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6화 (16/649)

〈 16화 〉 1. 첫 번째 편지(16)

* * *

숲은 고요했다. 나뭇잎들에 가려 어둑한 길이었다. 곳곳에 핀 이름 모를 꽃들과 풀, 그리고 버섯들까지.

수렵제가 지나 숲의 마수들이 그림자를 감추면, 때때로 연금학부의 학생들이 조를 짜서 숲으로 온다는 소문이 있었다. 마수가 탄생하는 곳은 마력 밀도가 높으므로 품질 좋은 재료를 채집하기 좋기 때문이었다.

그럴 만한 곳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숲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품고 있었다. 그 말은, 반대로 말하자면 아직 길이 덜 들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동물뿐만 아니라 장소 또한 사람이 오고가며 길들여진다. 좀 더 인간에게 친화적인 공간으로, 오솔길이 나고 곳곳이 분획될수록 장소는 점차 사람에게 친숙해지는 것이다.

아무리 오지라고 해도, 주변에 마을이 있다면 반드시 길 하나쯤은 나 있는 법이었다. 숲은 자원의 보고다. 마을의 누구든 숲을 드나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아카데미 남쪽에 위치한 이 숲만큼은 예외였다. 아카데미가 따로 출입을 통제하진 않았지만, 학생들로서는 굳이 남쪽 숲을 드나들 까닭이 없기도 했다.

우선 아카데미 부지 내에 숲은 하나가 아니다. 기숙사 주변에도 자그마한 숲이 하나 위치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마수도 없고 사람들의 출입도 잦아 산책을 가거나 야영을 하기에도 좋았다.

숲에 가고 싶다면, 굳이 먼길을 걸어 남쪽까지 올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재료를 채집하려고 해도, 이곳은 아카데미였다. 귀족들이 다수 재학 중인 곳이었고, 평민 출신도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부유한 상인의 자녀도 많았다.

위험을 감수할 바에야 추가적인 비용을 지불할 학생들이 수두룩하다는 뜻이었다. 예외적으로 엠마 같이 가난한 평민 출신 학생들이 숲의 외곽을 드나들긴 하지만, 그러한 학생들도 호위 없이 숲의 심부까지 이동하는 경우는 없었다.

다시 말해, 이 숲은 그만한 통행량이 없었으므로 당연히 길도 나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결말은 하나였다.

나와 세리아의 제복 곳곳에 온갖 씨앗들이 묻어 있었다. 솜털 같아 보이는 씨앗부터, 찔리면 따가울 것 같은 뾰족뾰족한 씨앗까지.

말로는 ‘대자연’이라지만, 정작 그 안을 오고가는 입장으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재수가 없으면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걸려 제복이 찢어지는 일도 있었다.

나는 이제 반쯤 포기한 얼굴로 걷고 있었다. 엠마가 얼마 전 내게 던졌던 말이 떠올랐다.

‘아닌 척 하더니, 너도 결국 귀족 도련님이었구나?’

그래, 맞는 것 같다. 제복에 씨앗이 달라붙고 축축한 흙이 바지에 달라붙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약초꾼 출신인 엠마가 보았으면 꺄르륵 웃음을 터트렸을지도 몰랐다.

다 큰 사내가 엄살이라고, 나는 세리아도 그렇게 생각할까 싶어 차마 티를 내진 못했다.

세리아는 불평 없이 걷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세리아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마수 토벌에 몇 번 참가한 전적이 있는 검사였다. 아마 이러한 꼴에도 익숙해져 있겠지.

그런데 선배가 돼서 부끄러운 꼴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세리아를 불렀다.

“세리아.”

“네, 넷… 선배님.”

세리아는 조금 긴장한 듯 다시 혀를 씹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말을 절었다는 수치심은 그대로인지,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방금 전까지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소녀라고는 믿을 수 없는 변화였다. 사실, 나도 이제는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그녀가 무뚝뚝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건, 반대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서 그렇다는 걸.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는 없는데, 당장은 조금 더 친해지며 나아지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혹시 주위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없어?”

“……? 네, 일단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흐음, 나는 그러한 소리와 함께 잠시 생각에 잠겼다.

벌써 숲의 심부 쪽으로는 꽤 이동한 상태였다. 만약 마수가 학생들을 습격한다면, 최소한 이 거리 내에는 들어와 있어야 했다.

물론 숲은 넓다. 세리아의 기감이 얼마나 발달해 있더라도, 그 틈새를 빠져나가 다른 학생들을 습격할 가능성은 존재했다.

하지만 마수가 굳이 그럴까?

가까운 거리에, 단 둘뿐인 사냥감이 있다. 애초에 학생들을 습격하고자 한다면 나와 세리아 또한 그 대상일 것이다.

