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4화 (34/649)

〈 34화 〉 1. 첫 번째 편지(34)

* * *

새벽녘의 숲은 고요했다.

아카데미 남쪽에 위치한 숲과는 달리, 조금 더 작은 규모의 숲이었다. 기숙사 주변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수많은 학생들이 이곳을 방문하곤 했다.

그 목적은 제각각이었다.

캠핑 동아리는 야영지로 이곳을 택하기도 했고, 사람들 눈에 띄기 싫어하는 학생들이 수련을 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산책이나 비밀스러운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까지, 숲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했다.

오늘 내가 숲을 방문한 목적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지금 나는 세리아와 함께 검을 수련하기 위해 숲의 공터로 향하고 있었다.

새하얀 문명의 건축물 틈새를 빠져나와 자연 속을 걷는 것은, 낭만적인 느낌을 준다.

비록 그것이 수많은 방문객에 의해 길들여진 자연이라고 해도 말이다. 나는 나무들 사이로 잘 뻗어 있는 산책로를 따라 걷고 걸었다.

그날의 첫 공기가 신선한 냄새를 품고 폐부를 가득 채웠다. 기도를 간질이는, 살짝 촉촉한 그 느낌. 오늘따라 예감이 좋았다.

그러고 보면 최근에는 일이 너무 많았다.

느닷없이 일주일 동안의 기억을 잃어버리질 않나, 2학년 학년 수석과 대련이 잡혀 있질 않나, 그리고 알고 지내던 친구가 마수에게 습격을 당했고 강의 중에 그 마수를 사냥하기까지 했다.

그후에도 퇴원한 직후 세리아의 따돌림 사건을 해결하려고 동분서주 했으니, 이제 한동안은 무탈한 일상을 보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다만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남아있기는 했다. 세리아의 따돌림을 주도한 인물이 누구인지 여전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테안이 내게 박살났다는 소문이 퍼진 이상, 다시 세리아를 노골적으로 괴롭히는 건 불가능해질 터였다. 일방적으로 폭력을 가하는 건 즐거울 테지만, 그것이 되돌아 올 수도 있다 생각하면 이야기는 달라지니까.

따라서 내게 남은 문제는 이제 하나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수렵제’, 어느덧 2주 앞으로 다가온 아카데미 최대의 축제 중 하나.

아카데미는 매 분기마다 축제를 열곤 한다.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상징하는 축제였다. 수렵제는 그중에서도 여름을 상징하는 축제에 속했다.

찬란한 수확의 계절이 찾아오기 전에,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4인 1조를 이루어 마수들을 사냥하고 그 피로 풍작을 축원한다.

제국의 전설적인 정복황제이자, 아카데미 앞에 ‘제립’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당사자인 아이달로스가 특히나 사랑했다고 전해지는 축제였다.

당연히 제국에게도 아카데미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그만큼 중요한 축제가 벌어지는 장소에 무시무시한 마수가 도사리고 있다니,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일정만 여유롭다면 황제까지 친히 찾아와 관전하는 날이었다. 그러한 사태가 벌어졌다간 제국의 자존심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의 권위마저 추락할 우려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마수에게 희생될 학생들이 너무 불쌍했고.

막아야 했다. 더는 엠마와 같은 희생자가 나와서는 안 됐다. 그러한 각오를 다지면서도, 나는 제발 그 외의 문제가 생기지 않기만을 기도했다.

이미 내게는 짊어진 짐이 너무 무거웠다. 네임드급 마수의 등장이라니,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그렇게 여러 생각을 하며, 목적지였던 숲속의 공터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였다.

시린 햇빛이 나뭇잎 틈새를 투과하며 조명을 비추었다. 그곳에는 바위 위에 걸터앉은 채로, 조용히 명상을 하고 있는 여인이 앉아 있었다.

짙은 회색의 머리카락은 태양광을 반사하여 잿빛의 윤기를 비추었다. 혈관이 보일 듯 투명한 피부와 매력적인 곡선을 그리는 몸까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이제야 막 동이 트고 있음에도 그녀만 보면 나는 달이 떠올랐다.

은은한 빛을 발하지만, 또 어느 날 올려다보면 바람 앞에 구슬프게 흔들리던 달.

나는 그녀의 명상을 방해할까 두려워, 인기척을 죽인 채 걸었다. 그럼에도 세리아의 발달한 기감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녀의 눈이 서서히 뜨였다. 아쿠아마린을 닮은 눈동자, 그 멍하던 눈빛에 서서히 생기가 올라왔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순간.

“이, 이, 이안 선, 선해… 으으… 이안 선배님!”

세리아 화들짝 놀라, 곧바로 튀어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시골 자작가의 차남에게 불과한 내겐 과분한 반응이었다.

