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6화 (26/649)

〈 26화 〉 1. 첫 번째 편지(26)

* * *

한낮의 도서관, 수많은 학생들이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책을 읽고 있었다.

아직 시험기간까지는 한참이 남았지만, 아카데미의 기말고사는 벼락치기 따위로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꾸준히 공부하지 않으면 성적을 관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침 점심식사를 막 끝냈을 때이고, 한동안 수렵제와 같은 중요한 축제를 앞둔 차였다. 책의 내용이 제대로 머리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도서관에 앉아 있는 대다수의 학생들이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애초에 공부가 재미없던 적이 없는 별종들일 터였다. 아카데미니까 볼 수 있는, 이상한 종류의 인간들이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후자보다는 전자에 속한 인물이었다. 신전의 집중치료실에 머무르는 동안 듣고 있던 교양 강의의 진도가 꽤 나갔는데, 그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 일부러 도서관에 방문해 불행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유일한 위안이 있다면, 그 고통을 나만이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일까. 내 앞에는 퀭한 표정의 레토가 앉아 있었다.

내 앞에는 고작 책 한 권이 놓여 있을 뿐이었지만, 그의 옆에는 가지각색의 표지를 자랑하는 책 여러 권이 탑처럼 쌓인 채였다. 이론과 가설을 중시하는 마법학부 학생다운 공부량이었다.

그에 비하자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그렇게 나는 안쓰러운 정신승리를 하며 수통에 미리 담아 온 차를 홀짝였다.

상쾌한 향이 머리를 맑게 해주는 효과가 있는 차였다. 시험기간에 이 차를 애용하지 않는 아카데미 학생들이 없다고 보아도 좋았다.

물론, 레토도. 그도 수통에 담긴 차를 입에 탈탈 털어 넣다가, 이내 제 몫의 수통이 텅 비었음을 깨닫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툭, 하고 나를 발끝으로 건드렸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억지로 부여잡고 책을 읽고 있던 나는, 의문을 담아 레토를 바라보았다.

레토가 눈짓했다. 다음과 같은 뜻이 담긴 신호였다.

‘잠깐 나가자.’

마침 어떻게든 이 책의 지옥에서 탈출할 핑계를 찾고 있던 나였다. 레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신이 나서 책을 덮었다. 책갈피를 잊지는 않았다. 아직 읽어야 할 분량은 절반 남짓이 남아 있었으니까.

도대체 검을 휘두르는 사람이 ‘위상수학’을 배워서 어따 쓰나 싶었지만 말이다. 아카데미는 문과든 무과든 문학과 이학 강의를 학기당 각각 하나 이상씩 수강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수학은 좀 나았다. 레토에게 물어보면 대개는 답이 나오니까. 나는 지금도 레토에게 물어볼 거리를 몇 개 적어둔 상태였다.

하지만 정작 나와 레토의 대화 주제는 의외의 화두에 집중되었다. 그 시작은 레토가 도서관을 나서다가, 도서관 입구에 비치된 학내 동아리들이 출판한 신문 중 하나를 집어들었을 때의 일이었다.

레토는 도서관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학생회관에서 차를 주문하고, 신문을 뒤적였다. 그의 지친 눈동자가 신문 지면을 훑다가, 곧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는지 이채가 스쳤다.

그가 큭큭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보라는 듯 신문이 내밀어졌다. 레토는 특히 어느 한 부분을 콕 집어 툭툭 두드렸다.

그곳에는 짤막한 제목이 하나 쓰여 있었다.

‘남쪽 숲 마수 몰살 사건’

새로운 차를 주문하고 수통에 남은 음료를 마저 마시고 있던 나는, 곧바로 그 음료를 뿜어버릴 뻔했다.

내 손이 재빨리 신문을 채갔다. 그곳에는 다소 자극적으로 가공된 풍문이 마치 객관적 사실인 양 적혀 있었다.

[‘남쪽 숲 마수 몰살 사건’]

[본교 3학년에 재학 중인 이안 페르쿠스 군(23)이 지난 15일 아카데미 부지 남쪽에 위치한 숲에서 다수의 마수를 토벌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페르쿠스 군이 그날 단신으로 토벌한 마수는 고위 마수를 포함하여 10여 마리에 이르며, 이는 아카데미의 고학년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례적인 성과다.]

