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0화 (20/649)

〈 20화 〉 1. 첫 번째 편지(20)

* * *

숲의 자그마한 공터, 듬성듬성 난 나무들 사이로 인간과 짐승이 원을 그렸다. 팽팽히 당겨진 침묵과 함께 시선이 교차했다.

사내는 검을 들고 있었으나 짐승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체고만 2m를 훌쩍 넘는 그 거체가 이미 하나의 흉기였으므로 그럴 필요도 없었다.

말없이 늑대를 응시하는 사내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로 보였다.

곳곳에 묻은 진흙과 말라붙은 핏물, 팔뚝에 감겨진 무명천은 더렵혀진 지 오래였다. 그리고 단지 걷는 것만으로 거칠어지는 숨과 잠깐씩 초점이 풀리는 눈동자.

당장 쓰러진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짐승은 이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희한할 정도로 기척이 희미한 인간이었다. 숨소리도, 심장박동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지금처럼 거친 숨소리와 날뛰는 심장 박동을 느끼지 못했다면 살아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늑대의 부하들은 모조리 이 사내에게 당했다. 하나씩 각개격파를 당하기도 했으며, 두셋씩 몰려가도 이 사내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인간 중에서도 강한 편에 속할 터였다. 지금껏 사냥해 온 먹잇감 중에서는 최고의 실력자였다.

그가 창자를 쏟아내고 널브러진 모습은 꽤 근사하리라.

짐승 주제에 예술가적 기질을 물려받은 늑대는, 그것만으로 꽤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그의 숨결이 조금쯤 흐트러졌다.

반면에 사내는 시종일관 침착함을 유지했다. 최소한 겉으로는 그랬다. 그의 속은 달구어질 대로 달구어져 문드러질 지경이었다.

잠시 이성을 잃었다. 사내, 그러니까 이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근육은 이미 한계를 맞이했는지, 힘을 줄 때마다 비명을 내질렀다. 뻣뻣해진 움직임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짐승은 최소한 지금껏 상대했던 적과는 격이 달라 보였다. 우두머리쯤 되는 존재겠지, 그 체급뿐만 아니라 지능 또한 우월해 보였다.

그래서 신중히 접근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가 지금까지 시체로 만들어 온 마수들은 그러지 못했다.

무작정 적의로 불타 달려들거나, 그를 눈치 채지 못해 기습을 당해 죽거나.

실수하면 죽는다. 살얼음판 위를 걷듯 이안의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워졌다.

실수를 하지 않아도 죽을지도 모르는 상대였다. 만약 잠깐이라도 방심했다간, 그야말로 앗 하는 순간에 죽음을 맞이할지도 몰랐다.

엠마의 원수가 눈앞이었다. 친구로서 그 복수를 해주지는 못할망정 저승에서 우울한 재회를 나눌 수는 없었다.

이안의 금빛 눈동자가 늑대의 움직임을 낱낱이 훑었다.

‘낌새’를 눈치 채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느긋한 걸음걸이로 걷고 있지만, 상대는 짐승이었다. 아무리 인내심이 뛰어나도 타고난 야성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곧 인내의 한계가 찾아올 테고, 그렇다면 근육의 움직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 찰나의 시간이 기회였다. 이안의 몸은 빈말로도 장기전을 고려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빈틈을 찔러 단숨에 끝장을 내야 했다.

그렇게 이안과 늑대의 신경전이 얼마쯤.

늑대의 근육이 꿈틀댔다. 이안의 눈앞에 가상의 궤적이 그려졌다.

지금이다. 이안이 그렇게 생각하고 몸을 비튼 순간.

퍽, 하고 그의 몸에 둔탁한 충격이 전해졌다.

포탄에라도 맞은 느낌이었다. 아니, 그 무시무시한 체중에 잔상조차 보이지 않는 가속도였다. 포탄 그 자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커, 억……!”

