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4화 (24/649)

〈 24화 〉 1. 첫 번째 편지(24)

* * *

이른 아침, 내 눈이 저절로 뜨였다. 늘 일어나던 시간을 몸이 기억하고 있던 탓이었다.

전날 과음을 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지금부터 세안을 하고 외출할 채비를 했을 터였다. 아침의 일정은 주로 수련과 강의, 검술학부에 재학 중인 대다수 학생들의 일정이기도 했다.

몸이란 일종의 정밀기계와 같다. 매일 아침 적당한 기름칠을 해주지 않으면 필요한 상황에 제때 대응할 수 없었다.

이는 상식이었다. 그래서 새벽녘부터 검을 휘두르는 부지런한 학생까지는 몇 없어도, 아침 식사 전에 얼마쯤 검을 휘두르며 몸을 푸는 학생들은 많았다.

비단 아카데미 재학생뿐만이 아니라 대개의 검사들이 공유하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그 아침 수련을 빼먹은 지는 벌써 며칠이 지났다.

자의에 의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말하자면 나는 수련을 하고 싶었다. 휴식도 하루 이틀이지, 이처럼 며칠에 걸쳐 몸을 움직이지 못하면 찌뿌둥한 느낌이 강해진다.

언제나 가뿐하던 신체가 어느덧 무거워졌다. 그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특히 검사로서는 대단히 불쾌한 감각이었다.

검사는 그 자체로 한 자루의 검이어야 했다. 몸이든, 정신이든 군더더기가 있어서는 안 됐다. 그런데 지금 내 몸은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일어나 일상으로 복귀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그러나 차마 그럴 수 없는 건, 지금 내 몸에 칭칭 감긴 붕대들 때문이었다.

그 깨끗하고 부드러운 천들을 볼 때마다 내가 아직 부상자라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지금이야 새하얗지만, 처음 눈을 떴을 때 보았던 붕대는 난리도 아니었다.

피와 고름이 말라붙어 있던 그 모습. 욱씬거리며 느껴지던 통증보다 그 처참한 광경이 더욱 깊게 뇌리에 틀어박혔다.

성직자들이 신성력을 퍼부으면 상처의 회복속도가 빨라진다. 출혈도 그때 멎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렸을 때까지도 피 고름이 묻어나온다는 건, 그만큼이나 부상의 정도가 극심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내가 죽을 뻔하긴 했구나, 그러한 실감이 들자 내 기세는 그대로 한 풀 꺾이고 말았다.

얌전히 회복에 전념해야 할 때였다. 일상으로 아무리 빨리 돌아가고 싶어도, 몸이 제대로 낫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서둘러 봐야 손해 보는 쪽은 나였다.

그래서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나는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거나, 레토가 건네준 책 몇 권을 뒤적이며 시간을 때우곤 했다.

제목만 보더라도 재미없는 책들이었다. ‘제국사상사’나 ‘사회이론 서설’이라니, 누가 이딴 걸 읽는 거지? 도서관에 볼 때마다 품곤 했던 의문들이 비로소 한 꺼풀 벗겨지는 느낌이었다.

바로 레토 같은 녀석이었다. 내가 이론서를 싫어하는 줄 잘 알면서도 이따위 책만 두고 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악의가 느껴졌다.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 ‘제국사상사’를 열 쪽 남짓 읽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책을 덮어버렸다. 차라리 잠이나 더 자는 편이 이로워 보였다.

그러한 내 일상에 균열이 감지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느닷없이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내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레토나 셀린일까? 그렇지 않으면 내 치료를 전담 중인 신학부의 안드레이 교수님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곧 모습을 드러낸 방문객의 정체는 그 누구도 아니었다.

고고한 빛을 풍기는, 회색 머리카락. 밤하늘의 별을 정성 들여 세공한 듯 심유한 빛을 품은 짙푸른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의 낯빛은 딱딱히 굳어 있었다. 혹자가 보면 불쾌한 표정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알았다. 그것이 그녀가 긴장할 때마다 나오는 표정이라는 걸.

그 증거로 그녀는 병실에 몸을 들이고도 어쩔 줄 모르겠는지 한참을 쭈뼛거리고만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면 친구의 병문안도 처음이겠구나, 나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그녀를 환영해 주었다.

“어서 와, 세리아.”