마수들은 ‘네임드’라고 불리는, 일부를 제외하면 그다지 지성이 높지 않았다. 일부러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을 두고 굳이 우회를 택하지는 않을 터였다.

물론 지성이 있어도 마찬가지고, 나는 세리아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미안하지만 한동안 경계를 풀지 말아줘, 그리고 일단 이곳에서 쉬자.”

“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세리아는 어째서 경계를 계속하라는 것인지, 그리고 왜 이리 깊은 곳까지 들어와 이제야 쉬자고 하는지 알 수 없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충실히 내 말을 따라 주었다. 우물쭈물하며 질문을 던지려는 듯 보였지만, 결국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최근 나와 대화를 하며 실언이 잦았다는 점을 고려한 선택인 듯했다. 그녀는 솔직함과 무례함의 경계를 늘 넘나들곤 했으니까.

하여간 겁도 많은 여자였다. 나는 마침 근처에 위치해 있던 바위 위에 대충 걸터앉았다. 수통을 따서 물을 들이키니, 잎에 쓸린 얼굴과 목덜미가 따가웠다.

문명의 세계에서 살아가던 내겐 꽤 불쾌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익숙해져야겠지.

검을 든 순간부터, 마수는 물론이고 타인의 목숨까지 빼앗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날붙이는 결국 무언가를 해치는 도구이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혹독한 훈련을 거치면서, 스승이 내게 세뇌하다시피 강요했던 마음가짐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삶을 살아갈 사내가 고작해야 숲을 꺼려하면 웃긴 일이었다.

그때쯤 다물어져 있던 세리아의 입에서 자그마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내 눈이 자연스레 세리아를 향했다.

“저, 선배님?”

“응, 왜?”

내 즉각적인 대답에 세리아의 몸이 알게 모르게 움찔 떨렸다. 내 예민해진 감각에나 겨우 잡히는 미세한 떨림이었다. 그리고 이는 세리아가 본격적으로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는 최근 나를 통해 인간관계에 대한 상식을 쌓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녀 곁에 친구라 부를 만한 사람이 나밖에는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요즘따라 유독 눈치를 보는 일이 잦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불편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눈치까지 살핀단 말인가. 그러나 세리아는 지금 갓 세상에 나온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였다.

호기심이 넘치지만, 모르는 것도 많은 순진한 소녀. 최소한 인간관계에 한해서는 처음 겪는 일 투성이일 터였다.

그러니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울 법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조금 더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기도 했고.

내가 선배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은, 그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는 것뿐.

세리아는 잠시 후,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하,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당연히 괜찮지, 후배가 선배한테 묻는 건데.”

그게 뭐 허락까지 구할 만큼 특별한 일인가, 나는 그렇게 덧붙이며 다시 수통에 든 물로 메마른 식도를 적셨다.

너무 많이 마셔서는 안 됐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야 했으니까. 나는 물을 입에 콸콸 쏟아붓고 싶은 기분을 그러한 생각으로 참아냈다.

나중에 돈 좀 벌면 공간왜곡 마법이 걸린 수통으로 교체하든가 해야지, 원. 그러나 반영구적인 마법 각인이 이루어진 물건은 무엇이든 비쌌기 때문에, 그럴 날은 요원해 보였다.

내가 아무 말도 없이 수통의 물을 들이키는 모습을 보고, 세리아는 질문을 던져도 괜찮다고 판단한 듯했다. 그녀의 매력적인 입술이 다시 조심스레 열렸다.

“왜 저와 조를 짜신 건가요?”

직설적이고, 담백한 질문. 나는 수통의 뚜껑을 닫다가 슬쩍 시선을 세리아에게로 향했다.

세리아의 눈동자는 고요히 가라앉아 있는 듯 보였지만,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그 미묘한 떨림이야말로, 세리아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기억을 잃은 이후, 감각이 무척이나 예민해진 나조차도 며칠을 함께하고 나서야 눈치 챈 그녀의 버릇.

이를 읽지 못해서, 사람들은 그녀에게 ‘유르디나의 싸가지’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꽤 잔인한 일이었다. 그래서 더 그녀가 신경 쓰이는지도 몰랐다.

어째서인지 홀로 둘 수 없는, 후배를 향한 선배의 값싼 연민이라 해도 좋았다. 어느샌가 그녀를 마냥 타인으로 취급할 수 없는 내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내 마음을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았다. 부끄럽기도 했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냥.”

단 두 글자면 충분했으니까, 조금 긴장한 낯빛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세리아의 얼굴에 황당함이 스쳤다.

“그, 그, 친구 분이랑 조를 짜실 생각 아니었나요?”

“처음에는 그랬지.”

내 막힘없는 대답에 세리아의 눈은 더더욱 의혹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재차 물어왔다.

“그런데 어째서…….”

“말했잖아, 그냥이라고.”

