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9화 (19/649)

〈 19화 〉 1. 첫 번째 편지(19)

* * *

무력감이란 비참한 감정이다.

세리아는 어린 시절부터 그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여섯 살 무렵에, 그녀의 어머니가 천하다는 이유로 영주성에서 쫓겨났을 때부터 그랬다.

고귀한 혈통을 중시하는 유르디나 가문이었다. 고작 여섯 살에 불과한 꼬마아이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물며 그녀 또한 천출이 아닌가.

울부짖는 어머니, 냉혹한 표정으로 서 있던 아버지. 그리고 그 모습을 무심히 지켜보고 있던 그녀의 이복 언니까지.

그녀의 모든 기억은 늘 그 시점부터 시작됐다. 마치 저주처럼 그녀의 삶에 못 박힌 악몽이었다. 그날 이후로 세리아는 다시는 무력해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야만 그날의 기억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새벽녘의 서리처럼 차갑던 아버지의 눈과, 그녀를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던 이복언니의 눈빛이 아직까지도 그림처럼 그녀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세리아는 숨이 막혔다. 악몽을 꿀 때마다 그녀는 질식하듯 눈을 떴다.

그래서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복언니를 이길 수 없었다. 그녀의 삶은 곧 패배의 역사였다.

유르디나의 태양, 그녀의 언니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해야 했고 그 비교 대상은 언제나 천출인 그녀였으니까.

이제는 기회가 없었다. 이복언니가 세상으로 나가면, 세리아는 다시는 그녀와 동일선상에 서지 못할 터였다. 세상에서 적통과 천출의 차이는 그토록 극심했다.

그래서 조급했다. 무력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그날의 비참함을 재현하고 싶지 않아서 무리하면서까지 훈련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것이란 말인가.

세리아는 숨을 헐떡였다. 가까스로 걸음을 내딛곤 있는데, 발목이 시큰거려서 제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염좌에서 느껴지는 열감은 이미 불덩이처럼 그녀의 통각을 집어삼킨 지 오래였다.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세리아는 이를 악물고 발걸음을 옮겼다. 때때로 그녀의 칼은 지팡이가 되어 주었다.

그 칼이, 일평생을 정진해 온 그 검도의 길이 무력했다.

그녀를 대신해서 한 사내가 싸우고 있을 터였다. 느껴지는 기척만 해도 여러 마리, 혹은 10마리 이상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하급 마수라 하더라도 10마리를 홀로 상대하는 건 지난한 일이었다. 하물며 하급 마수가 아니라면?

그 만약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세리아의 심장은 죄악감에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비틀거리며 걷다가, 그녀는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그녀의 몸에 흙과 풀이 묻었다.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울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는데.

지금껏 그녀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쭉.

그녀의 편이었던 어머니는 이미 빼앗겨 버렸으니까, 그녀의 삶에서 그 흔적마저 지워버리려는 듯 가문은 어머니의 행방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멸시를 받으며 자라왔다. 검의 재능을 인정받은 후에도 그녀는 곁에 사람을 두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으니까. 가문의 인간들은 모두 그녀를 감시하거나, 괴롭히거나, 은근히 헐뜯기를 즐겼다. 그러던 인간들이 어느 날부터 고개를 숙여 그녀를 상전 모시듯 한다니.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그녀는 인간관계를 쌓아올리지 못했다.

최소한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지금은, 처음으로 ‘친구’라고 부를 상대가 생겼으니까.

‘원래 친구끼리는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안 선배는, 진심으로 보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세리아는 알고 있었다. 이안과의 첫 번째 대련에서 그는 무시무시한 실력을 보여주었지만, 그 이후의 그는 아니었다.

중하위권이라기에는 날카로운 면이 있고, 또 그렇다고 상위권에 오르기에는 기본기와 마력량이 여전히 부족한 정도.

며칠 동안 함께하면서 세리아가 관찰한 ‘이안 페르쿠스’라는 인간은 분명히 그랬다. 그리고 제 실력을 과신해서 만용을 부리거나 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러나 죽을지도 모르는 길에, 그는 그녀를 대신해 들어섰다. 그녀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책임이 아닌가. 그러니 그녀가 책임져야 하는 일이었다. 죽더라도 그녀가 죽고, 그는 살아야 했다.

그런데 이 명료한 명제들을, 이안은 단숨에 무너트렸다. 그래서 세리아는 이안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렴풋이 느끼는 바는 있었다.

‘친구’란 그러한 관계가 아닐까 하고, 세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닥을 기듯이 몸을 일으켰다.

이안 선배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세리아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 발목 따위는 분질러져도 좋겠다고, 어떻게든 데렉 교수님께 알려야겠다고 생각하는 세리아가 이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바닥을 긁고, 기어서, 비틀거리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의 앞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사력을 다해 달리고 구른 탓에 정신이 흐릿했다.

