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1. 첫 번째 편지(31)
* * *
말은 강하다. 그러나 눈으로 보이는 것만큼 강하지는 못했다.
백 마디의 설명을 들을 수 있더라도, 그보다는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하는 편이 더 나았다. 그것이 시각의 힘이었다.
청각, 후각, 촉각, 미각. 수많은 감각이 있어도 시각보다 지배적인 감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학자는 인간의 감각 중 칠할이 시각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그래서 검술 훈련장에는 더욱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앞에, 그 무엇보다 노골적인 시각 자료가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이름은 테안이었다. 엉망진창으로 부르튼 입술로, 그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너희도 조심하는 편이 좋을 거다. 그 새끼, 아주 미친놈이야…….”
그는 털레털레 걸어 세리아를 조롱하던 세 여인에게 다가섰다. 그가 가까이 올수록, 여인들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녀들은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다급하게 변명을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누, 누, 누가 뭐래?”
“우, 우리는 아무 이야기도 안 했어, 그냥 아는 사람 이야기……!”
그러나 그녀들의 변명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들의 앞에 선 테안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던졌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렇게 말했는데…….”
테안의 검지가 제 얼굴을 향했다. 톡, 톡, 상처를 두드리려던 테안은 곧 인상을 찌푸리며 그만두었다. 그조차도 고통스러운 모습이었다.
세리아를 조롱하던 세 여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것은 하나의 경고였다.
그녀들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섬뜩한 경고.
테안은 낯빛이 새하얗게 질려가는 그녀들을 보고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이 꼴로 만들더라고. 나만 그랬을까?”
그가 등 뒤를 눈짓했다. 그곳에는 평소 테안과 함께하던 패거리들이 강의에 출석하기 위해 비척거리며 걸어들어 오고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절뚝거리거나 얼굴에 상처가 있거나. 아무튼 어딘가 아파 보인다는 점이었다. 최소한 자의에 의한 부상이 아님은 확실했다.
그들은 자존심에 꽤나 상처를 입은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누군가에게 패배했다는 증거를 그렇게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억지로 몸을 이끌고 이 자리에 나섰다.
그 사실이 암시하는 바는 하나였다. 자존심이 다치는 것보다, 누군가의 분노를 잠재우는 쪽이 더 급선무라는 뜻이었다.
그 자존심 강한 테안의 패거리들이 아닌가. 학생들로서는 싸늘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등골이 서늘했다. 세리아를 조롱하면서도, 내심 걱정하고 있던 참사가 시각화되어 그들 앞에 섰다.
세리아를 조롱하던 소녀 중 하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호, 혹시… 한 명씩 당한 거야?”
“아니.”
두려움에 떨리던 목소리였으나, 그조차도 더 이어지지 못하고 멎었다. 테안이 심드렁한 얼굴로 그렇게 단언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여인들의 낯빛은 새하얗게 질린 지 오래였다. 두려움으로 가득 찬 눈빛이 세차게 떨렸다.
그녀들 또한 검사였다. 누군가를 쓰러트리는 만큼이나 쓰러지는 일에 익숙했다. 그러나 그녀들이 이토록 두려워하는 까닭은, 그녀들의 뇌리 속에 아직도 선연한 어느 날의 기억.
일명 ‘유르디나의 싸가지 반죽음 사건’.
그 일방적이고 잔혹한 폭력의 순간을 그녀들은 아직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그녀들이 선다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심지어 테안 패거리조차 당해내지 못한 상대가 아닌가.
테안은 마치 위로하듯이, 그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던 여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용히, 그러나 그 대화를 엿듣는 이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확실하게.
“떼거지로 덤볐지, 그런데 당했어. 내가 말했잖아? 그 새끼 미친놈이라고… 조심해라, 너네.”
그러면서 테안은 흘깃 세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세리아는 아직 어안이 벙벙한 듯했다.
“……다음은, 아무래도 너희들일 것 같아서.”
히끅, 하고 여인들이 딸꾹질을 하며 두려움 섞인 시선을 세리아에게로 보냈다. 그녀들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눈빛이었다. 그녀들조차 무엇을 간청하는지 모르겠지만.
단숨에 입장이 역전되었다. 테안의 등장으로, 세리아를 향하던 조롱과 비난의 시선들은 곧바로 공포로 점철되었다.
