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1. 첫 번째 편지(36)
* * *
셀린과 세리아의 침묵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두 사람의 손이 나를 붙들고 있었다. 마치 나를 사이에 두고 두 여인이 신경전이라고 하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아니, 내가 착각하지만 않았다면 비유가 아니라 현실이 그랬다.
셀린도, 세리아도 어디에서나 감탄을 살 만큼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그러한 둘이 나를 이토록 좋아해 준다는 사실은 뿌듯한 일이겠지만, 둘의 차가운 시선이 마주치지 괜히 속이 쓰렸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난 셀린은 물론이고, 이제야 막 인간관계에 대해 배우고 있는 세리아도 내게는 마음이 갈 수밖에 없는 친구였다. 그 둘에게 있어 나는 절친한 친구일 테니, 그야 뺏기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이해가 갔다.
굳이 연인관계가 아니라도 독점욕이란 존재한다. 나이가 들수록 그러한 감각이 희미해지긴 하지만, 셀린이나 세리아나 아직은 그러한 감정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
솔직히 말해서, 곤란했다.
팽팽히 당겨진 실과 같은 긴장감 속에서 내가 처음으로 떠올린 생각은 그랬다. 지금으로서는 누구 하나의 편을 들어주기도 쉽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세리아와 내 사이에 일방적으로 끼어든 쪽은 셀린이지만, 그래도 암묵적으로 늘 아침을 함께 먹던 사이가 아닌가. 그렇다고 이처럼 냉랭한 분위기에서 덜컥 셋이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 제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간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에 소화조차 제대로 되지 않으리라. 아무리 내가 눈치가 없어도 그 정도로 못난 인간은 아니었다.
내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그때, 정적을 깨트린 것은 셀린이었다.
그녀는 싱긋, 상냥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교적인 그녀의 성향이 그대로 나타나는 미소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짓는 미소는 무언가 달랐다.
눈이 웃지 않는데, 입술만이 호선을 그린다.
얼핏 비치는 황갈빛 눈동자에는 여전히 차가운 빛이 머물러 있었다. 지금껏 애써 무시하고 있던 세리아에게 셀린이 처음으로 던진 말은, 다음과 같았다.
“흐응, 유르디나 양? ‘우리’ 이안 오빠한테 무슨 볼 일이라도 있어?”
그러면서 셀린은 살짝 내 팔을 끌어안듯 내게 바싹 달라붙었다. 내가 놀란 눈으로 셀린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냉랭한 표정으로 세리아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뽐내듯이 우쭐한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 팔에 부드러운 여체의 감촉이 맞닿았다. 셀린도 더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평소처럼 내가 셀린을 쳐내려고 하는 순간, 내 옷자락을 쥔 세리아의 손에 힘이 꾸욱 들어갔다.
그녀의 아쿠아마린빛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았다. 청명한 하늘이 구름에 가려지듯 극적인 반응이었다. 언제나 맑고 깨끗하던 청색의 눈동자가 점차 심해의 칙칙한 어둠을 닮아갔다.
그녀는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셀린에게 말했다.
“……떨어지시죠.”
“내가 왜?”
그러나 세리아에게 돌아오는 셀린의 반응은, 뻔뻔스러울 만큼 담백했다. 그녀는 코웃음을 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나랑 이안 오빠는 원래 이랬어. 너는, 이안 오빠한테 달라붙은 지 며칠이나 됐지? 아하하… 생각해 보니 꼴 받네.”
느닷없이 꺄르륵 웃음을 터트리던 셀린은, 서서히 그 얼굴에서 미소를 지워 나갔다.
생글거리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고,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던 입가는 적의를 품고 비틀렸다.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네가, 뭔데 나랑 이안 오빠한테 참견질이야? 아하, 이제 이안 오빠랑 좀 친해진 것 같아서?”
“셀린.”
나는 점점 심각해지는 분위기에 셀린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는 단단히 화가 났는지 내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훅, 하고 잡아당기듯 나를 끌어 내가 엉거주춤 그녀 쪽으로 다가오게 했다. 세리아는 여전히 내 옷자락을 잡고 있었으므로, 그녀와 셀린이 거리가 한층 가까워졌다.
물리적인 거리는 그랬다. 마음의 거리는 한참이나 멀어진 듯 보였지만.
셀린이 싸늘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너, 친구도 없고 불쌍해 보여서 이안 오빠가 놀아준 거잖아. 그것도 모르겠어?”
“그만하자고 했어, 셀린.”
“그런 줄도 모르고 신나서 이안 오빠한테 매달리는 꼴이라니, 푸흐흐…….”
견딜 수 없다는 듯, 셀린은 그렇게 입을 가리고 조소를 터트렸다. 내 연이은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세리아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늘 그렇듯이 차가운 얼굴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더욱더 깊이 가라앉아 감정의 편린조차 읽어낼 수 없었다.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세리아를 바라보았다. 셀린의 폭언이 너무 심했다. 나중에 둘 중 누군가의 원망을 사더라도 슬슬 만류해야 할 듯 싶었다.
그러나 내 결심보다, 셀린이 더 빨랐다.
“야.”
셀린은 그렇게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하면서, 내 팔을 툭 털어내고 세리아에게로 다가섰다. 세리아는 아직 내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였다.
그녀는 살벌한 눈빛을 한 채 세리아 앞에 다가가, 팔짱을 꼈다. 신장은 세리아가 더 컸기에 올려다보는 자세가 되었지만, 셀린은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셀린은 조롱하듯이, 입꼬리를 비틀어 말아올리고는, 세리아에게 말했다. 응어리졌던 모든 감정을 토해내듯이.
“유르디나면 다야? 제발 눈치 좀 챙겨… 응? 넌 나랑 이안 오빠 사이에 뭐라 할 자격도 없고 깜냥도 안 돼. 찐따년이 보자보자 하니까 진짜……!”