[반면 2학년에 재학 중인 세리아 유르디나 양(22)은 검술학부 수석이라는 우수한 성적과는 달리 동료를 위험에 빠트린 채 도주를 감행,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교무부 측은 남쪽 숲에서 발생한 마수들의 집단 발생에 대해 ‘수렵제를 대비하여 마수의 번식을 방관하다 보니 생긴 일’이라는 해명을 내놓았으며…….]

[한편 이안 페르쿠스 군은 속칭 ‘유르디나의 싸가지 반죽음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여 더욱 논란이 되고 있다. 아무리 3학년이라도 성적이 중하위권에 불과한 그가 최근 예상외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화제의 인물 중 드물게도 제국 하급귀족 출신인 그가 과연 어디까지 활약할 수 있을지…….]

활자를 읽어 내려갈수록 점점 더 내 표정이 굳어졌다. 마지막 줄까지 기사를 읽은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뭐야, 이거?”

“뭐긴 뭐야? 신문 기사잖아. 그것도 너에 대한.”

레토는 남 일이라는 듯 킥킥대며 웃었지만, 내 마음은 편치 못했다. 기사의 내용 중에 걸리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내 목소리가 짜증을 담아 높아졌다.

“아니, 내용이 뭐 이따위야? 내가 그날 토벌한 마수 중 고위 마수는 한 마리밖에 없는데, 무슨 고위 마수가 여러 마리 포함되어 있다는 뉘앙스에… 세리아가 동료를 위험에 빠트린 채 도주? 데렉 교수님을 부르려고 간 건데? 그리고 내 출신은 왜 강조하는 건데?”

“그래야 팔리잖아.”

그러나 내 불만에 레토는 당연한 진실을 말한다는 듯, 그렇게 대답했다.

“대중들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믿고 싶은 사실에 더 끌리는 경향이 있다고. 그 재수 없는 유르디나의 싸가지가 도망쳤는데, 제국 하급귀족 출신의 중하위권 학생이 다수의 고위 마수를 토벌해? 캬! 바로 스토리 나오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심으로는 레토의 말이 맞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투덜거림을 멈출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세리아한테 너무 미안했다. 그러지 않아도 최근 괴롭힘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차였다.

마치 세리아를 제물 삼아 내가 명성을 구가하는 듯한 느낌이라 마음이 더더욱 괴로웠다. 아무리 세리아가 타인을 신경 쓰지 않는다지만, 그녀도 인간이 아닌가.

그녀의 심장도 살점과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을 터였다. 알게 모르게 그녀가 인간관계로 상처 입고 있다는 사실은 아는 나로서는, 더 이상 이 사태를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 뒷골목에서 떠들고 있던 양아치 패거리에게 경고를 남기긴 했지만, 이대로 왜곡된 정보가 계속 돌아다닌다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결국 나는 결심했다는 듯,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이 신문을 발행한 곳에 따지기라도 해야지.”

그러나 내 굳은 결심에 돌아오는 레토의 반응은 심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피식 웃으면서 기지개를 펴며 햇볕을 만끽했다.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생긴 덕인지, 그의 초췌하던 표정이 조금 밝아져 있었다.

“아서라, 아서. 그 동아리면 4학년의 유명인사가 부장이다. 네 말을 들어먹을 턱이 없지.”

“누가 부장인데?”

“무도회 공주님.”

“아, 그 평민 출신의…….”

나는 레토의 말을 듣고 마른세수를 하고 말았다. 그 선배라면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관계 자산이 무척 풍부한 만큼 속을 알 수 없기로 유명한 선배였으니까.

오늘따라 곤란하다는 기색의 나를 보고, 레토는 슬쩍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담백하지만 문제의 핵심을 떠보는 질문이었다.

“왜, 무슨 일 생겼냐?”

그 말에 나는 잠시 망설였다. 세리아가 따돌림을 당하고 있고, 최근 그것이 괴롭힘까지 나아갔다는 사실을 말하기가 꺼려졌다.

세리아의 개인적인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이러한 문제를 남들에게 알리는 쪽이 세리아에게는 더 상처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마땅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세리아를 욕하고 다니는 녀석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경고할 수도 없고.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어제 듣게 된 세리아의 대략적인 상황을 레토에게 털어놓는 수밖에 없었다.

최근 들어 세리아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 그 과정에 마수 토벌 사건의 왜곡된 정보가 한몫 하고 있따는 점, 그리고 괴롭힘이 점점 더 도를 넘고 있다는 점.

