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1. 첫 번째 편지(27)
* * *
최근 세리아의 하루는 명암이 분명했다.
그녀의 삶에서 이토록 빛과 어둠이 명확했던 시기는 없었다. 그 이전까지 그녀의 일상은 종일 그림자가 드리워진 채였으니까.
칙칙한 잿빛의 하루였다. 검을 휘두르고, 식사를 하고, 강의를 듣고. 그저 그 전날과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매일매일 견뎌내며 검만을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달랐다. 그녀의 일상에 서서히 ‘빛’이라는 것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따스하고, 그 시간의 추억들이 가슴 속에 조금씩 스며드는 느낌.
마치 바위에 빗물이 스며들듯, 처음에는 눈치 채지 못한 변화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어느 사내와 함께하는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길들여진 짐승이 교감을 나눈 상대를 기다리듯이.
인간 또한 행동원리 자체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다. 행복은 추종하고, 고통은 기피한다. 세리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최근의 그녀는 이안과 함께하면 즐거웠고, 그렇지 않으면 대개 불행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조롱하고 멸시했다. 차라리 그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욕설과 은근슬쩍 가해지는 괴롭힘은 그녀의 정신을 착실히 갉아먹고 있었다.
아무리 타인의 눈을 신경 쓰지 않더라도,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태생부터 그 누구도 믿지 못했던 세리아였다. 그럼에도 그녀 또한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인지라, 가슴 한 켠에는 늘 외로움과 인정욕구를 품고 있었다.
질투심 섞인 따돌림 따위는 이미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만이었다.
본격적으로 그녀를 조롱하고 괴롭히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그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위의 비난과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녀의 가족을 건드리는 건 일종의 금기 사항으로 여겨졌는데, 그마저도 깨진 것이다.
그 말이 그녀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지 잘 알고 있을 텐데도.
누군가 그러한 분위기에 의문을 품기도 전에, 이미 다수의 학생들이 얽혀 들어간 탓이었다. 인간들이란 사회적 동물이었으니까. 집단으로 행한 일에 대해서는 정당화 또한 간단히 이루어졌다.
그와 더불어, 최근 세리아가 제 실력에 대한 자부심을 많이 잃은 탓도 있었다.
그 전까지 세리아는 실패한 경험이 드물었다. 그래봐야 정작 그녀가 이기고 싶은 상대인 이복 언니에게는 매번 뼈아픈 패배를 당해야 했지만, 그 외의 상황에서는 대개 그녀의 재능과 노력이 언제나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요즘의 그녀는 어떤가.
이안 선배한테 단 일격도 가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그다음 주의 승부에서도, 이안 선배에게 마지막 순간 의표를 찔려 검을 내주어야 했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이안 선배의 조언을 새겨듣지 않다가 치명적인 실수까지 저질렀다. 그날 이안 선배가 보여준 실력이 상상 이상이라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지금도 죄책감에 시름하고 있었을 터였다.
그녀의 자존심이 꺾이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이안에 대한 동경과 존경의 감정이었다.
이안 선배는 상냥할 뿐만 아니라, 그 실력 또한 실전에 특화되어 있었다. 정작 싸움에 들어가면 실수나 연발하는 자신 따위보다 더 대단할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이안 선배는 세리아에게 있어 유일한 ‘친구’였다.
도대체 ‘친구’가 무엇인지, 세리아 또한 아직 알아가는 과정에 불과했으나 그것이 그녀의 삶에 빛을 비추어 주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이안 선배와 함께 있으면 행복하다.
그가 뜻 없이 웃어주거나, 그녀의 파리한 안색을 걱정해 줄 때면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쩌다 손이라도 스치면 얼굴이 뜨거워졌고, 문득 그와의 거리감을 실감하면 화들짝 놀라 우물쭈물하기도 했다.
실례도 많이 저질렀다. 그럼에도 이안은 그녀를 탓하거나 욕하지 않았다.