그래서일까, 인기척을 먼저 감지한 쪽은 상대였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그녀의 앞에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울퉁불퉁한 몸을 가진 데렉 교수, 그리고 그의 옆에서 시시덕거리고 있던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 그러고 보니, 이안 선배의 친구로 보였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조를 짠 듯 보이는 또 다른 2학년도.

단지 깜짝 놀라 그녀에게 다가오는 데렉 교수의 손을 쳐내면서, 세리아는 말했다.

“마수…….”

데렉 교수의 어리둥절한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나머지 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셋이 그대로 얼어붙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수가, 습격했어요… 이안 선배가, 위험…….”

헐떡이면서도, 세리아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데렉 교수를 바라보았다. 데렉 교수는 아무 말도 없이 세리아가 달려온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한 마디를 남겼다.

“……잘했다.”

그와 동시에, 데렉 교수가 잔상조차 남기지 않고 자리를 박찼다. 그 뒤를 검은 머리카락을 한 소녀가 뒤쫓았다. 홀로 남은 소녀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등을 돌려 어딘가로 뛰어갔다.

그리고 곧 그녀가 뛰어간 방향에서 재학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각자의 병장기를 챙겨 어딘가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가세하려는 듯했다.

부디, 살아있기를.

세리아는 그렇게 기도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뇌에 산소가 돌지 않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래서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것이 그녀가 생에 처음으로 타인을 위해 올린 기도였다는 것을.

외로운 소녀는, 어느샌가 그 곁을 누군가에게 허락하고 있었다.

**

늑대 두 마리는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짓쳐들어왔다. 나름대로 합을 맞춘 결과인 듯 보였다. 서로의 보폭이 꼬이는 일은 없었으니까.

시야가 어지럽기는 했다. 그러나 결국 내게 달려드는 순간은 정해져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늑대들의 질주가 포탄과도 같은 탄력을 받기 위해 잠시 멈칫하는 찰나.

숨을 죽이고, 시선을 가라앉혔다.

‘낌새’를 찾아야 했다. 저들은 마수에 불과했다. 인간보다 근육과 의도를 숨기는 데 미숙할 터였다. 하물며 지금 전신의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예민해져 있었다.

와라, 그 순간 내 눈앞에 가상의 궤적이 그려졌다.

직감의 영역이었다. 나는 곧바로 몸을 비틀어 그 궤적 사이의 미세한 틈새를 비집었다. 시간이 멈춘 찰나에 검이 휙, 하고 회전했다. 내 손이 검을 역수로 움켜쥐었다.

허공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잿빛의 포탄 두 개가 내 곁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고속으로 쏘아진 거체는 무시무시한 물리력을 가지고 있었다. 피하지 않았다면 중상을 면치 못했으리라.

미리 준비하고 있던 검을 그대로 내리찍었다. 제 운동량을 이기지 못하고 날아가던 늑대의 등팍에 검이 수직으로 꽂혔다.

마력을 머금은 검이 근육을 찢고 들어가며 웅웅거리며 울었다. 원래 내 오러는 이토록 짙지 않았을 텐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 검에 덧씌워진 마력은 채도를 더해 가고 있었다.

주우욱, 하고 척추를 피해 등판에 비스듬히 꽂힌 칼날이 저절로 늑대의 몸을 찢는다.

치명타였다. 늑대는 몸을 날리던 자세 그대로 피를 쏟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때였다. 내 칼날을 피해간 또 한 마리의 늑대가 내게 다시 짓쳐들어온 건.

나는 곧바로 칼을 뽑아 수평으로 검을 그었다. 콱, 하고 벌려진 늑대의 아가리에 내 검이 틀어박혔다. 아슬아슬하게 툭 튀어나온 어금니를 피해, 목까지 갈라버릴 수 있는 각도.

그러나 근육에 쌓인 피로가 너무 심했던 탓인지, 손아귀의 힘이 풀려 검은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콰득, 하고 늑대는 살기 위해 억지로 검을 씹었다. 그 치악력이 무시무시했다. 당장 검을 뺄 수는 없었다.

등판을 찢긴 늑대가 최후의 발악을 시도한 것은 그때였다. 마지막 힘을 모두 쥐어짠 늑대는 거대한 아가리를 벌려 나를 물어뜯으려 들었다.

검은 뽑히지 않고, 피하기에는 늦었다.

일순 활로를 찾던 뇌리가 온통 새하얗게 타버리는, 절체절명의 순간.

내 손이 자연스레 허리춤을 더듬었다. 그곳에서 붙잡히는, 낯선 감촉.

손도끼였다. 언제부터인가 내 벨트에 매달려 있던 부무장.

내 팔이 멋대로 손도끼를 뽑아냈다. 검보다 한참이나 짧은 무기인 만큼 그 속도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그리고 그렇게 치켜든 도끼를 그대로 내려찍기.