알게 모르게 세리아를 괴롭히는 데 동참했던 이들이 힐끔거리며 세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테안의 패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야말로, 세리아를 건드리면 어떻게 될지 보여주는 모범적인 교재였으므로.
이를 견디지 못한 테안의 패거리 중 하나가 고함을 쳤다.
“뭘 봐, 새끼들아! 구경났어?!”
그제야 흠칫하며 수강생들의 시선이 거두어졌다. 자존심에 상처 입은 맹수는 괜히 건드려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이는 상식이었다.
테안은 그제야 괴로운 일이 끝났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터벅터벅 걸었다. 그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곳은, 세리아의 눈앞.
테안은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으나, 곧 고개를 숙였다. 사죄의 표시였다.
“그동안 미안했다. 앞으로는 건드리지 않으마.”
“……어째서죠?”
세리아는 멍하니, 그렇게 물었다. 테안의 고개가 슬쩍 들렸다.
“어떻게 그렇게 단숨에,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거죠? 그리고 그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지 않더라도…….”
“착각하는 모양인데.”
테안은 속삭이듯이, 그렇게 말했다. 방금 전까지 모두가 들으라는 듯 소리치던 태도와는 정반대였다.
세리아에게만 전하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는 뜻이었다. 그 의도가 궁금해진 세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너나 이안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야. 괜히 어설프게 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우리만 좆된다고… 알겠어? 일개 중하위권한테 패거리로 덤볐다가 깨진 병신들로 말이야.”
하지만 이토록 노골적으로 패배를 전시해 버리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말로 전해들었을 때는 그 심각성을 잘 모르던 사람들이, 테안 패거리를 보며 단숨에 깨닫는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잔혹한 폭력을 당했는지를.
그러면 대중의 관심은 테안 패거리의 패배보다, 그들을 박살내 버린 이안이란 존재를 향하게 된다.
실력만큼은 확실한 테안과 그 패거리들을 모조리 쓰러트린 인간이다. 물론 오늘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또한 심각한 부상을 입은 모양이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그 독기와 잔학성이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테안으로서는 이득이었다. ‘당할 만한 놈한테 당했다’라는 여론이 형성될 테니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해자에 불과했던 테안 패거리가 또 하나의 피해자로 둔갑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즉, 테안은 최선의 선택지를 골랐을 뿐이었다.
그는 영리했으니까. 멍청했다면, 실력자가 즐비한 아카데미에서 아직까지 양아치 행세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아직도 네가 마음에 안 들어. 싸가지 없고, 무엇보다 나보다 강하고 배경도 좋거든… 아주 좆같아.”
하지만, 그는 그렇게 덧붙이며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가 팔꿈치로 세리아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남부 열왕국의 인사법, 상대를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좋은 동료를 두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지. 인정한다. 이번만큼은 내가 졌어.”
그러면서 그는 손을 흔들며 뒤돌아섰다. 이제 볼일은 끝났다는 듯, 세리아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쫓았다.
테안은, 그러다 깜박했다는 듯 슬쩍 시선을 뒤로 던졌다. 그가 세리아에게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
“그리고 오늘 일, 이안한테 잘 전해줘라.”
테안의 뒤로 패거리들이 따라붙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불만이 서려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직 테안을 따르고 있었다. 그만큼 그가 신망 받는 우두머리이기 때문일 터였다.
의외로 똑똑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세리아는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다.
“……미친개는, 적으로 두면 무서워도 친구로 두면 든든하거든.”
그 말을 끝으로 데렉 교수님이 도착하며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날의 강의는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로 진행되어, 데렉 교수님이 어리둥절해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이후 세리아를 향한 조롱과 괴롭힘은 자취를 감추었다.
오히려 그녀를 노골적으로 조롱하던 몇 명은, 쩔쩔매며 세리아에게 다가와 사과의 말을 건네기까지 했다. 세리아가 며칠 동안 괴로워하던 것이 우스워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세리아는 생각했다.
이안 선배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결되는구나.
그래, 무엇이든.
이안 선배만 있다면.
그렇게 되뇌이는 그녀의 아쿠아마린을 닮은 눈동자가, 질척하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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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의 집중치료실, 나는 그곳에서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소녀에게 꾸중을 듣고 있었다.