레토는 흥미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얼굴로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이내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어제 만났다던 양아치들 말이야.”

“응?”

나는 레토의 느닷없는 질문에 그렇게 의문성을 발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제 만난 양아치들이라니, 그 골목에서 세리아의 뒷담화를 하고 있던?

그 친구들은 적당한 수단을 동원해서 잘 타이른 뒤였다. 최소한 앞으로 드러내놓고 세리아한테 헛짓거리를 하진 못할 테지.

그 이후에는 관심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주목하는 레토가 다소 뜬금없게 느껴졌다.

그러나 레토는 나와는 조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망토색이 어땠냐?”

“나한테 ‘선배’라고 했으니까… 그래, 갈색이었네.”

2학년, 세리아와 셀린과 같은 학년.

내 대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레토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도 비로소 곤란한 기색이 내려앉았다.

그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들기 시작했다.

“우선, 네 잘못은 맞는 것 같은데…….”

역시 그런가, 내 시선이 절로 내리깔렸다. 아무래도 내가 그러지 않아도 세리아를 향한 비호감도가 쌓여 있던 여론에 계기를 마련해 준 듯했다.

세리아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결정이었으나, 내가 사려 깊지 못한 탓에 결과적으로 세리아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그녀는 올해가 지나고도 아직 2년을 더 아카데미에서 보내야 했다. 이러한 여론이 계속된다면 집단행동이 중요해지는 고학년에 이르러서는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레토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은 채였다. 그는 내게 알쏭달쏭한 말을 던졌다.

“……또 네 잘못만도 아니야.”

그 미묘한 어감에 내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내 잘못이긴 한데, 또 내 잘못만은 아니다?

애매한 말이었다. 내 입에서 곧바로 반문이 튀어나왔다.

“무슨 소리야?”

“글쎄다.”

내 진지한 반응과는 달리, 레토는 심드렁한 반응만을 돌려줄 뿐이었다. 이것만큼은 제대로 캐물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

레토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결국 그의 입에서 한숨 섞인 조언이 흘러나왔다.

“이것만큼은 알려줄게. 원래 따돌림이란 건 반드시 주도하는 집단이 있어. 여론을 형성하고, 괴롭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녀석들.”

“그, 테안 패거리?”

내 말에 레토의 초록색 눈동자가 슬쩍 나를 향했다가, 내 시선을 피했다. 그의 입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그 녀석들도 있긴 하겠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걔네들만으로 이 정도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면, 진작에 그러지 않았을까?”

“……새로운 집단이 가담했다는 거야?”

레토는 어깨를 으쓱였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부정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의 추측을 가늠할 수 있었다.

나는 그대로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새로운 집단이 가담했다라, 도대체 왜?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해답은 간단했다.

“그럼, 그 두 집단만 조지면 된다는 거지?”

“아니, 뭐… 그렇긴 한데. 할 수 있겠냐?”

레토의 미심쩍다는 시선에 나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에도 그에 답하는 내 목소리만큼은 담백하면서도 당당했다.

“해야지, 어떻게든.”

내 책임이니까, 세리아가 내 탓에 더욱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정작 내 결의에 찬 대답에 레토는 코웃음을 치며 나를 갈구었지만 말이다.

“각오 하나는 좋네, 그 의지로 위상수학도 어떻게든 해보지 그래?”

그 말에 찔끔한 나는 울컥해서 항변의 말을 내뱉었다. 내가 최근 품고 있는 무척이나 근본적인 의문 중 하나였다.

“아니, 야… 애초에 검사가 왜 그딴 걸 공부해야 하는 건데? 말이 안 되잖아?”

“쯧쯧, 요즘 대세는 학제간 융합인 것도 모르냐? 그, 위상수학을 어떻게든 검술에 적용해 봐.”

레토는 혀를 차며 내게 그러한 대답을 남겼으나, 나로서는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이야기였다.

“미쳤냐?”

위상수학을 검술에 적용해?

검술이란 찰나의 승부다. 머리로 이해하고 계산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때그때의 검격은 오로지 직감과 경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정작 그러한 말을 던진 레토도 농담이었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농담으로 던진 말에 과몰입 할 만큼 할 일이 없진 않았으므로, 더는 그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내 머릿속에는 하나의 문제만이 남았다.

세리아를 괴롭히는 집단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까지는 답을 낼 수 없었다. 조금 더 신중히 생각해야겠지.

최소한 다음날, 세리아의 몰골을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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