그는 최근 들어 그녀에게 유일하게 미소 지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세리아는 이안이 더욱 특별하다고 느꼈다.
세리아는 용기를 내 이안 선배에게 가르침을 청한 과거의 자신을 마구 칭찬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관계도 없었을 테니까.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세리아는 그러한 가정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그녀의 삶에는 볕조차 들지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 속에서 우울한 하루를 보냈겠지.
이안 선배만 있다면, 그녀를 따돌리고 괴롭히던 이들조차 입을 꾹 닫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세리아는 그의 곁에 설 때면 마치 다른 나라에 온 느낌이었다. 그것이 못내 즐거웠고, 그래서 이안이 더욱 좋아졌다.
‘우정’이란 이토록 설레고 좋은 감정이었구나. 세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밤에는 남몰래 이안 선배를 떠올리고 은은한 미소를 짓곤 했다.
그러나 빛이 있다면, 그림자는 그와 대비되어 더더욱 어둡게 느껴지는 법.
특히 그녀의 약점이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임을 깨달은 몇몇은, 지독히도 그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 싸가지의 엄마라는 년은 출신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낸들 알아? 천출이라니까 길거리 창녀일 수도 있고, 신분 역전 좀 해보려 들었던 야심만만한 하녀일 수도 있지. 뭐, 명문 귀족 가문이 그딴 여자를 품을 리가 없지만.”
어느 쪽이든 헛된 꿈이었다며,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를 넘은 비난에 세리아의 눈빛이 절로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으득, 하고 이를 갈면서 사내들로 이루어진 패거리를 노려보았다.
그 패거리는 벤치에 앉아서, 지나가는 세리아를 보며 키득거리는 중이었다. 그들은 컵에 담긴 생과일주스를 쪽쪽 빨았다. 네가 어쩌겠냐는 듯.
“크, 그래도 명문은 명문이야. 주제 파악 못하는 여자는 그렇게 날려야지.”
“그런데 어머니가 창녀라는 거야, 어떻다는 거야. 그럼 아예 아버지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잖아? 아무데서나 굴어먹던 여자일 수도 있는데.”
“그게 천출의 단점이지.”
검술 훈련장으로 가는 길, 세리아가 늘 지나다니는 시간을 노리고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러지 않아도 최근 예민해져 있던 세리아는 이어지는 모욕을 도무지 참기 힘들었다.
두 손을 꼭 말아 쥔 채, 몸을 부르르 떨던 세리아는 살벌한 기색으로 그 둘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폭력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폭력을 사용한다고 해서 당장 퇴학에 이르지는 않겠지만, 그녀는 서녀였다. 천출이 귀족의 적통과 마찰을 빚으면 본가에서 무어라 말이 나올 것이 뻔했다.
어머니를 모욕당해? 신경조차 쓰지 않겠지. 가주인 아버지는, 병마가 완연한 상황에서도 그 특유의 냉담한 목소리를 잃지 않았을 터였다.
‘그 여자는 그만 잊어라, 세리아. 이제 없는 여자다.’
그러나 최소한 한 마디는 해야겠다고, 세리아의 들끓는 속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열이 머리끝가지 오른 세리아는 저벅저벅 걸어 그들에게로 직진했다.
오, 그들은 의외라는 듯 자그마한 탄성을 내질렀다. 그때 깨달았어야 했다.
너무나 화가 났던 세리아는, 딛고 있던 땅이 갑자기 패이자 당황해서 균형을 잃었다. 그녀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우수한 검사, 고작 이 정도로 넘어질 일은 없었다.
디딤발로 삼기 위해 내딛은 오른발 아래의 땅조차, 다시 한 번 파이기 전까진.
그녀가 엉거주춤 땅에 주저앉았다. 디그(dig) 마법이었다. 아주 초보적인 마법, 평소의 그녀였다면 간단히 도약하거나 해서 피해냈을 터였다. 지금도 완전히 자세가 무너져 내리지는 않았다.
