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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7화 (17/649)

〈 17화 〉 1. 첫 번째 편지(17)

* * *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나로서는 세리아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화가 난 걸까? 내 개인적인 싸움에 그녀를 끌어들인 셈이기도 했다. 세리아와 엠마는 아무 사이도 아닐 테니까.

혹은, 단순한 의문일지도 몰랐다. 세리아라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녀는 검을 제외한 대개의 일에 무심하고, 심지어 인간관계에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서툴렀다.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아 나는 잠시 시선을 피한 채 망설였다. 그러나 결국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건, 가식을 걷어낸 솔직한 감정이었다.

“……나도 모르겠어.”

한숨과 함께 흘러나온 그 말, 그것이 내 본심이었다.

솔직히 알 수 없었다. 내가 왜 그리 미래에서 온 편지에 집착하게 됐는지.

의무감일 수도 있고, 책임감일 수도 있었다. 다만 모든 동기에 순수한 감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엠마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그러한 감정에 지배받고 있는지도 몰랐다.

죄책감과, 더 나아가 분노.

엠마를 다치게 한 적을 향한, 내 죄의식을 씻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속죄 의식.

복수심이었다.

물론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숲에서 나오는 마수를 죽인다고 해서 엠마가 다시 일어나리란 보장은 없었다.

가치 있는 제물을 바쳐 아루스 신께 기적을 내려받는다면 또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엠마에게도, 엠마의 아버지에게도, 내게도 그럴 여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무의미한 감정이라는 것쯤은.

그러나 어떻게 모른 척 할 수 있겠는가. 엠마를 말리지 못한 것, 그녀를 지켜내지 못한 것, 하다못해 편지의 내용을 조금 더 강경하게 말해 주었다면.

그랬다면 차라리 덜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직도 내 머릿속에는 그날의 광경이 선명했다.

울부짖는 촌부의 모습, 엠마의 아버지는 제 마지막 희망을 쥐어뜯긴 것처럼 절규했다. 그 기억이, 엠마가 늘 짓곤 했던 상냥한 미소와 겹쳐졌다.

괴롭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아니, 지금도 사실은 괴롭다. 가슴이 따끔거리고 무거운 죄책감이 폐부를 조용히 찍어 누르는 듯했다.

나는 조용히 입술을 짓씹으며, 수통의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이제 수통에는 물이 조금만 남아있었다.

“하지만 마수를 찾아보려고 멀리까지 온 건 맞아. 또 다시 학생들을 습격하면,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저를 고른 건가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던져진, 또 하나의 의문.

아마도 세리아가 진실로 묻고 싶었던 질문일 터였다. 당당하고, 또 오만하다.

세리아는 실력 있는 검사였다. 그러니까 마수를 상대할 때도 커다란 전력이 돼줄 터였다. 고작해야 나와 비슷한 수준인 셀린보다는 나으리라.

‘친구’라는 말이 낯설기에, 한 번 더 의심하고 가능성을 도출한다.

나중에 높은 자리에 설 그녀에게는 그 또한 미덕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헛된 의심이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계획은 전투를 상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럴 리가, 나도 주제를 알아. 지금 내 실력으로 마수를 상대하는 건 위험해. 물론 너에게도 위험을 강요할 생각은 없고.”

만약 그랬다면, 나는 미리 세리아에게 내 계획을 설명하고 정중히 양해를 구했을 터였다. 아무리 뛰어난 실력의 검사라도 마수를 상대한다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니까.

상대는 인류에 대한 적의로 똘똘 뭉친 괴물들이었다. 삐끗하면 목숨을 잃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여전히 세리아는 조금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그녀가 입술을 어렵사리 뗐다.

“……하지만, 방금 전에는 잘 모르겠다고.”

“마수를 죽이고야 싶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슬슬 휴식을 끝마칠 시간이었다. 탁탁, 하고 바짓단을 털어내니 묻어있던 솜털 같은 씨앗들이 흩날렸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일은 달라. 나 같은 놈은 그런 걸 잘 구분해야 하거든, 살아남아야 하니까.”

세리아는 내 대답에도 아직 의문이 가시진 않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고민하다가, 내게 물었다.

“친구이기 때문인가요?”