“네, 네헵. 그, 그간 건강하혔… 으으, 건강하셨어요?”

혀를 씹는 것도 평소대로의 세리아였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고, 나는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큭큭거리며 웃었다.

나는 눈짓으로 침상 옆에 마련된 자리를 권했다. 세리아는 조심스레 그 의자에 앉았다. 내 목소리에 반가움이 깃들었다.

“마침 잘 왔어, 세리아. 그러지 않아도 지루하던 차였거든.”

그러면서 나는 방금 막 덮었던 책을 들고 흔들었다. 표지를 보라는 뜻이었다.

“읽을거리 좀 가져다 달랬더니 이따위 책이나 두고 가더라고, 나쁜 놈들.”

“그, 그렇군요…….”

투덜거리는 내 목소리는 평온하기 그지없었으나, 세리아는 이처럼 자연스러운 대화 자체가 어색한 듯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갈피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낯설고 긴장했다는 뜻이었다. 세리아의 그러한 반응은 예상했던 바였기에, 나는 그대로 대화를 주도하기로 했다.

“그동안 잘 지냈어? 소식 좀 들어보려고 했는데, 통 얼굴을 볼 수 없어서 말이야.”

그렇게 묻는 내 목소리에는 놀리는 기색이 다분했으나, 그에 돌아오는 세리아의 반응이 꽤 극적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두 손을 내저으며 쩔쩔 매기 시작했다.

“그, 그, 그게 아니라… 제, 제가 워낙 큰 실수를 해서, 혹시 이안 선배께서 화가 나지 않으셨을까 하고…….”

말이 이어질수록 세리아는 점점 더 풀이 죽은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과연 지난번의 실수가 그녀의 자존심에 상처를 준 것만큼은 맞는 듯했다.

죄책감이 그녀를 괴롭혔을 터다. 마음의 상처란 언제나 고독 속에서 덧나는 법이니까. 주위에 상담할 사람도 없고, 나와 대화를 나눌 용기도 없었던 세리아는 종일 신전 앞에서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나를 만나러 가도 될지, 혹시나 내가 화를 내진 않을지.

처음으로 얻은 친구였다. 그녀로서는 두려울 만도 했다. 지금도 그녀는 열심히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 서툰 모습에 나는 다시 한 번 큭큭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시무룩해진 채 연신 나를 곁눈질하는 세리아의 모습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느껴졌다.

조금만 살펴도 내가 화나지 않았다는 사실쯤은 금세 알 수 있을 텐데, 워낙 사회성이 떨어지는 세리아다 보니 아직 확신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안심할 수 있도록, 담백한 말을 건넸다.

“화 안 났어, 세리아.”

내 말에 세리아의 안색이 대번에 환해졌다. 그녀가 반색하며 내게 되물었다.

“저, 정말이힌……! 아으… 정말이신가요?!”

그 사이에 또 혀를 씹긴 했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서 나는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세리아는 여전히 조금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붉혔지만 말이다.

“애초에 화를 낼 이유가 어디 있겠어? 널 먼저 보내기로 한 것도 나고, 싸우기로 한 것도 난데. 네 잘못이라고는 내 말 잘 들은 죄밖에 없잖아.”

“그, 그래도 애초에 제가 이안 선배의 조언을 새겨들었다면…….”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에 세리아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나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말을 이어갔다.

“살다보면 누구나 어처구니없는 실수 한두 번쯤은 하는 법이거든. 그럴 때 필요한 게 친구고. 누가 어이없는 짓을 저지르면, 욕하고 싸우면서도 결국 함께 수습하는 거지.”

그래서 의지할 수 있는 친구 몇 명쯤은 두어야 했다. 살다 보면 도무지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생기곤 했으니까.

예를 들어, 내게는 레토와 셀린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 둘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에 나는 늘 감사하곤 했다. 기쁨과 슬픔을 나눌 수 있다는 상대가 있다는 건,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니까.

나는 세리아에게도 그러한 친구가 생기길 바랐다. 굳이 내가 아니라도 좋았다. 단지 그녀가 조급해질 때마다 그녀를 지탱해 줄 사람이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녀는 불안정해 보였으므로. 선배로서 신경 쓰이는 후배에게 걸어볼 만한 기대였다.