그대로 튕겨 오르듯 몸을 일으켜서, 적에게 쇄도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렇다면 저 패거리는 세리아에게 상대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전투가 아니었다.
단지 음습한 괴롭힘에 불과했다. 그녀에게 망신을 주기 위한, 공 들인 장난.
아무리 아카데미 재학생이라도 이처럼 즉각적으로 영창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최소한 며칠에 걸쳐 준비한 장난임이 분명했다.
그 악의가, 세리아의 가슴에 더욱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면서, 분한 듯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좋은 꼴을 보았다는 듯 키득거리며 몸을 일으킬 뿐이었다. 그들 중 하나가 세리아를 지나치다가, 장난스럽게 엉거주춤 몸을 비틀었다.
“어이쿠!”
그가 들고 있던 생과일주스가 절묘하게 세리아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세리아는, 철퍽이는 감촉을 느끼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생과일주스를 쏟은 그가 땅에 떨어진 컵을 대충 주워들면서, 미안하다는 듯 세리아의 어깨를 툭툭 쳤다. 물론 조금도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행동이었다.
“미안, 미안. 나도 넘어져 버렸네? 여기 길이 좀 험하다, 야.”
세리아의 눈동자에 일순 살의가 머물렀다.
지금 어깨를 치는 그 손을 잡아당겨서, 그대로 엎어치거나 명치에 팔꿈치를 박아 넣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땅을 뒹굴겠지.
그러나 상대는, 귀족이었다.
말투도, 생김새도, 전부 다 티가 났다. 시골의 한적한 영지 출신도 아닐 것이다. 그 특유의 오만한 기색은 최소 백작위 이상의 고위 귀족들만이 가지는 특징이었으니까.
세리아도 유력 가문 출신이었으나, 어디까지나 서녀. 그럼에도 가문의 위세가 있기에 명분만 쥔다면 얼마든지 박살내 버릴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일단 사과도 했고, 실수를 가장하기도 했다. 모욕도 그녀를 두고 한 말은 아니었다. 최소한 대상을 특정할 만한 낱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것이, 못내 분했다. 그만큼이나 잘 계산된 괴롭힘이라는 뜻이었으니까. 누군가가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해 그만큼이나 정성과 노력을 들인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비참한 기분을 선사했다.
결국 세리아는, 아무 말도 없이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몸이 덜덜 떨렸다. 이를 악물었지만 눈물이 새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한 반응을 기대했다는 듯, 귀티가 나는 사내를 위시로 한 학생들은 조소를 머금으며 떠나갔다.
세리아는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안 선배가 없는 세리아의 일상은, 이토록 서러웠다.
그녀는 발길을 돌려 근처의 건물을 향하려고 했다. 어디서든 머리카락에 묻은 음료를 닦아내야 할 테니까, 제복도 은근히 끈적거리는 것이 숙소까지 가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세리아는 곧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저 멀리에서, 익숙한 그림자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또한 세리아를 발견했는지, 반가운 얼굴로 다가오다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세리아! 검술 훈련장 가는 길……?”
세리아의 뇌리가 새하얘졌다.
하필이면,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한테 보이고 말았다.
언제나 예쁘고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은 사람이었는데, 도대체 왜.
그녀는 입술을 짓씹으면서, 애써 그녀에게 다가오는 사내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달아올랐다.
이안 선배였다. 그의 얼굴은 점차 딱딱히 굳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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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제가 어릴 때 쫓겨났어요.”
숲의 공터였다. 나는 붕대 대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무명천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에 묻은 음료를 대충 닦아내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공터로 향했다.
세리아는 오늘따라 의기소침해 보였다. 그녀는 공터 구석진 곳에 자리한 넓적한 바위 위에 웅크려 앉았다.