콱, 하는 소리와 함께 아가리를 벌리고 있던 늑대의 코를 손도끼가 찍어 내렸다. 아가리가 단숨에 다물어지며 늑대의 대가리가 바닥에 처박혔다.

한 생명이 사력을 다한 발악은 그렇게 끝이 났다.

턱으로 내 검을 고정시키고 있던 늑대는 당황한 듯 도리질을 치며 내게서 벗어나려 들었다. 일말의 빛조차 반사하지 않는 그 새까만 눈동자가 공포로 젖어들었다.

그것이 그 늑대가 느낀 마지막 감정이었다. 손도끼가 벼락같이 늑대의 두개골을 강타했다.

쾅, 쾅, 쾅. 연달아 도끼가 내리 찍히는 소리와 함께 육편과 골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뇌수가 터져 나오고, 핏물이 도끼를 흥건히 적신 후에야 사냥은 끝이 났다.

두 마리의 늑대는 이제 없고, 두 체의 시체만이 남았다.

힘들어서 죽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욕구를 가까스로 참아냈다. 아직 기척이 하나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 기척은, 유독 특이했다.

움직임이 없었다. 어느 정도 다가온 뒤로는, 태연히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의심스러웠다.

혹시 함정을 파고 기다리는 걸까? 아니면, 내가 지칠 때까지 기다리는지도 몰랐다. 영특한 사냥꾼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하겠지.

늑대와, 인간. 이제는 누가 사냥꾼이고 누가 사냥감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가까운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잠깐의 휴식을 즐겼다.

아직도 마지막 늑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느긋하게 머무르는 곳 주위를 빙빙 돌기까지 했다. 올 테면 와보라는 듯이.

개새끼 주제에,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나 바라는 대로 싸워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지쳤고, 놈은 쌩쌩했다. 게다가 저 자리로 오라고 하는 걸 보면 무언가 속셈이 있을 터.

그 유치한 도발에 응해줄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놈은 데렉 교수님이 도착하면 꼬리를 말고 도망치거나, 이 공터의 시체 중 하나가 될 신세였으니까.

하지만 은은한 약 냄새가 코끝을 스쳤을 때.

나는 멈칫했다. 어디선가 맡아본 적이 있던 냄새였다. 그토록 짙고 오래 가는 향기는 얼마 없었다.

이 지독한 피비린내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냄새였다. 내 몸이 홀린 듯이 일으켜졌다.

그리고 저벅저벅 걸어 놈이 기다리고 있는 공터를 향해 걸었다. 이 냄새는, 분명 공방에서 나는 냄새였다.

연금술사의 공방에서, 종일 지내는 학생만이 이러한 냄새를 풍겼다.

내 걸음이 우뚝 멎은 것은, 공터 사이에 선 거대한 늑대를 발견했을 때였다.

지금껏 상대한 늑대의 크기도 만만찮았지만, 놈은 그보다도 더욱 컸다. 체고만 하더라도 2m를 훌쩍 넘긴 듯 보였다. 올려다보아야만 겨우 시선을 마주할 수 있는 크기.

한낮의 숲은 고요했다. 내리쬐는 햇살이 잎사귀를 투과하며 그 거체를 비추었다. 그 무시무시한 괴물 앞에서 나는 한낱 난쟁이에 불과해 보였다.

그러나 내 말문이 막힌 것은, 그 크기에 압도당했거나 해서가 아니었다.

그 늑대가 물고 있는, 자그마한 천 쪼가리.

피가 묻어 있는 그 천은, 그날 엠마가 입고 있던 옷의 한 조각이었다.

놈은 비웃듯이 그 천 쪼가리를 퉤, 하고 뱉어냈다. 그리고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과시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온갖 동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모두가 배가 갈려 창자를 쏟고 있다는 점일까.

배고파서 한 짓이 아니었다. 단지, 즐겁기 위해서.

마수란 그러한 존재다. 외부 생명체에 대한 끝없는 악의로 들끓는 존재들.

나는 큭,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자그마한 웃음소리는, 곧 숲을 쩌렁쩌렁 울렸다.

푸흐흐, 하하하, 큭큭큭.

터트릴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웃음을 터트린 듯했다. 그 웃음이 가까스로 잦아든 것은,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후.

뇌가 열기로 익어버리는 느낌. 가슴이 고동쳐서, 심장과 함께 뇌가 박동했다.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그때까지도 놈은 인내심 있게 나를 기다려 주었다. 오히려 기대까지 된다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꺼이 놈이 바라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턱, 하고 검극이 그를 향했다. 내 목을 긁고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야.”

히죽, 놈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넌, 오늘 내 손에 뒤진다.”

반드시.

그제야 늑대는 느긋한 발걸음을 옮기며, 나를 관찰하듯 훑어보았다.

먹잇감을 노리는 사냥꾼의 눈, 그러나 오늘의 사냥감은 놈이 되리라.

내 눈이 스산한 빛으로 가라앉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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