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1. 첫 번째 편지(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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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따라 세리아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침 수련에 이안 선배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까닭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이안 선배이니만큼, 무언가 불가피한 사정이 있다고 생각할 뿐.
이해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리아의 기분이 가라앉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이다. 종일 조롱과 괴롭힘에 시달려 온 세리아의 하루에 빛이 비추는 몇 없는 순간이었다.
어느새 세리아의 하루는 태양이 아니라 이안이 기준이 되었다. 이안과 함께하는 아침 수련이 하루의 시작이었고, 마찬가지로 이안과 함께하는 저녁 수련이 하루의 끝이었다.
그 외의 시간들은 부질없다고 느껴졌다. 늘 하던 대로 지나가는 일과였으니까.
평생 처음이었다. 어느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또 그토록 설레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드는 것은.
미약한 감정에 불과했지만 그 누구보다 무미건조한 인생을 살아온 세리아였다. 그녀는 최초로 색을 분간하기 시작한 색맹처럼 점차 감정에 눈 뜨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따라 세리아의 심정은 우울했다. 불쾌했고, 더 나아가 초조하기까지 했다.
소금과 향신료를 곁들인 음식을 먹다가, 아무런 조미료도 치지 않은 고기를 먹으면 그 퍽퍽한 식감과 고기 특유의 비린내에 놀란다.
세리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몰랐다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세리아의 입은 진미를 맛보았다. 그녀는 서서히 이안과 함께하는 시간에 길들여지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길들여지고 싶었다. 그랬던 그녀였다.
그러한 그녀의 하루에 이안이 사라졌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세리아를 괴롭게 만들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조급증이 그녀의 가슴을 옥죄었다.
세리아는 그 전날의 일을 떠올렸다.
잠자코 세리아의 속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안은, 그대로 그 자리를 박차고 떠나버렸다.
무척 화가 난 기색이었다. 세리아는 조금 놀랐다.
우선,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스스로 털어놓았다는 점이 놀라웠다. 지금껏 유르디나 가문에서는 치부로 여기던 일이고, 그래서 세리아 또한 일부러 남에게 그날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이안 선배에게 초라한 꼴을 보였을 때, 세리아는 저도 모르게 그녀가 꽁꽁 숨기고 있던 기억을 실토하고 말았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놀라웠던 점은,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안의 반응이었다.
세리아는 그가 그녀를 동정하거나 경멸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이안의 반응은 둘 중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는 분노를 택했다. 세리아가 ‘괜찮다’라고 말할 때 그는 ‘괜찮지 않다’라고 말했다.
세리아가 아니라, 그 자신이.
그 말이 참 얼떨떨했다. 그녀조차 가슴 속에 파묻어 두었던 약점을 들쑤셔지고, 어쩔 수 없다고 고개를 떨구었을 때 타인이 더 화를 내준다는 사실이.
꾸욱, 하고 가슴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또 그 이상으로 이안이 걱정되었다.
그녀를 싫어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들은 숫자도 숫자지만, 그 가문의 위세나 본인의 실력 또한 출중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안이 혹시 너무 화가 나서 그들에게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을까, 세리아는 그처럼 헛된 걱정을 해보았다.
그녀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고작해야 그녀는, 이안에게 있어 조금 친한 후배 정도가 아닌가. 세리아도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안 선배는 유일한 존재였지만, 이안에게는 아니라는 것쯤은.
그 점이 쓰라리고 또 불공평하다는 생각까지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야, 이안 선배는 누가 봐도 빛이 나는 존재가 아닌가.
그녀 같이 인간관계에 어리숙한 인간조차도 포용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그녀와, 그녀가 생각하는 그는 동등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는 바랐다. 부디 이안 선배가 그녀 때문에 상처 입지 않기를.
세리아는 이미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아서, 조금 더 상처 입어도 상관없지만 이안은 아니었다. 그녀는 어느새 그토록 이안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세리아의 기분이 더욱 좋지 않아진 것은, 오늘도 여전히 그녀를 조롱하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야, 저기 애미 없는 년 온다.”
“아, 그 하프 고아?”
검술 실습 시간, 오늘도 늘 그렇듯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프(half) 고아라니, 고아가 무슨 이종족이라도 된단 말인가.
평소라면 들은 척도 하지 않았겠지만, 세리아는 이안 선배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초조하고 불안한 상황이었다.
그럴 때일수록 조롱과 모욕이 더욱 깊은 상처로 남는 법이었다. 인내해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세리아의 눈빛이 절로 차가워졌다.
그녀의 짙푸른 눈동자가 키득거리는 소리의 진원지를 향했다. 그곳에는 갈색 망토를 걸친 여자애 셋이 모여 있었다.
세라아의 서늘한 눈빛이 그녀들을 향하자, 그들은 키득거리는 소리를 멈추었다. 그 대신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세리아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래서, 네가 어쩌겠냐는 시선.
수련용 검의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녀들을 쓰러트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학년 수석이었다. 고학년이라면 몰라도 그녀의 동기들 중 그녀를 뛰어넘는 실력을 가진 사람들은 없었다. 심지어 저 셋은 눈에도 잘 익지 않은 걸 보니, 고작해야 중위권에서 놀고 있는 어중이떠중이들.
그 정도만으로도 오러를 뽑아내는, 아카데미 바깥에 나가면 실력자로 취급받는 존재들이었지만 세리아에 비하자면 떨거지에 불과했다.
