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1. 첫 번째 편지(23)
* * *
셀린이 찾아온 건 그날 밤이었다.
종일 기숙사에 혼절하듯 잠들어 있다가,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후다닥 뛰어온 모양이었다. 옷매무새가 허술했다.
나는 슬쩍 비치는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에 자연스레 시선이 가려다가, 이내 헛기침을 하고 눈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내겐 여동생 같은 아이였다. 나쁜 마음을 품어선 안 되지, 그랬다간 레토도 셀린도 내게 실망할 터였다.
그러나 그러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셀린은 상반신을 일으킨 나를 보고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녀는 곧 달음박질을 치더니, 그대로 내 품에 몸을 던지듯 안겼다. 나는 얼떨결에 셀린의 아담한 몸을 끌어안게 되었다.
컥, 하고 비명이 새어나올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셀린의 신체능력은 나 이상이었다. 일단 마력량이 더 많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한 그녀가 전력으로 내달려 품에 안겼으니, 그러지 않아도 아프던 몸이 더욱 삐걱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훌쩍이며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는 셀린을 보니, 차마 그녀를 탓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단지 그녀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울음을 그칠 때까지 달래주었을 뿐.
“흐흑, 이, 이안 오빠아. 흐어엉…….”
“그래, 그래. 많이 놀랐지… 나 괜찮아.”
셀린도 참 엄살이 심했다. 아카데미에서는 대부분의 부상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부지 내의 신전에 성국에서 파견된 고위 사제가 항시 대기하고 있고, 3학년에는 무려 성녀가 재학 중인 곳이었다.
어지간한 중상도 적절한 시기에 치료에 들어간다면 후유증조차 남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 나만 하더라도 온갖 부상을 달고 들어왔는데, 별다른 후유증도 없이 의식을 되찾지 않았는가.
그러나 셀린의 마음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내 마지막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녀가 가장 먼저 나를 발견했었다.
애초에 내 흔적을 따라왔다면 늑대의 시체가 즐비한 공터도 보았을 터였다. 그 피투성이의 광경, 그 안에서 처절한 싸움이 있었으리란 사실은 너무나 명료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가 목도한, 만신창이가 된 내 몸.
세리아와의 대련은 우스운 수준이다. 마지막에 겨루었던, 그 놈과의 결투는 생사를 건 혈투였다. 양보도 없고 규칙도 없었다.
핏물이 튀기고 뼈가 아작났다. 근육이 망가지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호흡이 가빠와도 멈출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한 싸움을 거친 내 몰골이 어땠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 날것의 광경을 셀린이 목격한 것이다. 오랜 시간 함께 했던 그녀와 내 인연을 생각하면, 셀린이 충격을 받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였다.
다만 레토에 비하자면 조금 과한 반응이 아닐까 싶긴 했지만,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평소에 활달한 만큼 은근히 여린 감수성을 가진 그녀였다. 충격이 유독 클 수도 있었다.
그녀의 흐느낌이 잦아들 때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의 눈물로 내 앞섬이 흠뻑 젖은 뒤에야 그녀의 고개가 서서히 들려졌다.
물기 어린 황갈빛 눈동자와, 평생 검사의 길을 걸어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희고 보드라운 피부. 그 매력적인 입술이 달싹여지자, 지금껏 눈치 채지 못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기억이 났다. 예전에 칭찬해 주었던, 그 향기였다. 그토록 서둘러 나왔음에도 그 향기만큼은 여전했다.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셀린도 어여쁜 여인이었다. 그럴 만도 했지만, 나는 애써 가슴속에 흥건히 달라붙는 애욕의 감정을 털어냈다.
셀린은, 애처롭게 중얼거렸다.
“이안 오빠… 많이 걱정했잖아.”
약간의 원망이 담긴, 그러한 목소리. 이처럼 아리따운 소꿉친구에게 걱정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피식, 하고 웃었다.
“내가 죽인다고 죽을 놈이야?”
“응, 죽지.”
그건 그래, 나는 곧바로 할 말이 없어져서 입을 다물었다. 셀린의 눈이 샐쭉해졌다.
“왜 그렇게 위험한 일만 골라하는 거야? 그 년이 죽든 말든 오빠만 살면 됐잖아!”
“어떻게 그러냐, 우리는 모두 황제 폐하의 충실한 신민인데.”
“그런 원론적인 이야기 말고!”
딱히 할 말이 없어 대충 아무 말이나 읊었는데, 오히려 그것이 셀린을 더욱 분개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지며 나를 흘겨보았다. 그녀의 입이 삐쭉 튀어나왔다.
그래봐야 아직 눈물 자국이 남아있어 귀여울 따름이었다. 셀린이 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절절이 느껴졌다.
“……나한테는, 이안 오빠가 제일 소중해.”