“지난번에는 우연히 실수를 저지른 쪽이 너였을 뿐이고, 다음에는 반대로 내가 될 수도 있는 거지.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잘 풀렸잖아?”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나로서는 불만을 가질 이유가 딱히 없었다. 그날 마수들을 상대하면서 꽤 많은 수확을 얻은 덕이었다.

따지고 보면, 포상금으로 나온 70 골드라는 거금조차도 부수입에 불과했다.

마수들과 생사를 건 혈투를 벌이던 그날, 나는 검사로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다.

오러의 사용이나, 감각의 활용, 심지어는 몸놀림까지도 그랬다.

그것은 하나의 직감과도 같았다. 그날 이전의 나와, 그 이후의 나는 검사로서 수준이 다르다는 확신.

자세한 부분은 검을 다시 쥐어 봐야 알 수 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아도 내 혈관 구석구석을 흐르는 마력의 양이 이미 내 성장을 증명하고 있었다.

검사가 거둘 수 있는 성과 중 이보다 훌륭한 소득은 없을 터였다.

물론 그래봐야 세리아에게는 못 미치는 수준이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그날의 싸움이 내게 소중한 기회가 되었음은 분명했다.

그러므로 내가 세리아한테 감사하면 감사했지, 화를 낼 까닭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세리아를 대하는 내 태도가 온화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다만 그러한 속사정을 모르는 세리아는, 내 태도에 꽤 깊은 감명을 받은 듯했다.

그녀는 한동한 멍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녀는 결심했다는 듯,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금화가 담긴 주머니였다.

“저, 이안 선배…….”

“설마 또 ‘대가’는 아니겠지?”

나는 그녀가 무어라 말을 끝맺기도 전에, 미심쩍다는 시선을 보내며 세리아에게 물었다.

내 선공에 당황했는지, 세리아는 고개를 내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아, 아닙니다! 데렉 교수님께 말씀드려서 미리 받아온 포상금이에요. 그, 마수 토벌을 한 대가로… 듣기로 받아야 할 돈은 최대한 빨리 받는 편이 좋다고 하길래.”

그렇다면야, 뭐.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주머니를 받아들고 대략적인 금화의 양을 세 보았다.

주머니가 너무 묵직했다. 얼핏 보아도 금화가 70개는 훌쩍 넘어 보였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다시 주머니를 되돌려 주었다.

“세리아, 금화가 너무 많잖아.”

내 말에 세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설마 눈치 챌 줄은 몰랐다는 듯.

하지만 왜 모르겠는가, 세리아에겐 토벌 포상금이 푼돈에 불과할지 몰라도, 나 같은 시골 자작가의 차남에게는 거금이었다. 금액을 모를 리가 없었다.

“포상금은 70 골드잖아, 그렇지?”

“하, 하지만…….”

세리아는 내 나지막한 목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 나는 인내심 있게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제 목숨을 구해 주셨잖아요.”

흐음, 하고 나는 침음을 삼키며 세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속삭임과 같은 소리였지만, 분명히 들었다. 조금쯤 촉촉해진 목소리.

그 무뚝뚝한 세리아에게서 나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애절한 음색이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보상을 하고 싶었어요. 제 목숨값이 싸구려는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더더욱 받을 수 없는 거야.”

나는 한숨을 내뱉으면서, 그렇게 단언했다. 그리고 세리아가 무어라 반박하기 전에 그녀의 손에 억지로 주머니를 다시 쥐어주었다.

그녀의 손과 내 손이 맞닿자 세리아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멍해졌다.

오늘따라 넋을 많이 놓는 것 같은데, 괜찮은 걸까. 그러나 나는 굳이 그 점을 깊이 신경 쓰지는 않기로 했다.

나는 그녀의 손에 주머니를 쥐어주며,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쌌다. 주머니를 놓아버릴까 염려된 탓이었다.

세리아의 손은, 부드럽고 따스했다. 평생 검을 연마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네 목숨은 싸구려가 아니잖아, 그렇지?”

“……네, 네헷.”

세리아는 내 말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 유순한 반응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고 있었다.

손을 붙잡혀서 수치스러운 듯했다. 그러나 놓아주었다간 멋대로 주머니를 내게 주고 가버릴 수도 있었기에, 나는 잠시만 이 상태를 유지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는 거야. 목숨이란 그 무엇과도 저울에 달 수 없는 거니까… 너는 네 생각 이상으로 소중한 사람이니, 너를 소중히 여겨.”