감정의 격류에 따라 세리아의 마력이 요동쳤다. 그녀의 검신에 깨끗한 청색의 오러가 맺혔다.
살의, 그녀는 진심으로 검을 휘두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도, 그녀를 조롱하는 저 패거리도 알고 있었다.
세리아가 검을 휘두를 수 없음을.
그녀는 결국 입술을 짓씹으며 검에 맺힌 오러를 꺼트렸다. 훅, 하고 촛불에 바람이 불 듯 사라지는 오러.
그 마력량뿐만 아니라, 제어 능력 또한 우수하다는 증거였다. 저 칼날이 춤을 춘다면 세리아를 조롱하던 패거리는 단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도륙이 날 터.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보다 명명백백한 명분이 필요했다. 세리아는 어느 날 선을 넘는 이들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폭력을 사랑하지 않는 그녀였으나, 지난 며칠간의 도를 넘은 조롱과 괴롭힘은 어느새 그녀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오로지 이안 선배만 보고 버티던 그녀였다. 그런데 오늘은 그 이안 선배가 없었다. 세리아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세리아가 오러를 꺼트리는 것을 보고, 여자 셋은 다시 키득거리며 웃었다.
검술 실력으로는 상대조차 할 수 없는 적이, 그녀들의 노골적인 조롱에도 입을 꾹 다물어야 한다.
너무나 즐겁고 유쾌할 상황이었다. 최소한 그녀들에게 있어서는 그랬다.
쳐다도 볼 수 없는 드높은 존재를 짓밟는 저열한 쾌감이 그녀들의 척추를 긁고 지나갔다. 이토록 멋진 사회다.
아무리 강한 존재도, 집단과 규율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음습한 욕망이 그녀들의 조롱을 더욱 부채질했다.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긴 했나 봐, 쳐다보던 눈빛 봤어? 어우, 재수 없어.”
“제대로 못 받은 게 아니라, 반만 받았겠지. 엄마 몫은 못 받았을 거 아니야? 그래도 마지막에 참기는 하네.”
또 다시 키득거리는 소리.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세리아의 아픈 부분을 파고들었다. 그녀에게 소중하고, 또 그만큼이나 악몽과도 같던 어머니에 관한 기억.
그것을 생판 모르는 타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고 있다. 그리고 그녀를 직접적으로 조롱하지는 않지만, 은근히 통쾌해하고 즐거워하는 시선들.
그 까닭 없는 악의가, 오늘따라 견디기 힘들었다.
세리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비참한 그 기분을 어떻게든 털어내고 싶었다. 검에 마음을 집중해야 하는데, 그녀의 수양이 부족한 탓인지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저러다 울겠는데?”
“울라 그래, 그 싸가지가 눈물도 있긴 한가 보네. 그래도 지 엄마 이야기는 못 참겠나 보지?”
“그동안 이안 선배 때문에 그나마 욕 좀 덜 들었는데, 오늘은 그 선배도 없어서 어쩌나~”
결국 세리아의 차가운 시선이 다시 그녀들을 향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칼은 아니더라도, 한 마디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무시하는 편이 상책이었다.
반응할수록 더욱 즐거워하고 희열을 느끼는 종류의 인간들이다. 어린 시절부터 천출이라고 조롱 받던 그녀였기에 잘 알고 있었다.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추악한 면모를.
그러나 이성이 늘 감정을 압도할 수는 없었다. 지금 세리아의 기분은 최악이었고, 그저 참고 넘어가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그래, 한 마디는 하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불안정한 정신은 최대한도로 분노를 표출하라 명령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솜씨로는 그 십분지 일조차 제대로 표현할 수 없겠지만, 그녀는 일단 그 명령을 이행하기로 했다.
그렇게 결심한 그녀가 걸음을 내딛으려는, 그 순간.
“……그만 해라.”
묵직한 목소리가, 검술 훈련장을 울렸다.
세리아는 한창 조롱하고 있던 여인들의 몸이 흠칫 떨렸다.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들처럼.
분위기란 그렇다. 아무리 나쁜 짓을 하더라도, 누구도 지적하지 않으면 마치 잘못이 아닌 듯 여겨진다. 그러나 누군가 지적하기 시작하면, 좌중들은 비로소 깨닫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사실을.
검술 훈련장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그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세리아를 조롱하고 있던 셋이었다.
그들의 미간이 단번에 좁혀지더니, 사나운 어조가 목에서 흘러나왔다.
“네가 도대체 무슨 상, 관…….”
처음에는 날카롭기 그지없던 목소리가, 그 예기를 잃는다.
모두의 표정이 멍해졌다. 세리아는 순식간에 가라앉은 그 분위기에 놀라, 그들의 시선을 쫓아 목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냈다.
그곳에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테안 에이트리, 남부 열왕국 출신의 강자.
그는 3학년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실력자였다. 세리아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지금 검술 훈련장에 서 있는 학생들 중 대부분은 그를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다들 경악한 듯 눈을 부릅뜨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을, 엉망진창이었다. 부어오르고, 피멍이 들고, 그 흔적만 보더라도 얼마나 잔혹한 폭력이 행사됐는지 짐작이 갈 정도였다.
형제조차 알아볼 수 없는 얼굴로, 테안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너희 때문에 나만 쳐맞았잖아, 이 개새끼들아…….”
언제나 그렇듯, 상스러운 소리를 내뱉으며.
세리아를 조롱하던 세 여인의 몸에, 소름이 으스스 돋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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