“셀린!”
결국 내 목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셀린은 그제야 스스로 너무 흥분했다고 생각했는지 흠칫 몸을 떨었지만, 반성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면서 내 시선을 피했다. 뚱한 얼굴.
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 입에서 한숨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만하자고 했잖아, 내가! 그리고 세리아, 셀린 말은 너무 신경 쓸 거 없어. 네가 불쌍해서 놀아주거나 한 게 아니라…….”
“그분이시네요.”
세리아가 상처 받았으리라 지레짐작하고 그녀를 달래려던 나는, 세리아의 입에서 막힘없는 말이 흘러나오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휘둥그레 떠진 내 눈이 내 경악을 증명하고 있었다. 세리아가 혀를 씹지 않고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을 건네다니?
그러고 보면, 세리아는 원래부터 그랬다. 그래서 별명이 ‘유르디나의 싸가지’ 아니었던가. 차갑고, 도도하고, 강인한 이미지.
그리고 그러한 그녀로 돌아왔다는 것은, 곧 세리아가 ‘싸가지 없는’ 발언을 하리라는 뜻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목소리를 듣다 보니 알았습니다. 그 날선 목소리, 어디서 들었나 했더니 인파에 숨어 절 욕하시던 분 같은데.”
“……너 싸가지 없다고 욕하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거든?”
처음에는 세리아의 지적에 움찔 몸을 떨었던 셀린은, 곧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기며 그렇게 대응했다.
그녀의 황갈빛 눈동자에서는 적의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동안 무시로 일관하고 있었던 건, 애초에 세리아와 이러한 사이가 될 줄 알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만큼이나 셀린은 세리아를 싫어하고 있었다. 그 원인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중에 내 목소리가 있다고 어떻게 확신…….”
“유르디나가 무섭나요?”
툭, 하고 셀린의 말이 멎는다.
마치 칼날에 비단이 찢어지듯 깔끔한 단절이었다. 잠시 당황한 듯 어물거리던 셀린은, 다시 한 번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뭐?”
“유르디나가, 무섭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뒤에서 수군거리던 거 아닌가요.”
그리고 세리아는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다시 한 발자국. 내 몸이 세리아에게로 살짝 기울었다. 세리아와 셀린의 거리는 이제 지근거리.
제 몸보다 머리 하나는 큰 여인이 성큼 걸어오자, 셀린은 무심코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 자존심 때문인지 정작 그러지는 못했지만.
셀린이 이를 악물고, 세리아를 노려보았다. 셀린을 내려다보는 세리아의 눈빛은 그대로였다. 그 서릿발과도 같은 눈빛.
“그러면 끝까지 뒤에서 수군거리고 계시는 편이 어떨까요. 이안 선배 앞에서 괜히 추한 열등감 드러내지 마시고.”
셀린은 상상 이상의 폭언에 놀랐는지,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뜨였다가, 곧 살벌한 기세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으득, 하고 셀린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카데미에서 고위귀족과 하급귀족의 격차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를 이토록 노골적으로 언급하는 경우는 없었다. 일단 아카데미는 표면적으로나마 계급으로부터 자유로운, 평등한 공간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수위의 발언이라면 징계 사유로도 충분했다. 셀린이 감정이 들끓는 목소리로 외쳤다.
“야, 너……!”
“그리고, 제가 불쌍해서 이안 선배가 놀아준다고 하셨나요.”
셀린의 얼굴에는 분노가 어렸으나, 세리아의 눈빛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마치 불과 얼음을 보는 듯했다. 도저히 친해질 수도, 섞이지도 못하는.
설령 함께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둘 다 파멸로 달려갈 뿐인 사이.
나는 두 여인의 폭언에 어안이 벙벙해서 넋을 놓고 있었다. 멍청한 짓이었다.
세리아가 다시 한 걸음, 그리고 상반신을 굽혀 제 입을 셀린의 귓가에 가져갔다. 그녀의 서늘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럼, 앞으로도 불쌍하게 있죠. 이안 선배랑, 쭉 같이 있을 수 있도록.”
결국 셀린은 그쯤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그녀의 손이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향했다. 검사의 본능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이 찐따년이 가정교육을 덜 받아서 이러나 진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내가 나선 것은 그때였다.
지금까지는 말싸움에 불과했지만, 폭력 사태로 번지면 이야기가 달랐다. 특히 지금처럼 둘 사이가 감정적으로 벌어진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누군가 다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와 테안처럼 검집채로 다투면 몰라, 날이 뽑혀 나오기라도 했다간 그날로 대참사였다.
나는 곧바로 노호성을 터트렸다.
“둘 다 그만 하랬잖아!”
사실 세리아에게 그만하라고 한 적은 없었지만, 지금 둘을 멈추기 위해서는 좀 더 강한 표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덕인지는 몰라도 세리아와 셀린은 둘 다 흠칫 몸을 굳히더니, 당황한 시선을 내게 보냈다.
특히 세리아의 반응이 극적이었는데, 내 분노를 인지한 그녀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아차, 싶은 얼굴.
그녀의 짙푸른 눈동자에, 짙은 두려움이 깔렸다. 그럼에도 내 짜증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진정하고, 숙소로 가. 나도 좀 쉬어야겠으니까, 한동안 찾지 말고.”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아팠다. 최근 들어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그런데 셀린과 세리아가 다투기까지 하니, 이제 지쳤다는 감상이 먼저 들었다.
어디선가 좀 쉬고 싶었다. 몇 시간 정도만이라도 머리를 식힐 심산이었다. 단지 그럴 뿐인, 단순한 이야기.
그러나 그 말에, 세리아는 세상을 잃기라도 한 듯 절망한 표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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