무엇이, 라고 되묻지는 않았다. 누구에 대해 묻고 있는지는 비교적 명확해 보였으니까.

엠마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 내가 왜 숲속의 마수에 집착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했다.

세리아는 내 감정의 원인을 그녀에게서 찾고 있었다. 물론, 내 사정은 조금 더 복잡했다.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가 있고, 그 편지에 나온 그대로 엠마가 습격을 당했으며, 다음 습격이 오늘 실습에서 예정되어 있다면?

또 다시 후회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중상을 입은 벗의 병상 앞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 건 이제 질렸으니까.

그 기나긴 사연을 모두 세리아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녀도 내 말을 듣다 보면 레토나 셀린처럼 내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결론을 내릴지도 모를 일이었고.

그래서 나는 다만, 세리아에게 되물었다.

“너는 어떨 것 같은데?”

“……?”

되돌려진 물음에, 세리아는 조금 놀랐는지 나를 아무 말도 없이 응시했다.

무슨 뜻이냐는 눈빛, 그래서 나는 슬쩍 웃으며 그녀에게 재차 물었다.

“너는, 내가 마수한테 습격을 당하면 어떨 것 같아? 그리고 중상을 입고 오늘내일 하고 있다면.”

세리아는 그제야 내 말뜻을 눈치 챘는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고민에 잠겼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이리 갸웃, 저리 갸웃했다. 지금까지는 보여주지 않던 귀여운 일면이었다. 아마 내 앞에서 그 정도로 깊이 고민에 빠진 적이 없었을 테지.

그만큼이나 난해한 문제였다. 세리아는 한참 동안이나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금, 화가 날 것 같네요.”

그렇게 나를 흐뭇하게 하는 대답을 남겼다. 다시 눈을 뜬 그녀의 눈동자는, 고요하면서도 싸늘했다.

그 눈빛이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걸어가며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 그러니까 우리가 친구 사이라는 거야.”

“친구 사이…….”

세리아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멍한 눈빛을 했다. 그녀의 입에서 ‘친구 사이’라는 말이 몇 번이고 되풀이됐다.

그녀로서는 처음으로 얻은, 친구라는 증거였다. 감회가 새로울 수도 있었다.

물론 앞으로는 익숙해질 테지, 그녀는 외모든 능력이든 배경이든 출중한 여인이었으니까. 사회성만 기른다면 그녀와 친구를 하고 싶은 사람은 줄을 설 터였다.

나는 잠시 그러한 세리아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슬쩍 시선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도 숲은 고요했다. 아직 한낮이라 풀벌레 우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마수가 습격해 온다는, 편지의 내용을 의심케 하기에는 충분한 광경이었다.

정말 습격을 오긴 오는 걸까?

내가 너무 과민반응을 했을 수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7년 뒤의 미래에서 온 편지라니, 농담이 지나치지 않은가.

엠마의 건도 단순한 우연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렵제 기간이 다가올수록 숲에서 등장하는 마수의 개체수는 증가한다. 그중 하나가 운 나쁘게 엠마를 습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그랬다면, 이라고 바라고 있는 비겁한 나의 일면이 있었다.

나는 고작해야 시골 자작가의 차남에 불과했다. 배경도 실력도 변변찮았다. 그런 내게 세계가 멸망한다느니, 내가 편지의 내용을 미리 말해주지 않은 탓에 친구가 다쳤느니 하는 이야기는 너무나 무겁고 괴로웠다.

그러나 또 하나, 감각을 곤두세운 채 마수의 습격을 기다리는 내가 있었다.

논리나 합리, 이성의 영역이 아니었다. 동물적인 직감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그 편지를 무시해선 안 된다고, 그래서 엠마가 그렇게 쓰러진 거라고.

그 둘 중 누가 옳았는지는 곧 드러났다.

부스럭, 하는 아주 작은 기척.

기억을 잃은 이후 예민해진 감각에 더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에 느낄 수 있었던, 미세한 울림이었다. 그러나 그 소리를 감지한 순간, 내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노리고 있다. 이미 나와 세리아의 존재를 눈치 챘기에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토록 숨을 죽인 채 걸어올 리가 없었다.

나는 아직도 ‘친구’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곧 살포시 미소를 짓고 있던 세리아의 옆구리를 찔렀다.