연분홍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그녀는, 무려 성국의 성녀라는 고귀한 신분을 지닌 인물이었다.
아카데미 바깥에서 만났다면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을 고위 인사였다. 그래서 나는 꾸중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내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가끔 힐끔거리며 그녀의 부풀어 오른 흉부를 훔쳐보긴 했지만, 그건 남성의 본능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한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인지, 혹은 너무나 익숙한 일이라 별 감흥이 없는지 성녀의 타박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떻게 2주 동안 집중치료실에 3번이나 신세를 질 수 있죠? 이안 형제님, 혹시 몸을 학대하는 취미라도 있는 건가요?”
늘 상냥하고 자애롭던 성녀였으나, 오늘만큼은 단단히 화가 난 듯했다.
그녀의 어휘가 꽤 날카로웠다. 괜히 가슴이 콕콕 찔리는 듯한 느낌, 나는 소심한 반론을 제기했다.
“아니, 저… 성녀님?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요.”
“일부러가 아니라면, 오늘 신전에 방문한 여덟 명에게 이안 형제님께서 폭력을 휘둘렀다는 소문도 거짓이겠죠?”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 어느새 소문이 그렇게 퍼져 나갔지?
누가 일부러 퍼트리지 않으면 단 하루만에 아카데미 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나갈 리가 없었다. 도대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탓에 내 별 볼 일 없는 변명은 그 자리에서 막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성녀는 그 연분홍빛 눈동자로 나를 잠시 째려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 형제님, 몸을 소중히 여기세요. 고칠 수 있다고 해서 함부로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안타깝게 목숨을 잃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천신의 곁으로 떠납니다.”
“……네, 새겨 듣겠습니다.”
나는 혹시 성녀의 꾸지람이 더 이어지기라도 할까 봐 냉큼 그렇게 대답했다. 성녀는 못미덥다는 눈치였지만, 더 말해 봐야 입만 아프리라 판단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고민하듯 잠시 침묵하다가, 슬쩍 내게로 시선을 던졌다.
“라이넬라 백작가에서 은근히 불쾌해 하는 기색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나지막한 한 마디에,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내 손이 턱, 하고 이마에 얹어졌다.
빌어먹을, 그럴 줄 알았다.
생각해 보면 대단히 무모한 짓거리였다. 고작해야 자작가의 차남에 불과한 인간이 고위 귀족들이 포함된 패거리에 덤비다니.
그것도 내 실력으로는 쓰러트릴 수도 없는 상대였다. 그때는 왜 그토록 화가 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때 희미한 확신이 들었다. 그까짓 놈들에게는 절대 패배하지 않으리라는, 까닭 없는 확신.
세리아를 향한 부채감도 원인 중 하나일 터였다. 세리아를 향한 괴롭힘이 본격화된 것에는 내 책임도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최근 내 행동에는 이해할 수 없는 지점들이 몇몇 존재했다. 모두 기억을 잃은 후에 저지른 짓들이었다.
물론, 내게도 생각은 있었다.
아무리 라이넬라 백작가가 위세가 등등하다지만, 그래 봐야 유르디나 가문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세리아는 서녀라고 해도 유르디나의 성을 받은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녀와의 갈등이 표면화되는 걸 라이넬라 가문이 원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은근히 불쾌’하다고 한 것일 테지, 노골적으로 표현은 할 수 없으니까. 다만 세리아도 아니고 고작해야 시골 자작가의 차남이 왜 그들의 자제를 건드리냐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행동으로 나서지는 않을 듯했다. 아무리 가문의 위세가 차이난다지만 일단 나 또한 귀족의 적통이었다. 아카데미 내에서 일어난 폭력 사건에 대해 함부로 항의해서 척을 지고 싶지는 않을 터였다.
오히려 자작가의 차남에게 된통 깨졌다는, 자존심 상하는 소문이나 퍼지겠지. 라이넬라 백작가의 이름이 드높다지만 귀족 가문 하나를 깔아뭉갤 수준의 명문가는 아니었다.
유르디나 가문쯤 되어야, 그 정도 위세가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제국의 5대 귀족 가문 중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넬라 가문의 경고가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내가 아니라, 가문 때문에.
혹시나 라이넬라 가문이 내 가문에 알게 모르게 압력을 행사할까 염려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아카데미의 그 값비싼 학비를 가문에 빚지고 있는 나였다. 그래서는 고개를 들기 힘들었다.