나는 그러면서 피식, 웃으며 세리아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세리아의 몸이 흠칫 떨렸다.

“셀린도 내 친구고, 너도 내 친구잖아. 친구끼리 조를 짜는데 굳이 이유가 필요해?”

솔직히 말해 그때 세리아가 퍽 외로워 보이는 눈빛을 한 것이 주된 원인이었지만, 그녀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일부러 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내 명쾌한 해설에 세리아는 도리어 더 당황한 듯했다. 그녀는 잠시 멍해졌다가,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여 내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자그마한 중얼거림이 귓가를 스쳤다.

“치, 친구…….”

마치 난생 처음 들어보았다는 듯, 낯섦과 쑥쓰러움이 뒤섞인 울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기야 하겠냐만은.

나는 그러는 세리아를 보고 되물었다.

“설마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지? 서로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이는 맞잖아?”

“그, 그, 그렇군요… 그런데, 저…….”

세리아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다가, 곧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아리따운 소녀가 그러고 있으니 그마저도 그림이 되었다.

혼자 보기 아까운 광경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어질 세리아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세리아의 말은, 상상 이상이라서.

“……친구끼리는, 무엇을 하고 지내나요?”

나는 그대로 굳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내 황당하다는 눈빛에 세리아는 수치스러운 듯 우물쭈물하며 내 시선을 피했다. 친구끼리는 무엇을 하고 지내냐니?

그야, 함께 노닥거리기도 하고 놀러 다니기도 하고 밥도 먹고 하지. 정형화된 패턴은 없었다. 하지만 세리아는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눈치라, 나는 잠시 끙끙거려야 했다.

무어라 대답해 줘야 좋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지금처럼 지내는 거야. 둘이서 이야기도 나누고, 함께 다니면서 산책도 하고, 그리고 남들한테는 못하는 말도 하면서… 그렇게 소중한 시간을 나누며 지내는 거지.”

“나눈다, 나눈다, 나눈다… 앗.”

세리아는 무언가 떠오르는 바가 있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내게 진지한 어조로 물어왔다.

“그러고 보니 친한 사이에는 선물을 나누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뭐, 그럴 때도 있지.”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일단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러자 세리아의 표정이 더욱 진지해졌다.

“그, 그럼. 이안 선배께서 친구를 해주시는 대가로, 저도 무언가를 드려야 하는 걸까요?”

“……뭐?”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되물은 말이었으나, 세리아는 멋대로 이를 동의로 생각한 듯했다. 그녀가 쩔쩔매며 중얼거렸다.

“지, 지금은 가진 게 없지만… 기숙사로 돌아가면 지난번에 드리려고 했던 200 골드로 어떻게든…….”

“아니, 아니라니까… 그러면 친구가 아니라 고용관계가 돼버리잖아, 응?”

겉보기와 달리 골치 아픈 면이 있는 후배였다. 나는 이마를 탁 짚고, 그녀에게 몇 번을 더 ‘친구’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세리아는 가까스로 내게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납득한 듯했다. 아직도 조금 아리송한 눈치였지만, 최소한 내 앞에서 그런 말을 다시 꺼내지는 않겠지.

나는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어차피 차차 알아가다 보면, 세리아도 알게 될 것이다. 세상에는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걸.

그러나 아직 세리아에게는 의문거리가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 내게,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그, 선배님?”

“어, 왜.”

그녀에게 답하는 내 목소리에는 피로가 역력했다. 예상을 상회하는 세리아의 외톨이 기질에 지쳐버렸기 때문이었다.

화를 내진 않았다. 그러면 세리아가 더 위축될지도 모르니까.

다만 그녀가 눈치 있는 질문을 던졌으면 하는, 그러한 바람은 있었다.

내 바람을 아루스 신께서 알아주신 것인지, 세리아는 조금 더 정상적인 질문을 내놓았다.

“그럼 친구 사이니까, 조금 실례될 수 있는 질문을 해도 될까요?”

그 눈치 없는 세리아가 ‘실례’라고 말할 정도의 질문이라, 솔직히 이쯤 되니 조금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그녀에게 답했다.

“그래, 물어봐.”

내 허락이 떨어지자 세리아에게서 느껴지던 마지막 망설임이 사라졌다. 그녀가 곧바로 내게 물었다.

담백하고, 청명한 목소리.

“친구 분 때문입니까?”

그래서 나는 의외의 일격을 당한 것처럼, 몸을 뻣뻣이 굳히는 수밖에 없었다.

포기했다는 듯 땅을 긁고 있던 내 시선이 세리아에게 향했다. 그녀의 짙푸른 눈동자는 깊고 고요했다. 늘 그랬듯이.

“친구 분께서 이 숲에서 습격을 당하셨으니까, 이곳까지 오신 건가요?”

그 질문은, 일류 사수가 쏜 화살처럼 서슴없이 내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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