쿡, 하고 내 손가락이 그녀의 부드러운 살갗을 파고들었다. 세리아는 화들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으나, 내가 검지를 인중에 대자 곧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빛이 진중해졌다. 눈을 감고, 기감을 퍼트리던 그녀의 낯빛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기척이… 아니, 하나? 둘? 넷?”

그녀의 목소리가 한 마디, 한 마디 이어질수록 그녀가 입에 담는 숫자는 점점 더 많아졌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소름이 돋는 감각을 느꼈다.

하나가 아니다. 마수인데, 집단을 이루며 행동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카데미 학생들을 습격하겠다는 간 큰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저들은 여럿이고, 오늘 실습에서 학생들은 둘씩 짝지어 움직인다.

아무리 정신이 팔려 있었더라도, 세리아는 세리아였다. 그녀조차 처음에는 그 존재를 헷갈릴 정도였으니, 오늘 실습에 참가한 대다수의 학생들은 마수의 존재조차 눈치 채지 못할 터였다.

그 결말이 무엇일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유혈사태다. 세리아도 나와 비슷한 판단을 내렸는지, 목소리를 낮추고 허리춤의 검으로 손을 움직였다.

“이안 선배, 선공할까요?”

무척이나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적들은 우리의 존재를 눈치 채고 있었지만, 우리가 그들의 존재를 눈치 챘다는 사실까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싸움을 벌인다면 선공을 하는 쪽이 무조건 유리했다. 그러지 않아도 숲은 불리한 전장이었다. 조금이라도 승패의 추를 기울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마수 토벌에 여러 번 참가한 전적이 있는 세리아였다. 그녀의 판단은 정확했다.

단, 그것이 마수 토벌이 목적이라는 전제 하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아. 아무리 너라도 다칠 수도 있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하던 세리아는 멈칫했다. 그녀의 의아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하지만, 그럼 어떻게…….”

“튀어야지.”

조금의 망설임조차 없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세리아는 더욱 멍청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고려조차 하지 않았던 선택지를 들은 이만이 짓는,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곧바로 세리아를 설득했다.

“내가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고 했잖아, 우리가 굳이 저 마수들을 상대해야 할 까닭이 없어. 아직 마수와는 거리가 있으니, 재빨리 달려서 데렉 교수님께 알리면 돼.”

그러면 끝이다. 그 이후에는 데렉 교수님이 나설 테고, 전설적인 마수 사냥꾼은 여실한 실력을 선보이며 마수들의 목을 뎅겅뎅겅 쳐낼 것이다.

위험 부담은 적고, 효과는 확실했다. 이러한 선택지를 고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세리아도 내 제안이 내심 옳다고 여긴 듯했다. 그녀는 무어라 반박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가, 이내 꾹 다물었다.

다만 망설임을 온전히 쳐내지 못한 눈빛으로, 중얼거렸을 뿐.

“하지만…….”

“세리아, 자존심 챙길 때가 아니야.”

도망친다는 것,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검사로서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자존심과 목숨을 교환할 수는 없었다. 이 또한 상식이었다.

세리아는 쉽사리 망설임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러나 내 강한 의지를 담은 눈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다쳐서는 안 됐다. 그것만이 지금의 내가 가진 유일한 소망이었다.

“……알겠, 습니다.”

여전히 떨떠름한 기색이었지만, 세리아는 일단 나를 따라주기로 한 듯했다.

저 멀리에서, 마수들의 기척이 점점 더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와 세리아는 그대로 기척을 죽인 채 내달리기 시작했다.

마수들은 한동안 우리의 이동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기점으로 우리와 거리가 너무 벌어졌다고 판단했는지, 본격적으로 추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마수들과 거리를 꽤 벌린 뒤였다. 마수들이 아무리 빠르더라도 숲의 크기는 한정되어 있었다. 이대로 달리다간, 곧 데렉 교수님이 눈치 채리라.

그동안 나와 세리아는 마수들이 다른 학생들을 습격하지 못하도록 미끼 역할만 해도 충분했다. 그것으로 내 계획은 완성된다.

아무도 다치지 않는, 훗날 술안주 거리로나 삼을 만한 사건.

그랬어야만 했다.

“아, 흑……!”