성녀는 복잡해 보이는 내 표정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모른 척 내게 한 마디를 흘렸다.
“이안 형제님의 사정은 제가 잘 설명했어요.”
“……?”
내 의아한 시선이 성녀를 향했다.
‘잘 설명했다’라고 말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다. 조금 더 노골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았다.
‘내가 잘 타일러 보냈으니, 손을 쓰지는 못할 거다.’
하지만 도대체 왜? 그러한 의혹이 담긴 눈빛에, 성녀는 성호를 그었다.
“천신께서는 정의로운 이를 옹호하시는 법이죠. 이안 형제님께서 왜 폭력을 휘두르셨는지는, 대략적으로나마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성녀는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는 듯, 몸을 일으키면서 한 쪽 눈을 찡긋했다. 매력적인 눈웃음이었다.
“지난번의 은혜도 있고 말이죠.”
“……은혜라니요?”
“흐흥, 기억하지 못한다면 됐어요.”
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성녀는 묘한 소리를 내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녀는 그대로 병실을 나서려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수수께끼 하나를 남겼다.
“그러고 보니, 그때에 비해 안색이 많이 좋아지셨네요.”
“그때요?”
“네, 그때는 무척 피로해 보이는 눈을 하고 계셨거든요. 괜찮아지셨다니 다행이지만… 그럼 저는 이만, 임마누엘.”
‘무척 피로해 보이는 눈’이라, 나는 그제야 일이 어떻게 됐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또 기억을 잃은 사이에,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모양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짓을?
아무리 끙끙거려 봐야 답이 나올 턱이 없었다. 내 머릿속에서 그 일주일간의 기억은 깔끔히 지워진 지 오래였으니까. 다만, ‘은혜’라고 했으니 내게 나쁜 일은 아니었으리라고 짐작할 뿐.
내 답 없는 고민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성녀가 떠남과 동시에, 누군가가 머리를 불쑥 들이밀었기 때문이었다.
“이안 오빠!”
생글거리는 목소리, 나는 곧바로 방문객의 정체를 짐작해 냈다.
셀린이었다. 그녀는 늘 그렇듯 해맑은 얼굴로 손을 흔들더니, 총총 뛰듯이 내게 다가섰다.
“들었어, 테안 그 자식들을 아주 박살을 냈다며? 어후, 도대체 누구 남자길래 이렇게 멋있는 짓을 하지?”
“누구의 남자도 아닌… 끄아악!”
퍽, 하고 셀린의 손바닥이 내 어깨에 작렬했다. 아직 부상 중이었던 나는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을 치는 수밖에 없었다.
셀린의 얼굴이 단숨에 샐쭉해졌다. 그녀가 툴툴거렸다.
“여전히 분위기를 못 읽어, 그럴 땐 대충 대답해 주면 안 돼?”
“장난으로 입에 담을 말은 아니니까.”
흥, 셀린은 그렇게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그녀의 눈에 노골적인 불만이 어렸다.
“그 싸가지를 위해서는 온몸을 불사르시더니, 나한테는 그 한 마디 해주기도 어려우시다?”
“세리아가 아니라 네가 그랬어도 내가 나섰을 거야. 그리고 또…….”
나는 그렇게 말을 이어나가다가, 말끝을 흐렸다. 셀린은 서운하다는 듯 내게서 고개를 돌린 채였지만, 못내 이어질 질문이 궁금한지 슬쩍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끄응, 하고 내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망설이고 있다는 뜻.
셀린은 그러는 내 모습이 답답했는지, 조금 짜증이 어린 목소리로 나를 재촉했다.
“왜, 또, 뭐!”
“……너 말이야.”
결국 그녀의 재촉을 이기지 못한 내 입이 열렸다. 셀린의 황갈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는, 조금 더 망설이다가 물었다.
“혹시 세리아 싫어하냐?”
셀린은, 그 말을 듣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나를 계속해서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내 질문의 의도를 가늠하겠다는 듯, 그래서 나는 더욱 노골적인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세리아에 대한 나쁜 소문, 혹시 네가 퍼트렸나 싶어서.”
그제야, 셀린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녀가 서서히 팔짱을 풀었다.
굳은 두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내 눈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셀린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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