그의 눈이 저절로 부릅떠지며, 입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몸이 멋대로 날아가 나무 기둥에 처박혔다.

쿵, 난데없이 성인 남성 하나분의 질량에 얻어맞은 나무는 파스스 몸을 떨며 거칠게 흔들렸다. 그와 함께 사내의 시야도 거칠게 흔들렸다.

끄으으, 이안은 신음을 흘리면서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몸 마디마디가 쑤셨다. 마력으로 신체를 보호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마지막에,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보이기는 보였다. 마치 잔상처럼. 그래서 이안은 몸이라도 비틀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그 돌진을 피해내기에, 이안의 몸은 너무 지쳐 있었다.

감각은 터무니없이 예리했다. 이안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다시 배운 느낌이었다. 이토록 세계가 오밀조밀하고, 또 다양한 신호를 보내오고 있다니.

지난번 세리아와 대련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날카로워진 감각이었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몸은 뇌의 명령을 곧바로 수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격을 허용했다. 지금과 같은 몸 상태에 이는 치명적이었다.

당연히, 늑대는 사내가 숨을 고를 시간을 주지 않았다.

워낙 급속도로 뛰쳐나간 탓인지 제동에도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 반탄력을 디딤돌 삼아 늑대는 또 다시 고속으로 달려들었다.

늑대의 아가리가 쩍, 벌어졌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들고 있던 검에 마력을 담았다.

그리고 훅, 하고 던진다. 뇌를 거치지 않은, 척수반사와도 같은 반응속도였다.

매서운 속도로 회전하는 칼날이 그 기세 그대로 늑대의 아가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늑대의 가속도에 칼날이 날아가는 속력이 더해지자, 늑대의 아가리는 이안에게 채 닿지조차 못했다.

당황한 늑대는 콱, 하고 이를 악물어 가까스로 칼날을 제지했다. 그러나 마력이 담긴 칼날은 그 무시무시한 치악력에도 반항하듯 이빨을 긁으며 진격을 계속했다.

으드드드득, 소름이 돋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치아 가루가 흩날렸다. 이안이 허리춤에서 손도끼를 뽑아든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의 손도끼가 눈앞까지 다가온 늑대의 콧등을 내려찍었다. 콱, 하고 새카만 늑대의 주둥이에서 핏물이 튀었다.

그대로 늑대의 머리가 땅바닥에 처박혔다면 좋겠지만, 늑대의 근력은 지금껏 상대했던 늑대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이 강인했다.

단지 짐승은 난데없는 격통에 울부짖으며 뒷걸음질 쳤을 뿐이었다.

벌려진 아가리 사이에서 검이 떨어졌다. 이안은 곧바로 손도끼를 들고 늑대의 품으로 뛰어들었으나 늑대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카각, 하고 손도끼와 발톱이 맞물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늑대가 본능적으로 앞발을 휘둘러 이안의 쇄도를 막은 탓이었다.

늑대는 그 자리에서 공중으로 뛰어올라 한 바퀴를 돌았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백 덤블링, 저 개새끼를 잡아 서커스장에 팔면 값이 꽤 나올 텐데.

이안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재빨리 땅에 떨어진 검을 챙겼다. 어차피 거리가 벌려진 이상 추가타는 불가능했다.

1승 1패.

늑대는 몸을 굽힌 채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 콧잔등에서는 피가 줄줄 새고 있었다. 늑대의 헝클어진 숨결을 타고 코에서 피거품이 일었다.

그 광경을 보고, 이안은 조롱하듯 입술을 말아 올렸다.

“허억, 큭큭… 허억, 아프냐?”

늑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이전보다 더욱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목울대를 긁었을 뿐이었다.

이안도 ‘내가 더 아파, 이 새끼야!’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숨이 가빠서 그러지는 못했다.

다만 흐릿한 미소를 지으면서 헐떡였을 뿐이었다.

폐부가 꾹 조이는 느낌이었다. 그 질주에 얻어맞은 통증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마지막에 몸을 비틀어 충격을 흘려내고, 마력으로 몸을 보호했음에도 그랬다.