고작해야 이틀만에 보는 얼굴인데도 세리아는 내가 무척 반가운 듯했다. 표정 변화가 드문 무뚝뚝한 그녀의 얼굴에 옅은 화색이 돌았다.

그만큼이나 날 잘 따른다는 뜻이겠지.

이래저래 많이 친해지기도 했고, 어느 선배라도 자신을 잘 따르는 후배는 귀여운 법이었다.

나는 그녀의 반응에 피식, 하고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잘 지냈어?”

“아니요, 이안 선배가 계시지 않…….”

세리아는 무심코 어두운 얼굴을 하고 대답하려다가, 무언가를 눈치 챘는지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볼에 홍조가 올라왔다. 오늘따라 감정 표현이 풍부한 세리아였다.

“……으셔도 물론, 잘 지냈습니다. 이, 이안 선배께서는요?”

어째서인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부끄러워하는 그녀를 보고, 나는 의문을 느꼈으나 곧 그만두었다.

굳이 세리아의 치부를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최근 괴롭힘 때문에 상심이 잦았을 텐데, 나라도 상냥히 대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걱정 말라는 듯 태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야 잘 지냈지, 너무 걱정하지 마.”

덧붙인 말은, 그녀 또한 소문을 들었으리라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아무리 세리아가 주변에 사람이 없더라도 그녀와 관련된 일이었다. 테안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나를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가 나름대로 잘 처신했다는 걸.

그래봐야 세리아를 괴롭히고, 그 외에 수많은 피해자가 만든 인간이었다.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멍청하지는 않은 남자라 생각은 했다.

굳이 나와 갈등을 표면화 하지 않고, 내 의도대로 움직여 주면서 제 패거리의 위신도 어느 정도 유지시켰다.

밀림과 늪이 가득한 남부 열왕국 출신다운 처신이었다. 그곳은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사고방식이 만연한 곳이라고 들었으니까.

그리고 테안이 ‘잘 처신했다’라는 말은, 곧 그가 내게 박살났다는 사실이 동네방네 퍼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것도 세리아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세리아가 듣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녀는 아, 하고 자그마한 탄성을 내뱉고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볼이 다시 한 번 달아올랐다. 그녀는 두 검지를 마주친 채 꼼지락대다가, 내게 말했다.

“그, 가, 감사…….”

“그럴 필요 없어.”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말이 더 이어지기도 전에, 그렇게 끊어버렸다.

당황한 세리아는 늘 그렇듯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조금 더 사회성이 좋았다면 아니라면서 재차 감사를 표했겠지만, 세리아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내가 노린 것도 그 점이었다.

솔직히 말해 감사를 받을 만한 일은 맞았지만, 최근 들어 내가 세리아에게 해준 일이 너무 많았다.

그러지 않아도 인간관계가 낯선 세리아였다. ‘친구’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거금을 건네는 그녀인데, 이처럼 부채의식이 쌓여 가면 나중엔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녀와 나의 건전한 관계를 위해서도 부채의식을 줄여두는 편이 더 나았다.

“말했잖아, 내가 못 참아서 저지른 일이라고. 따지고 보면 너는 괜히 내 뒤에 숨어있는 모양새가 됐는데, 내 고집대로 한 일에 감사를 받을 건 없어.”

“그, 그래도…….”

하지만 아무리 세리아라도 그 정도의 판단 능력은 있는 것인지, 그녀는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레토에게 배운 기술을 응용하기로 했다. 여자가 내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이렇게 하라고 그랬는데.

내 손이 세리아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세리아가 화들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눈동자는 동그랗게 뜨인 채, 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세리아의 숨이 멎었다. 나는 그녀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리아, 내 말 믿지?”

“……네, 네헤.”

세리아는 펑, 하고 터질 듯 달아오른 얼굴로, 그렇게 최면에 걸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제야 만족해서 그녀를 풀어주었다. 과연 레토의 조언은 오늘도 효험이 있었다.

마법학부라 그런가, 앞으로도 난 머리 좋은 레토의 조언을 잘 새겨듣기로 했다. 나는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친구잖아. 당연히 곤란한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야지.”

너무나 뻔한 말이었다. 늘 그렇듯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는, 인사치레와 같은 내용.

그러나 세리아의 반응은, 조금 이상해서.

“……‘친구’니까, 이안 선배께서 도와주시는 거군요.”

고개를 숙인 채, 그렇게 되뇌이는 세리아의 눈동자는 조금 흐릿해 보였다. 그녀의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곤란하면, 제가 곤란해지면 말이죠…….”

계속해서 비슷한 말을 반복하는 세리아의 모습은, 마치 성경 구절을 암송하는 성직자를 연상시켰다. 아니, 그보다도 질척한 느낌.

그 목소리에서는, 옅은 광증마저 느껴질 정도라서.

나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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