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2화 (32/649)

〈 32화 〉 1. 첫 번째 편지(32)

* * *

병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싸늘한 정적이었다.

당장이라도 파열음을 낼 듯이 팽팽히 당겨진 공기, 나도 셀린도 화를 내지는 않았으나 차라리 그러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화를 낸다는 것은, 제 감정을 드러낸다는 뜻이었다.

그럴수록 속임수는 간파하기 용이해진다. 혹은 상대에게 내심은 감추고 싶지 않은 사실이 있을 때 사람들은 보다 감정적으로 변하곤 했다.

하지만 셀린은 화를 내지 않았다. 침묵과 함께, 아무 말도 없이 황갈색 눈동자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을 뿐.

셀린은 팔짱을 낀 채로, 벽에 등을 기댔다. 그녀의 시선이 잠시 나를 피해 허공을 훑었다.

정적 속에서 다시 소리가 탄생한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났을 무렵의 이야기.

셀린은 피식, 하고 웃으면서 내게 물었다.

“……느닷없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흐릿한 미소였다. 별 걸 다 묻는다는 표정, 그러나 나는 알았다.

셀린은 무언가 숨기고 싶은 사실이 있을 때 그렇게 반응하곤 한다. 내 가슴속에 어린 의혹의 응어리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나는 한숨과 함께 마른세수를 했다. 신이시여, 제발.

“세리아에 대한 나쁜 소문, 2학년 여자아이들 중심으로 퍼져 있더라고.”

“2학년에 여자가 한둘이겠어?”

시큰둥한 셀린의 반응, 더는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신호였다.

그녀는 이제 품속에서 자그마한 칼을 꺼내 손톱을 다듬기 시작했다. 그러든 말든 내 추론은 이어졌다.

“듣다 보니 2학년 여자애들은 유독 말로만 세리아를 괴롭히더라고. 왜 그런가 싶어 알아보니까 다들 하급귀족들이더라.”

셀린은 흐응, 하고 묘한 소리를 내며 내게 황갈빛 눈동자를 향했다. 그 눈동자에는 슬슬 차가운 빛이 머무르고 있었다. 늘 활달하던 셀린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그러고 보면 힌트는 너무나 많이 존재했다.

우선 레토부터가 그랬다. 그는 노골적으로 셀린을 언급하기까지 했다. 그녀를 잘 챙겨 주어야 한다고, 지금도 나로서는 그것이 어째서 세리아를 괴롭힐 까닭이 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조각이 하나씩 맞춰질수록, 셀린을 의심할 여지는 많아져 갔다.

물론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다. 다만 지금 셀린의 반응을 보고 나는 반쯤 확신했다.

최소한 셀린이 주동자는 아니더라도, 연관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러지 않고서 그녀가 내게 무언가를 숨길 리가 없었다.

우리 둘의 인연은 그렇게 얇고 연약하지 않았으니까.

셀린의 싸늘한 낯빛은 평소와 괴리감이 심하긴 했지만, 그녀의 그러한 일면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몇 년 전의 일이었다. 내가 하스터 가문의 영지에 잠시 머무르며 레토와 셀린과 함께 이곳저곳을 쏘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 하스터 남작님의 배려로 가문의 사냥터에서 사냥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봐야 자그마한 숲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사냥터는 사냥터였다.

그곳에서 사슴을 한 마리 잡아 그날 밤 영주성에서 하스터 남작 부부를 대접했었다. 그때 나도, 셀린도, 레토도 아카데미를 지망할 만큼 유능한 소년소녀들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날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사냥에 성공한 순간도, 사슴 고기가 듬뿍 올라간 저녁상을 받았을 때도 아니었다.

사냥감을 쫓기 시작한 셀린의, 그 자비 없이 냉혹한 태도.

그때도 셀린은 이처럼 차가운 낯빛을 하고 있었다. 무엇이든 무관심한 척, 그러나 누구보다 먼저 서늘한 눈동자로 상황을 살피던 그녀.

그 몇 년 전에 보았던 인물화가, 지금 이 자리에서 재현되었다.

어리고 유약한 소녀의 모습이 아닌, 풋풋한 매력이 남아있는 사랑스러운 소녀의 모습으로.

“그리고 이상하잖아. 보통 소문은 사건의 당사자들에 대한 평가를 공유하는데, 왜 나는 띄워주고 세리아는 욕하는 걸까?”

내 의문에 셀린은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그게 객관적인 사실이라서? 아, 그리고 이안 오빠는 우리 하급귀족들의 새로운 우상이기도 하네.”

“사실이 아니라는 거, 너도 알잖아.”

그날 세리아가 도망친 건 사실이지만, 이는 발목이 우연히 다친 탓이었다.

그러지만 않아도 세리아는 그날 나와 함께 마수의 요격에 나섰을 터였다. 오히려 그러려던 그녀를 뜯어말려 도망치자고 한 건 내 쪽이 아니었던가.

셀린이 그 사실을 모를 턱이 없었다. 그리고 2학년 하급귀족, 특히 여자들 사이에서 셀린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녀의 인맥은 얇고 넓게 분포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헛소문이 퍼졌다는 건 최소한 하나의 사실을 의미했다.

최소한 그녀는 헛소문이 퍼지는 걸 방조하고 있었다. 나는 그래서 말없이 셀린을 응시했다.

관심 없다는 듯 내게서 시선을 돌리고 있던 그녀는, 그제야 내게 눈동자를 향했다.

그 눈빛에서는 짜증과 불만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나한테는, 객관적인 사실 맞아.”