팔에서는 뼈를 긁는 듯한 날것의 통증이 느껴졌다. 최소한 뼈에 금이 갔다는 뜻이었다. 알싸한 고통이 느껴졌다. 이안의 팔이 절로 덜덜 떨렸다.

불리해졌다. 이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지 않아도 약해진 완력이었다. 싸우는 와중 오러의 밀집도가 점점 더 올라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못했다면 가죽조차 뚫지 못했을 터였다.

사실 손도끼도 코처럼 말랑한 부위가 타격점이라 틀어박혔던 거지, 두꺼운 가죽이 상대였다면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유리해진 점도 있다.

늑대의 눈동자에서는 여전히 적의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으나, 숨길 수 없는 당혹감과 공포 또한 묻어나오고 있었다.

끝장을 내려고 아가리를 벌렸는데, 오히려 그 선택이 제 목숨을 위협할지는 몰랐던 듯했다. 이제 놈은 어지간해선 그 날카로운 이빨을 자랑하지 못할 터였다.

툭 튀어나온 주둥이가 증명하듯, 대다수 맹수들이 가진 가장 치명적인 무기는 이빨과 이를 박아 넣는 치악력이었다. 다시 말해 늑대는 주된 무기 중 하나를 봉인당한 셈이었다.

이만하면 감수할 만하다. 유일한 문제는, 이안의 체력은 한계에 도달한 지 오래고 늑대는 상처 하나를 입었을 뿐이라는 점이었다.

영리한 놈이었다. 부상으로 기세가 한 풀 꺾인 이상, 이를 이용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안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늑대가 땅을 박찼다. 처음에 보여주었던 그 무시무시한 속력의 몸통박치기였다. 이안은 반격을 포기하고 낌새가 보이자마자 몸을 내던졌다.

이안의 몸이 땅을 굴렀다. 그리고 후속타를 대비해서 검을 쥐고 몸을 급히 일으킨 그때.

이안은 다시 그와 거리를 두고, 그를 노려보는 늑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비열한, 허억… 새끼.”

사내는 입에 고인 핏물을 퉤 내뱉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늑대의 속셈은 뻔했다.

지구전으로 가자는 뜻이었다. 그러다 보면 누가 먼저 지쳐 떨어질지는 명백했다.

속력은 늑대가 우위였다. 선공을 가하고 싶어도 늑대가 그 특유의 기동력을 앞세운다면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원거리에서 공격할 수단도 마땅치 않았다.

무기를 투척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였지만, 위험도가 너무 높았다. 무기를 회수하지 못하면 끝장이었다.

애초에 단 한 번도 연습한 적 없던 투척이 왜 이리 능숙한지는, 이안조차 알 수 없었지만.

늑대는 이안에게 생각할 시간을 오래 주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돌진.

이안의 몸이 땅을 굴렀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면서, 조금 지체되는 기색을 보이는 순간.

팍, 하고 어느새 다가온 늑대의 발톱이 땅에 박혔다. 이안이 마지막 순간에 몸을 굴리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그의 몸에 박혔을 발톱이었다.

검을 들어 응수하려고 했으나, 땅을 구르는 자세에서는 제대로 된 위력이 나오지 않았다. 검에 마력이 채 맺히기도 전에 늑대는 뒷걸음질을 쳤다.

오러, 검에 마력을 덧씌울 시간이 필요했다. 이안은 이를 악물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몇 번의 공방이 오갔다.

몇 번은 땅을 굴러 피했고, 몇 번은 검을 들어 발톱을 막아냈다. 늑대는 절대로 서두르지 않았다.

사냥꾼이 사냥감을 몰아세우듯, 늑대는 사정없이 이안을 몰아쳤다.

그럴수록 이안의 숨결이 점점 더 가빠졌다.