투덜거리듯이, 셀린은 그렇게 고백했다. 그녀도 부끄러움을 참고 있는지 볼이 살짝 붉어졌다.
두근, 하고 가슴이 한 번 뛰었다. 오늘따라 셀린이 왜 이리 예뻐 보이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그러나 혼란스러운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셀린은 조심스레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투명한 수심을 떠올리게끔 하는, 맑은 눈동자였다.
“그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어릴 때부터 그랬으니까.”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의 두 손이 제 눈가의 눈물을 닦아내던 내 손을 쥐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더욱 애절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이안 오빠도 스스로를 소중히 해줬으면 좋겠어.”
나는 그 절절한 감정으로 떨리는 목소리에, 함부로 답하지 못하고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병상에는 단 둘뿐이었다. 치료실은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곳이었다. 다시 말해 지금 이 공간에는, 나와 셀린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적령기의 두 남녀가 밀폐된 공간에 단 둘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밤, 이성이 저물고 감성이 발달하는 시간.
가슴이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이는 셀린도 다르지 않은지, 그녀는 묘하게 색정적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이안 오빠…….”
그녀의 달콤한 숨결이, 점차 다가온다. 아주 서서히, 그래서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이래서는, 안 되는데.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욕망에 정직한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와 내 숨결이 겹칠 듯 가까워진 그 순간.
“……얼씨구.”
“흐, 흐햐앗?!”
어처구니없다는 듯 뱉어진 한 사내의 목소리에, 셀린의 몸이 경련하듯 펄쩍 뛰었다. 그녀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내 품에서 내렸다. 그녀의 시선이 다급히 주위를 훑었다.
그 목소리의 진원지는, 병실의 입구에 삐딱하게 기댄 채로 나와 셀린이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유독 떨떠름했다.
레토 아인스턴, 셀린에겐 친오빠나 다름없었고 내게는 가장 절친한 친구 중 하나였다.
“무, 무, 뭐하는 짓이야!”
“뭐하는 짓이긴? 여동생이랑 제일 친한 친구 둘이서 거사를 치르기 직전인데, 그래도 내가 참관하고 있다는 사실쯤은 말해줘야 할 것 같아서.”
“아, 아니이…….”
레토가 좋은 놀림감을 발견했다는 듯 끈덕지게 셀린을 추궁하자, 셀린의 눈이 핑핑 돌기 시작했다. 그녀의 두 손이 무어라 부정하고 싶은 듯 허공을 허우적댔다.
그녀의 얼굴은 새빨개진 지 오래였다. 나도 괜히 부끄러워져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잠깐 분위기에 취했다. 셀린과 나는 그런 사이도 아닌데, 큰일 날 뻔했다.
레토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들고 있던 책으로 셀린의 머리를 콩, 하고 내리찍었다.
“아, 아얏!”
“그런 건 정식으로 고백하고 나서 해라, 응? 내가 누누이 말했지. 진도부터 뺀 연인은 오래 못 간다고.”
“……그, 그래도.”
셀린은 레토의 타박에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 나름대로는 억울한 점이 있는 듯했지만, 레토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자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셀린 다음은 나였다. 레토는 혀를 쯧쯧 차면서 말했다.
“너도, 인마… 분위기 탄다고 그래도 돼? 셀린을 책임질 생각은 확실히 있고? 아니면, 셀린이 그렇게 만만해?”
“아니, 아니. 셀린도 나도 그럴 의도가 없었다니깐? 그냥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서 그렇지…….”
나는 그렇게 변명하면서도 슬쩍 시선을 내리깔아야 했다.
레토는 셀린의 오빠였다. 말하자면, 셀린에게 무언가 저지르면 내가 가장 무서워해야 하는 상대였다.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머리가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뭐지, 지금껏 셀린이랑 단 둘이 있었던 적은 많았지만 이처럼 묘한 분위기를 풍겼던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애초에 내가 사전에 그럴 상황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그러한 상황이 당연하다는 듯 느껴졌다.
지난번에 기억을 잃은 이후, 내 삶은 수수께끼투성이가 되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변해 버렸는지 까닭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앞으로는 조금 더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셀린은 그 외모만으로도 유력 귀족 가문과 혼약을 맺을 수 있는 여자였다. 그 혼삿길을 소꿉친구가 돼서 막을 수는 없었다.
레토도 꾸중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는지, 흐음, 하고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야, 이안. 그러고 보니 너 술 한 번 사야겠더라.”
“……왜?”
“지난번에 잡은 마수 말이야, 포상금으로 70 골드나 나온댄다.”
그 말에 내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70 골드, 무려 평민 4인 가정이 5년 이상을 넉넉히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거금임은 분명했다. 그만큼이나 내가 쓰러트린 마수가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었단 뜻이리라.