나는 그녀를 등진 채,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만 있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조차 몰랐어요. 고작해야 여섯 살짜리 꼬맹이에 불과했으니까, 어머니가 울고불고 애원을 해도 아버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죠.”
그 나이대의 어린아이에게 어머니란 부모 이상의 존재였다.
세상의 전부라고 해도 좋았다. 자신을 보듬어주고, 사랑해 주는 존재.
세리아는 그런 존재를 빼앗겼다. 충격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마음을 가늠할 수 없어, 어설픈 공감의 말 대신 침묵을 지켰다.
그녀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녀답지 않은 처량한 목소리였다.
“어머니가 제 이름을 부르짖고, 끝까지 버티니까 아버지가 기사들을 부르더군요. 기사들이 발로 짓밟고 후려쳐서 어머니의 몸이 만신창이가 됐어요. 그런데도 끝까지 저를 향해 손을 뻗고 있던, 그 광경이…….”
“아팠겠구나.”
세리아는 차마 더는 잇지 못하겠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래서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가 내뱉고 싶었을 말을 대신해 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부르르 떨렸다. 촉촉이 젖어 들어가는 목소리, 지독한 과거였다.
“어머니는, 그렇게 떠나가셨어요… 이후에는 소식조차 듣지 못했죠. 아버지는 그만 잊으라고만 하고, 그런데 그날 밤에 언니가 제게 와서 그러더군요.”
‘언니’라고 한다면, 짐작 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유르디나 가문의 적통, 북부의 태양이 될 그녀.
세리아가 수렵제에서 반드시 이기고 싶다던, 그 아카데미의 4학년이었다.
“……뭐라고?”
“조심하라고.”
신음과 같이, 세리아는 그렇게 제 가슴에 박힌 유리 조각 하나를 뱉어냈다. 그녀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들어갔다.
“너도 쓸모를 증명하지 못하면, 저렇게 될 거라고 했어요. 언니께서는, 진심이었을 거예요. 나름대로 조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그 말이 그때 어찌나 무섭게 느껴졌는지…….”
그러면서 그녀는 목이 멘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제복 소매로 제 눈가를 쓱쓱 닦았다. 눈물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오늘따라 세리아는 연약해 보였다. 이것이 그녀가 숨기고 있던 일면일 터였다. 당당하고 도도한, 껍데기로 숨기고 있던 나약한 알맹이.
세리아는 그럼에도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돌아서 있던 내 눈이 슬쩍 세리아를 향했다.
“그래서, 그래서 어머니를 욕하니 화가 났나 봐요. 이제, 괜찮아요. 이안 선배가 있으니까…….”
괜찮다고, 나는 그 짧은 한 마디가 가슴에 턱 걸리는 느낌이라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인간은, 울지 않는다. 목이 메지도 않는다. 눈물을 흘리다가, 애써 소매로 닦아내지도 않는다.
당연히 강한 척 하지도, 억지로 미소 짓지도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수많은 질문들이 입 안을 뱅뱅 맴돌다가, 결국 가까스로 내 입에서 뱉어진 말은 단 한 마디뿐이었다.
“……안 괜찮아.”
그러자 세리아는 조금 당황한 듯, 아직 물기가 촉촉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내 힘없이 미소 지었다.
“정말 괜찮아요, 이안 선배. 어차피 저는…….”
“너 말고.”
내 말이 세리아의 이어질 말을 잘랐다. 세리아의 어리둥절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녀의 눈가에 남은 눈물 자국을 보고, 나는 울컥 치솟는 감정을 느꼈다.
내 손이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만지작거렸다. 참을 수 있나?
대답은 뻔했다.
내 목젖을 긁으며, 거친 열기가 내뱉어졌다.
“내가, 안 괜찮다고.”
그 말을 끝으로 내 몸이 쏘아졌다. 세리아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내달리는 내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았다.
