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2화 (22/649)

〈 22화 〉 1. 첫 번째 편지(22)

* * *

정신을 차리니 신전이었다.

데렉 교수님께 인사를 건넨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는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기절한 모양이었다.

언제 정신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이긴 했다. 실제로 데렉 교수님이 오기 전에 이미 한 번 혼절했다가, 가까스로 눈을 뜨지 않았던가.

출혈량이 많지는 않았지만, 몸이 만신창이였다. 아프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최소한 중상, 그쯤 되면 정신줄을 억지로라도 붙잡고 있지 않으면 위험했다.

그래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내가 쓰러트린 늑대의 사체를 베고 누웠다. 털이 풍성하니 푹신해서 좋았다. 온기도 적당히 남아 있어 잠이 솔솔 오던 차였다.

그때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데렉 교수님이 도착한 것은. 그리고 그 외에도 수많은 학우들.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던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만 것이다.

눈을 뜨자 머리가 아파왔다. 아카데미를 다니며 지금껏 신전의 집중치료실에 신세를 진 적이 없었는데, 근래 들어서만 두 번째로 오게 되다니.

나는 새하얀 천장을 보며, 언젠가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대사를 읊었다.

“……낯선 천장이다.”

“낯설기는 개뿔, 너 얼마 전에도 온 곳이잖아.”

곧바로 내뱉어지는 폭언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아직 망막이 빛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상대는 흐릿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누구인지는 알 수 있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보아 온 사이였으니까.

“레토, 미안하지만 난 환자야… 스트레스 받지 않게끔 유의해 줄래?”

그러면서 나는 일부러 참고 있던 신음을 끙끙거리며 흘렸다. 침대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레토는, 혀를 끌끌 차면서 소리 나도록 책을 덮었다.

그의 녹빛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한심하다는 눈이었다.

“글쎄, 여자 앞에서 폼 좀 잡아보겠다고 목숨을 건 놈이니 환자는 맞는 것 같은데… 대신 몸보다는, 아무래도 머리 쪽이.”

“아니, 그럼 어떡해? 그대로 죽게 놔둬?”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아직 가시지 않은 두통을 진정시키며, 그렇게 항변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 아닌가.

그때 세리아는 기동성을 잃은 상황이었다. 발목이 다쳤으니, 모르긴 몰라도 전력의 반절을 잃었다고 보아도 좋았다. 또 결과론적인 이야기긴 하지만, 상대는 기동성이 특히 우월한 네 발 달린 짐승.

내가 남는 편이 더 나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세리아는 1시간을 채 버티지 못했을 터였다. 아무리 2학년 수석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내 항변에도 레토는 혀를 쯧쯧 찰 뿐이었다. 그의 눈동자에 어린 한심하다는 기색이 더욱 짙어졌다.

“바보냐? 너 그때 엠마가 준 물약 가지고 있었다며. 그거 세리아한테 먹이고 어디 나무 위에 얹어둔 다음에 네가 달리면 됐잖아.”

“아.”

나는 레토의 말에 비로소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고 보면 그랬다. 기척을 지우는 물약은 굳이 내가 아니라도 누구에게나 효과가 있었다. 혹시 세리아한테 물약을 먹이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그대로 계속 내달리면 그만이고, 세리아는 기척이 지워질 테니 자연스레 내가 미끼 역할도 수행할 수 있다.

목숨을 걸 필요도 없고, 성공 확률도 더 높은 작전이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나는 감탄을 담아 레토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젓고 있었다. 한숨 섞인 목소리는 덤이었다.

“이래서 몸만 쓰는 검술학부 놈들은 안 돼… 응? 앞으로 너랑 셀린은 뭐든 하기 전에 꼭 나한테 묻고 해라.”

“……아니, 그때는 워낙 갑작스러운 상황이라서 생각을 못했지.”

“어련하시겠어? 덕분에 셀린은 어제까지도 펑펑 울다가 지쳐서 숙소로 가셨댄다.”

레토의 비꼬는 어조에도 나는 할 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중상을 입고 막 정신을 차렸는데 너무하지 않나 싶다가도, 레토의 말은 늘 핵심을 짚는 면이 있었다.

그때 워낙 당황했던 탓인지 최선의 선택지를 고르지 못했다. 지금은 내가 살아있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내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끔찍한 경험을 하나 선사할 뻔했다.

더불어 세리아도 한동안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폐를 끼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당장 레토만 하더라도 내 병상을 지키고 있지 않은가. 셀린도 어제 종일 내 옆에 붙어있었다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끄응, 하고 신음을 흘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항복이라는 뜻이었다.

“그래, 내 잘못이다… 매일 검만 휘두르는 빡대가리라 생각을 못했다, 됐냐?”

그러자 레토는 훗, 하고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우쭐한 얼굴을 했다. 언제 봐도 주먹으로 한 대 치고 싶은 얼굴이었다.

지금은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어서 그러지 못하지만,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깨달으셨다니 다행이야… 그리고, 뭐. 칭찬해 줄게.”

“……칭찬?”

정신을 차린 후 한결같이 타박만 하던 레토치고는 꽤 느닷없는 소리였다. 칭찬이라니, 내가 칭찬받을 일도 있던가?