그러나 내가 경악성을 터트리기도 전에, 누군가 레토와 내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말할 것도 없이 셀린이었다.
“치, 칠십 골드?!”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녀도 귀족이긴 했지만, 시골 귀족이 다 그렇듯 그렇게 넉넉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물며 그 비싼 아카데미 학비를 내고 나면, 고작해야 ‘품위유지비’ 정도만 남을 뿐이었다.
그 정도로도 평민의 평균적인 생활수준은 상회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내게도, 레토에게도, 셀린에게도 70 골드가 흔치 않은 거금이란 것은 분명했다.
셀린은 방금 전의 사고는 벌써 잊어버렸다는 듯, 벌써 신이 나서 검지를 든 채 멋대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시내의 식당가에 있는 마수 전문점으로 가자! 거기 드레이크 고기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야, 넌 어떻게 그렇게 입맛 떨어지는 곳만 골라서… 아니지, 술집을 가야지. 밴 아저씨가 새로 연 곳이 있는데 거기 술맛이 그렇게 죽인다더라.”
“아니, 왜애! 마수 고기 맛있다고!”
정작 나는 별 생각도 없는데, 레토와 셀린은 벌써 둘이서 70 골드로 어디를 가야 할지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참 둘다운 짓이었다.
나는 피식, 하고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내가 목숨 걸고 번 돈인데 둘이서 뭐하냐?”
“정확히 말해야지. 목숨을 멋대로 ‘던져서’ 번 돈이지.”
레토가 혀를 쯧쯧 차면서 한 말에, 나는 울컥했다.
아니, 목숨을 던지다니? 그날의 처절한 싸움을 그렇게 폄하해도 좋단 말인가?
나는 열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늘 우리 셋이 모이면 그랬던 것처럼.
“야, 너 그때 상황을 몰라서 그래… 내가, 응? 어지간하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거든? 근데 그 개자식이 입에 물고 있던 천을 퉤, 하고 뱉는데. 그게 엠마의 옷 조각이었다니깐? 그 상황에서 참는 거 가능?”
“어, 가능.”
“응, 씹가능~”
그러나 나의 열변에 돌아오는 반응은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이 의리도 없는 놈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내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일상이었다. 레토의 말이 이어지기 전까지는.
“그래도 그 가장 큰 마수 말이야, 그놈이 덜 자라서 다행이라더라. 조금 더 시간이 있었으면 네임드급이 됐을 거라고, 크으… 이걸 수렵제 때 잡았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입상은 따놓은 당상이잖아.”
“됐어, 어차피 이제 그 정도 크기의 마수는 숲에 없을 텐데… 난, 이안 오빠가 안전한 쪽이 훨씬 좋아.”
쓴웃음을 지으며, 그 말을 듣고 있던 내 사고회로가 일순 정지했다.
그래, 숲에 그 정도 수준의 마수는 더 이상 없어야 했다.
수렵제의 간극은 고작해야 1년 남짓이었다. 그 사이에 그보다 더 강한 마수가 출현할 리가 없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올해 수렵제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죽거나 다칠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더 강한 마수라면, 이름이 붙을 정도라는 소리일 테니까.
흔히 ‘네임드’라고 불리는 마수들은, 그 강인함과 영리함에서 여타의 마수와 비교를 불허했다. 그야말로 ‘인류의 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괴물들.
당연히 그러한 마수들은 그 개체수도 적었다. 출현하는 일도 드물었으므로, 고작해야 1년 사이에 숲에서 탄생한다는 가정 자체가 우스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편지의 내용 중 하나.
‘그러고 보면 아직도 의문이에요. 어떻게 그 괴물의 약점이 뿔이란 걸 알고 있었던 거죠?’
내 입가에 걸린 미소가 서서히 옅어진다.
“……뿔.”
멍하니 뱉어진 내 중얼거림에, 레토와 셀린의 의아하다는 시선이 나를 향했다.
“뿔 말이야, 그 늑대 마수 사체에서 혹시 뿔 조각이 나왔나?”
“무슨 개소리야? 네가 상대했잖아, 기억 안 나? 뿔은커녕 뿔 비스무리한 것도 안 나왔구만… 야, 야, 괜찮냐? 너 지금 안색이 창백한데.”
레토와 셀린이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는 홀로 공간에서 격리된 듯한 부유감을 느껴야 했다.
사고가 부상한다. 그 처절한 싸움을 복기했다. 그토록 강했던 상대였다. 그보다 더 강한 마수가, 숲에서 도사리고 있다고?
내 눈동자가 신전의 벽 너머를 향했다. 아카데미의 남쪽, 고요하기만 한 숲을 향해서.
그곳에서, 괴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매년 인간들이 벌이는 축제에서, 가장 아름다운 핏빛 꽃을 피우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
그리고 다음날, 세리아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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