“셀린…….”

후우, 하고 내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내 안타까운 목소리에, 셀린은 기어이 울컥하고 말았다.

“그럼 아니라고?!”

“당연히 아니지, 세리아는 단지 실수를 했을 뿐…….”

“아니, 그 전부터 그랬어.”

으득, 하고 셀린에게서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마치 불이 당겨지듯이.

그녀의 기세가 살벌해졌다. 그녀는 적을 앞에 둔 고양잇과 맹수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분노를 표출했다.

“뜬금없이 이안 오빠한테 시비를 걸질 않나, 그 다음에는 며칠 동안 신전 신세를 져야 할 만큼 패놓지를 않나!”

“그것도 전부 다 사정이…….”

“그놈의 사정, 사정, 사정! 무슨 말을 해도 다 사정이 있대, 이안 오빠가 조루야?! 이 허접 오빠!”

나는 턱, 하고 이마에 손을 얹고 말았다.

과년한 처녀가 지금 무슨 말을 입에 담는단 말인가. 나는 오랜만에 셀린을 나무라야 할 시간이 왔음을 깨달았다.

“야, 너… 아무리 그래도, 품위를 지켜야 할 제국 귀족의 여식이 무슨 소리를…….”

“흥, 됐어. 그런 구시대적인 성차별주의자의 발언 따위 듣고 싶지 않아.”

그녀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아무리 시대가 달라져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고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싶었으나, 셀린의 날선 목소리가 이어졌기에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그녀가 제 감정을 실토하고 있었다. 듣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 여자랑 얽히면 이안 오빠가 이상해져. 요새 그 싸가지랑만 어울려 다니질 않나, 이안 오빠가 마수를 잡아야 했던 것도 결국 그 싸가지 탓이었잖아?”

“……그건 내가 잘못 판단을 내린 책임도 있었어.”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렇게 세리아를 대신해 변명했다. 레토의 말처럼 세리아에게 기척을 숨기는 물약을 먹였으면 끝났을 일이었다. 내가 멍청해서 위험을 자처했을 뿐이지.

물론, 지금처럼 흥분한 셀린에게 그 말 통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어쨌든!”

내 예상대로 셀린은 으르렁거리며, 두 주먹을 꽉 쥔 채 펄쩍 뛰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고양이 같았다. 이처럼 살벌한 분위기인데, 그렇게 귀엽게 느껴지다니 외모지상주의의 폐해가 심각했다.

“나는, 이안 오빠가 뭐라 해도 그 년 마음에 안 들어. 그리고 했던 대로 돌려받은 것뿐이야. 그게 내 잘못이야?”

그 말에 이제는 내가 울컥할 차례였다.

내 인상이 팍 구겨졌다. 무어라 고함이라도 치려던 나는, 들고 있던 팔을 거칠게 떨어트렸다. 후우, 하고 내뱉는 한숨에서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나왔다.

내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소리를 내지르던 셀린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녀의 기세가 한 풀 꺾인 건 이 무렵이었다.

그녀가 입술을 짓씹으면서, 내 차가운 시선을 피했다. 내 입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잘못이지. 아니야?”

셀린은 그 말에 다시 울컥했는지 내게 불만스러운 눈초리를 향했다가, 내 한없이 진중한 낯빛을 보고 결국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녀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그녀는 애꿎은 대리석 바닥을 발로 툭툭 찼다.

“세리아가 뭘 했는데? 설령 세리아에게 잘못이 있다고 쳐도, 결국 그걸 다 들어주고 수습해 준 건 내 의지였잖아. 그게 왜 세리아 잘못이야?”

셀린의 사나운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그녀의 황갈빛 눈동자에는, 열기와 한기가 공존하고 있었다. 서릿발 같은 적의와 불길과도 같은 분노.

“……또, 그 년 편을 드시겠다?”

“편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네가 먼저 선을 넘었잖아!”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셀린에게 소리를 지른 건 몇 년만의 일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내 고함에 셀린은 놀란 듯 몸을 움찔 떨다가, 이내 분한 듯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가슴 아픈 광경이었지만, 오히려 나는 셀린을 아꼈기에 지금 이 기회에 따끔하게 말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지막이, 그러나 확실한 감정을 담아 나는 셀린에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남의 불행한 가정사를 두고 욕을 해? 세리아한테 그게 얼마나 상처가 됐는지 알아?!”

낮게 깔린,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명백한 위협을 담고 있는 내 목소리에 셀린은 더더욱 서러운 듯 제복 소매로 제 눈가를 찍어냈다. 그녀가 다시 한 번 이를 으득, 하고 갈았다.

나는 더더욱 황당하고 어이가 없는 심정이었다. 그렇게까지 명백한 잘못을 저질러 놓고, 아직도 억울하단 말인가?

일순 내 머릿속으로 셀린과의 추억이 스쳐지나갔다. 어릴 때부터 너무 어리광을 받아주다 보니 비뚤어지고 만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 셀린의 영적 타락에는 내 책임도 있음이 분명했다.

신학부의 안드레이 교수님이나 성녀님과 상담을 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암담한 눈빛으로 셀린을 쳐다보고 있던 그때.

“……그거 나 아니야, 이 머저리 오빠!”

셀린은 진짜로 억울하다는 듯, 그렇게 빼액 소리를 질렀다.

어라, 하고 내 고개가 기울었다. 셀린이 아니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나 붉어진 셀린의 눈가가, 내게 증언하고 있었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아무래도, 다소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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