“소, 소중히…….”

세리아는 붉어진 얼굴로 그렇게 내 말을 되풀이했다. 제대로 듣고 있는 거 맞겠지?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지금의 세리아에게 반항의 기색은 없었으므로 나는 그만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세리아는 아, 하고 안타까운 소리를 흘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그녀는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무엇이 그렇게 부끄러운지 그녀의 얼굴은 귀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피부가 워낙 투명해서 그런지 더욱 티가 났다.

그녀는 잠시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며 침묵을 지키다가, 갑작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 그럼 저는 이만…….”

“벌써 가려고?”

고작해야 대화를 조금 나눴을 뿐인데, 벌써 떠나가겠다니 아쉬운 마음에 나는 그렇게 묻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떠나면 나 홀로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리아의 태도는 꽤 강경했다.

“네, 네… 그, 그러니까 아침 수련이 아직 덜 끝나서…….”

나는 입맛을 다시며 안타까움을 표했지만, 세리아의 뜻이 정 그렇다니 어쩔 수 없었다. 그녀도 그녀만의 일정이 있을 테니까.

내가 그녀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건네려던, 그때의 일이었다.

“이안 오빠! 좋은 아침… 아.”

활달한 목소리와 함께 검은 머리카락이 불쑥 문 너머에서 튀어나왔다. 황갈색 눈동자를 가진 사랑스러운 외모의 소녀, 셀린이었다.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인사를 건네려다가, 세리아를 발견했는지 그대로 표정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당황한 것은 세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셀린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랐는지 흠칫, 몸을 굳혔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셀린은 세리아를 말없이 노려보고 있었고, 세리아는 우물쭈물하며 셀린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세리아로서는 어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나서야 하나, 생각한 그 순간.

세리아는 용기를 냈는지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려고 했다.

“그, 시, 신세를…….”

그러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툭, 하고 셀린의 어깨가 세리아의 몸을 치고 지나갔다.

마치 세리아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 상상 이상으로 무례한 반응에 내 눈이 부릅떠졌다.

세리아는 곧바로 풀이 죽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세리아가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그러나 셀린은 세리아가 그러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녀는 도리어 생글거리며 내게 평소와 같은 인사를 건넸다.

“안녕, 이안 오빠. 어젯밤은 좀 어땠어?”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인사에 돌려줄 내 반응은 좋지 못했다. 아무리 초면이라고 해도, 대놓고 내 지인을 무시하는데 내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자연스레 셀린을 나무라는 내 목소리가 이어졌다.

“셀린, 너 지금……!”

“그럼, 저는 이만.”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더 이어갈 수 없었다. 세리아가 그 전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게 작별인사를 건넸기 때문이었다.

내 눈이 세리아를 향했다. 황당하다는 눈빛이었다. 이렇게 무시를 당하는데, 아무렇지도 않나?

그러한 내 시선에도 세리아는 그저 익숙하다는 듯, 살짝 눈인사를 하고 떠나갈 뿐이었다. 내 기분이 진창을 뒹굴던 신발에 짓밟힌 듯 더욱 찝찝해졌다.

셀린은 아무 말도 없이 서늘한 눈빛으로 세리아를 흘겨보다가, 그녀가 떠나자 코웃음을 치며 비꼬았다.

“뻔뻔한 년, 싸가지 하고는…….”

씹어뱉듯 뱉어진 그 목소리에는, 가시 돋친 적의와 원망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인상을 찌푸리는 수밖에 없었다.

“셀린, 너 진짜…….”

“자, 자! 저딴 싸가지 없는 년은 무시하고, 그래서 어제는 어땠어? 혹시 셀린이를 생각하며 밤잠을 못 주무셨나, 우리 이안 오빠?”

그러나 셀린은 마치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장난스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나를 콕콕 찌를 뿐이었다.

더는 묻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장난을 받아주긴 했으나, 이때부터 나는 그러한 낌새를 눈치 챈 듯했다.

셀린과 세리아의 미묘한 알력 다툼,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는 문제를.

얼마 전 레토에게 들었던 조언을 떠올렸다.

‘여자들의 세계는, 네 생각보다 훨씬 더 음습하거든.’

그 말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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