숲을 벗어나, 아카데미 부지 내로 들어서니 행인들이 많았다. 나는 닥치는 대로 그들을 붙잡고 누군가의 행방을 물었다.
남부 열왕국의 테안, 그 자식을 찾아야 했다.
워낙 눈에 띄는 녀석이라 그런지, 그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얼떨떨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도, 내 다급해 보이는 눈빛에 순순히 알고 있는 정보를 내놓았다.
그는 어느 강의동의 뒤편, 인적이 드문 공터에 제 패거리와 함께 키득거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귀티 나는 사내 하나가 앉아 있었다. 남부 열왕국 출신으로 보이진 않는데, 아마 테안과 함께 어울려 다니는 인간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까, 그 싸가지가 초급 마법도 피하지 못하고 넘어지는데…….”
“이야, 장관이었겠는데? 당연히 주스도 엎어줬겠지?”
“당연하지! 천출은 꿈도 꾸지 못할 만큼 비싼 목욕물이었을 거야, 그거.”
키득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터벅터벅 걸어 그들의 앞으로 향했다. 테안의 패거리는, 그 귀티 나는 사내의 패거리와 합쳐져 대략 일곱 명.
평소 데리고 다니던 애들보다는 적은 숫자였다. 그야 각자의 일정이 있을 테니 그럴 만도 하겠지,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내 갑작스러운 등장에, 낄낄대고 있던 테안의 패거리들이 단번에 나를 주목했다. 테안은 어리둥절한 눈빛이다가, 이내 씨익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팔꿈치로 내 어깨를 툭, 하고 건드렸다. 남부 열왕국식 인사였다.
“아카데미의 떠오르는 영웅께서 이곳은 무슨 볼일이신지?”
“세리아.”
음, 하고 테안은 슬쩍 내 시선을 피하며 침음을 삼켰다. 모르는 이름은 아닐 터였다. 그가 괴롭히는 상대의 이름이었으니까.
“앞으로, 세리아는 건들지 마라.”
“그거야, 뭐. 우리 사이에 어려운 부탁은 아닌데…….”
테안은 고민하듯 말꼬리를 늘어트렸다. 그의 시선이 패거리들을 훑었다. 그들은 흥미진진하다는 눈으로 나와 테안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세리아를 디그 마법으로 넘어트렸다던 사내는, 보다 노골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가 몸을 일으켜 서서히 나와 테안에게로 다가섰다.
테안은 그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나를 보고 슬쩍 미소 지었다.
“……하지만, 맨입으로 그럴 수는 없잖아?”
내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러자 테안 대신 말을 이어받은 것은, 귀티 나는 사내였다. 그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래, 너도 귀족이라면 알고 있겠지? 자고로 부탁에는 오고가는 것이 있어야 하는 법… 그 정도는 생각해 왔을 텐데.”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단언했다.
“너희는, 앞으로 세리아를 건드리지 않을 거야.”
내 확신에 찬 말에 귀티 나는 사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기대된다는 듯, 킥킥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대가를 가져왔기… 커읍?!!”
콱, 하고 주먹이 사내의 안면에 작렬했다.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피부 조직이 일순 함몰되며 구겨졌다.
핏물이 터지고 새하얀 치아 조각이 반짝 햇살을 반사하며 비산했다. 망설임조차 없는, 깔끔한 일격.
그래서 테안은커녕 내게 안면을 강타당한 당사자조차 반응하지 못했다. 테안의 멍청한 시선이 나를 향했고, 귀티 나는 사내는 단 한 방에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땅을 굴렀다.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울리며 사내가 몇 번이고 땅을 굴렀다. 극적인 타격감이었다. 벼락같이 내리꽂힌 내 주먹의 위력은, 마법사처럼 보이는 사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들의 눈에는 희미한 의문만이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웃었다. 테안과 귀티 나는 사내가 그랬듯이.
“나한테 쳐맞기 싫으면, 그래야 하거든.”
또 다른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