산소가 뇌에 제대로 도달하지 못해 정신이 몽롱했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늘 서늘한 빛을 머금고 있던 눈의 초점이 풀렸다.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근육은 납처럼 굳어 본능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 늑대는 그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꼈다.

사냥의 흥분이 마수의 뇌를 달구었다. 쾌락물질이 분비되며 눈에 핏발이 서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짐승은 직감적으로 눈치 채고 있었다. 또 한 번의 일격을 허용한 순간, 저 사내는 끝장이라는 사실을.

그의 몸에 생채기를 낸 상대였다. 칼날이 벌린 아가리 사이로 들어왔을 때, 늑대는 생전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그것이 늑대의 흥분과 경계심을 동시에 자극했다.

얼른 저 인간을 죽이고, 제 강함을 증명하고 싶다. 늑대의 본능이 꿈틀거리며 당장이라도 저 인간을 물어죽이라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러나 늑대는 인내했다. 그 결실이 곧 드러나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늑대의 판단이 옳았다는 건, 곧 드러났다.

지칠 대로 지친 늑대의 돌진을 기어코 피해내지 못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아니.

사실 ‘날았다’라는 표현보다는, ‘쏘아졌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늑대의 거체가 맹속으로 쏘아진 순간 그 운동량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것에 직격당한 것이다.

쿵, 하고 다시 나무 기둥에 처박힌 사내의 몸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마지막까지 움켜쥔 검 손잡이가 처량해 보였다. 나무들이 그 충격파에 부산을 떨며 나뭇잎을 떨어트렸다.

희미하게 느껴지던 사내의 숨결이 잦아들었다. 심장 박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명백한 죽음의 신호.

늑대의 심장이 고동쳤다. 드디어 승리한 것인가?

그러나 짐승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신중했다. 혹시 그것이 함정이라도 될까 두렵다는 듯, 몸을 수그린 채 짐승은 그 주위를 뱅뱅 돌았다.

그럼에도 사내의 호흡이 다시 느껴지는 일은 없었다. 심장 박동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제 늑대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해 있었다.

늑대는 성큼성큼 걸어, 제가 만든 시체를 감상했다. 아름다웠다.

황홀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고 있던 늑대는, 조심스레 제 날카로운 발톱을 꺼냈다. 그 내용물이 조금이라도 다칠까 두려워하는 예술가처럼.

이 발톱으로 배를 그으면, 창자가 주르륵 흘러나오겠지.

충격이 누적되었을 테니 내장이 터져 있을지도 몰랐다. 그 점은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늑대가 지금껏 얻은 전리품 중에서는 최고의 물건이었다.

그렇게 늑대가 발톱을 들어, 세심하게 배에 가져다 대려는 순간.

푹, 하고.

날붙이가 파고드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발톱을 가져다 대진 않았을 텐데, 어째서.

늑대의 의아한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그곳에는, 차가운 미소를 지은 사내가.

“……짜잔.”

어느새 짙은 마력이 맺힌 검으로, 그의 목을 찌르고 있었다.

늑대의 사고가 정지했다. 죽었을 텐데, 몇 번이고 확인했다. 호흡도 심장 박동도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동조차 없지 않았는가.

그러나 목에서 느껴지는 불에 댄 듯한 통증이, 숨을 헐떡여도 폐부에 들어서지 않는 공기가, 그리고 점차 말을 듣지 않는 몸뚱아리가.

지금 그가 보는 광경이 현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늑대의 새까만 눈동자가, 멍하니 사내와 제 목을 꿰뚫은 칼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내는 미소를 머금은 그대로, 이를 악물어 검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사실 살아있지롱.”

그리고 푸욱, 하고 조금 더 늑대의 목덜미를 파고드는 칼날.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내렸다. 그제야 짐승은 뒤늦게 울부짖었다. 숲을 쩌렁쩌렁 울리는, 그 체급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성량이었다.

죽어가는 짐승의, 사냥꾼에게 당한 사냥감의 처량한 비명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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