내 옆에서 함께 내달리던 세리아가, 옅은 신음과 함께 멈춰 서지만 않았더라면.

그녀가 발목을 부여잡았다. 그 부위가 어딘가 익숙했다. 나는 곧바로 며칠 전에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세리아가 발목을 접질리고, 거동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던 모습.

심장이 서늘해졌다.

힐링 포션으로 아무리 치료하더라도 관절의 피로는 온전히 풀리지 않는다. 그래서 위험하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

순간적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뻔했으나, 그보다는 세리아의 상태가 우선이었다. 내가 다급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달려갔다.

세리아는, 주저앉은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숨길 수 없는 고통이 낯빛에 그대로 드러났다.

“세리아, 괜찮아?”

“먼저, 크으… 먼저 가세요, 이안 선배.”

나는 그 말을 듣고 일순 멍해졌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먼저 가라는 말은, 더는 속도를 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짐덩이는 되지 않겠다는 의지.

그러나 문제는, 달릴 수 없을 정도의 부상이라면 전투에서도 기동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움직임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이 얼마나 불리하게 작용하는지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 상태에서 마수를 하나도 아니고 여럿을 상대해?

불가능했다. 죽겠다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나는 울컥해서 외쳤다.

“미쳤어? 아무리 너라도 다리를 못 쓰면…….”

“제 잘못이니까요.”

내게 돌아온 세리아의 대답은 지나치게 침착했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포기한 듯한 눈빛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단히 죽어주지는 않겠다는 듯 그녀의 손이 허리춤의 검 손잡이를 더듬거리고 있었다.

“제가 책임져야겠죠. 그 정도 염치는 있어요, 이안 선배.”

딴에는 맞는 소리였다.

힐링 포션을 쓰다 보면 발목 관절에 무리가 간다고 경고했었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무리한 수련을 반복한 것은 세리아였다.

그녀는 이미 한 명의 검수였다. 당연히 자신이 저지른 일에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했다. 맞는 말인데, 나는 도무지 그녀에게서 떠날 수가 없었다.

아니, 정녕 그녀의 책임인가?

따지고 보면, 그녀를 끌어들인 것도 내가 아닌가.

모골이 송연해졌다. 엠마와 그녀의 아버지가 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후회와, 죄책감.

그리고 복수심.

불이 당겨지듯, 감정의 불꽃이 회한으로 얼룩진 기억을 집어삼켰다. 나는 간절했다. 또 다시 후회하지 않겠다고, 검을 들고 나선 것이 아닌가.

내 눈이 조용히 정면을 응시했다.

느껴졌다.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는 시간이 없었다.

“세리아, 걸을 수는 있지?”

“부목을 대면, 어떻게든…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먼저 가라.”

내 가라앉은 목소리에, 세리아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잘못 들었다는 듯,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되물었다.

“……네?”

“먼저 가라고, 내가 미끼로 남을 테니.”

그러나 이미 각오는 섰다. 내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단지 숨을 가다듬으면서, 저 멀리서 다가오는 마수들의 존재를 짐작하고 있을 뿐.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던 세리아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 잘못이잖아요! 책임도 제가 질 테니…….”

“세리아.”

나는 몸을 일으키면서, 저벅저벅 걸어 마수들이 다가오는 방향을 향해 섰다.

만약 싸워야 한다면 선공을 해야 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건,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내 가슴을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편지를 받은 이후로,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도대체 기억을 잃은 동안 나는 누구였는지, 내 감각은 왜 더 예민해졌는지, 또 생사를 건 전투를 앞두고도 내 가슴은 왜 이토록 평온한지.

해결할 수 없는 그 모든 의문을 뒤로 하고,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세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발목의 통증조차 잃은 채,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멍한 표정을 두고두고 기억해 두기로 했다.

“원래 친구끼리는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앞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마수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적당한 위치를 선점해야만 했다.

세리아가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그녀도 곧 도망쳐서 데렉 교수님께 이 사태를 알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터였다.

마수들과 싸우기 앞서, 나는 품속을 더듬거렸다.

느껴졌다. 물약병 특유의 단단한 감촉이.

다시 한 번 엠마를 떠올렸다. 그리고 창백한 안색으로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던 그녀의 아버지도.

마수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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