내 의아한 시선이 그를 향하자, 레토는 큭큭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무언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겨났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그 ‘유르디나의 싸가지’ 말이야, 아주 뻑 갔던데?”

“그게 무슨 소리… 아, 그러고 보니 세리아는 잘 지내고?”

레토의 근거 없는 소리의 근거를 캐물으려던 나는, 문득 세리아에 생각이 미쳐 그렇게 물었다.

평생 검의 재능만으로 누군가에게 뒤쳐져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이복언니이자 유르디나 가문의 적통에게 강한 열등감을 품고 있는 듯 보였지만, 오히려 그 탓인지 더더욱 패배를 인정하기 두려워했다.

혹시 나를 두고 도망쳐야 했던 그날의 일이 그녀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을까 우려스러웠다. 어쩌다 저지른 실수에 불과한 일인데 말이다.

그러나 레토는 내 질문에 곧바로 답하는 대신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잘 지낸다고 해야 할지, 못 지낸다고 해야 할지…….”

“뜸 들이지 말고.”

내 목소리에서 슬슬 옅은 짜증이 묻어나오자, 레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신전 앞에서 애타는 얼굴로 발만 동동 구르고 계시긴 하던데, 어제도 보이더니, 오늘도 보이고… 듣기로는 하루 열두 번씩은 그런다고.”

그 말에 내 손이 저절로 이마에 얹어졌다. 머리가 아팠다. 그 사회성 떨어지는 아가씨가 병문안을 와도 되는지 망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면 될 것이지, 친구 사이에 그게 얼마나 별일이라고.

나는 조금 원망스럽다는 눈으로 레토를 바라보았다. 그가 보았다면, 들어오라고 하면 그만이었을 텐데.

“아니, 들어오라고 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네가 아직 여심을 모른다는 거야.”

그러나 레토는 내 불만을 그렇게 일축했다. 쯧, 하고 혀를 한 번 차주는 건 덤이었다.

“그 ‘유르디나의 싸가지’가 그렇게 애절한 눈을 하고 있었다니깐? 애가 닳겠지, 그 얼음 동상 같은 아가씨도 여자는 여자니까. 자신을 지키려다 중상을 입고 쓰러진 선배… 그리고 그는 온몸을 바쳐 마수들을 쓰러트리고…….”

“……너무 과장하는 거 아니야?”

“원래 여자들은 사소한 일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어. 특히 얼굴 좀 반반한 남자랑 있었던 일이라면 더더욱.”

아닌 것 같은데, 내 미심쩍은 시선이 레토를 향했으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이어갔다. 마치 스스로가 돌 맞는 예언자라도 되는 양 당당한 태도였다.

“아무튼 새겨들어야 할 점은, 이 감정의 줄다리기가 앞으로의 주도권을 설정하는 데 무척 중요하다는 거야. 애가 닳을 대로 닳았을 때 슬쩍 얼굴을 비춰주고, 잊을 만하다 싶을 때 또 말 한 번 걸어주고… 알겠어?”

레토는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려준다는 듯 그렇게 말했으나, 내 반응은 시들했다. 오히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부정적인 반응마저 보였다.

나는 실망했다는 눈빛으로 레토를 바라보았다. 내 입에서 한숨과 함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그냥 바람둥이잖아.”

“아니, 이 새끼가 언제는 여자 꼬시는 법 알려달라더니……!”

레토는 울컥한 듯 보였지만, 곧 포기했다는 듯 힘을 탁 풀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는 ‘그럼 그렇지’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답지 않게 조금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내 의문을 담은 시선이 그를 향했다.

레토는 고민하듯 침음을 삼키다가, 결국 결심이 섰는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안.”

“왜 그래, 또. 그렇게 폼을 다 잡고…….”

갑작스러운 분위기 변화에 나 또한 얼떨떨한 반응을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레토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보니, 이내 레토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가 조금 진지해진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너 말이야, 요즘 셀린한테 잘해 주고 있냐?”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별 것 아닌 문제라 생각하고 헛웃음을 머금었다.

개와 고양이처럼 굴던 둘이었다. 친남매나 다름없이 자라왔다고 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던 그가 셀린의 이야기를 먼저 꺼내다니.

드문 일이었다. 나는 별다른 고민조차 없이 답했다.

“잘해 주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평소대로 지내는 거지.”

“잘해 주는 편이 좋을 거다.”

그러나 내 담백한 반응과는 달리, 레토는 더욱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조언했다.

“여자들의 세계는, 네 생각보다 훨씬 더 음습하거든. 앞으로도 그 유르디나의 싸가지와 친하게 지낼 생각이라면, 셀린도 신경 쓰는 편이 좋을 거야.”

“……?”

평소에도 레토는 알쏭달쏭한 말을 하긴 했지만, 이것만큼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셀린과 세리아가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러나 레토의 안색을 살피니 더 캐물어 봐야 자세한 사정을 말해주지 않을 듯했고,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진지했기 때문에 나는.

“어, 어… 그러지, 뭐.”

그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레토가 내게 해가 되는 말을 해줄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그때 그 말을 조금 더 새겨들었어야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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