 보이잖아.”
셀린의 미간이 짜증스럽게 좁혀졌다. 그녀는 홱, 하고 내게서 차갑게 돌아섰다.
“마음대로 하셔? 나중엔 아주 끼리끼리 놀겠어.”
그녀는 그렇게 비꼬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아무래도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나중에 풀어주어야겠지, 나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기왕 이렇게 된 김이었다. 나는 저벅저벅 걸어 세리아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삼삼오오 모여 조를 짜고 있던 사람들 사이로, 홀로 남은 세리아는 유독 외로워 보였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사실 세리아는 누구도 무시하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의외로 외로움도 탈 줄 안다는 것.
나는 고개 숙인 채 발끝만을 쳐다보고 있는 세리아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세리아.”
“네, 네헷?!”
세리아는 갑작스러운 부름에 깜짝 놀랐는지 귀여운 소리와 함께 펄쩍 뛰었다. 그녀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러한 세리아를 향해, 담백한 제안을 건넸다.
“조 짜자.”
“……네?”
세리아는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나는 단언하듯 한 마디를 더 내뱉어야 했다.
“나랑 조 짜자고.”
세리아는 그러자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피하고, 우물쭈물 하고, 그러더니 헛기침을 하며 늘상 짓던 도도한 표정을 되찾은 채로.
“……네, 네헵.”
혀를 씹었다.
언제나대로의 세리아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