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1. 첫 번째 편지(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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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아카데미는 늘 북적였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가리지 않고 그랬다.
아카데미 부지의 한가운데, 중앙도서관과 학생회관이 위치한 이곳은 특히나 행인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이었다. 일단 아카데미의 중심이기도 했고, 또 학생회관에는 학생들이 이용할 만한 가지각색의 가게들이 입점해 있었으니까.
지금 내가 빨대로 쪽쪽 말고 있는 차 또한 그러한 가게 중 하나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학생회관 외부에 설치된 작은 테이블에는 삼삼오오 모인 학생들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평화로운 한때, 내 맞은편에는 늘 그렇듯 레토가 있었다.
“……그래서, 그 둘을 방치하고 그냥 오셨다?”
레토는 한심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대로 두면 혀라도 찰 모양새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니, 그럼 어떡해? 둘은 흥분했고, 나도 짜증이 확 치밀어 올라서 그랬지.”
레토는 그 말을 듣고 기가 막힌 듯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포기했다는 눈빛이 되어 고개를 돌렸다.
그가 빨대로 음료를 빠는 소리만이 외롭게 울려 퍼졌다. 이내 레토는 두 손을 들며 한탄했다.
“좋다, 좋아. 너는 이제 졸업이야. 하산하거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 황당하다는 반응에, 레토는 더욱 어이가 없다는 눈빛이 되어 내게 말했다.
“아니, 아카데미 2학년에서 가장 아리따운 두 꽃이 사내 하나를 두고 다투는데 어찌 내가 너를 제자라 부르겠냐? 그리고 그때 그 둘한테 한동안 찾지 말라고 했다고?”
와, 하고 레토는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내 그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밀당을 아주 제대로 하는구나. 그런데 이 새끼야, 아무리 그래도 셀린한테 네가 그러면 안 되지.”
좀 그랬나, 나는 슬쩍 후회스러운 마음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사실 숙소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침까지 거르고 화낼 일까지는 아니지 않나 싶었다. 특히 세리아가 안절부절하지 못하던 그 모습이 아직까지 뇌리에 남아 있었다.
인간관계에 특히나 미숙한 그녀였다. 그 말이 절교선언 비스무리한 표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지 걱정이었다.
나는 쯧, 하고 혀를 차면서 빨대로 음료를 쪽쪽 빨았다. 상쾌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그나마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내 번민하는 표정을 본 레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더 뭐라 하기도 애매하다는 얼굴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생각을 조금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기로 한 모양이었다.
느닷없이 그가 큭큭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의문을 담은 내 시선이 그를 향했다.
레토의 녹색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악동과도 같은 느낌.
“아니, 아니. 그러고 보면 너 셀린한테 그렇게 화낸 적 얼마 없지 않냐?”
“뭐, 그렇긴 하지.”
지난번에 병실에서 싸우긴 했지만, 결국엔 사소한 오해가 있기도 했고 도리어 마지막에 화를 낸 쪽은 셀린이었다.
오늘처럼 내가 일방적으로 화를 낸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셀린도 조금 충격 받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던 기억이 났다.
그 표정을 생각하니 또 속이 쓰렸다. 세리아도 세리아였지만, 셀린 또한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친구였다. 그녀와 싸우고 난 뒤였으니 나로서도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친구라는 것이 그렇다. 별 것 아닌 인연은 그대로 끊어버리면 그만인데, 굳건한 끈일수록 떨어져 버리면 허전하고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나 내 복잡한 마음과는 달리, 레토는 희희낙락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야, 볼 만하겠는데?”
“뭐가?”
짤막한 내 물음에 레토는 키득거리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답했다.
“당연히 셀린이 어떻게 나올지지! 지금 아주 속이 바짝바짝 마를 텐데. 경쟁자가 나타나질 않나, 흥분해서 싸우다가 미움을 사지 않나…….”
“내가 어떻게 셀린을 미워해.”
“그거야 네 생각이고, 지금쯤 셀린은 손톱을 쥐어뜯으며 초조해 하고 있을 텐데.”
나는 피식 웃으며 레토의 말을 부정하려 했으나, 이어지는 그의 말에 다시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야 레토는 셀린의 친오빠 같은 존재니까, 나보다는 셀린을 더 잘 알 터였다.
그럼에도 나는 쉽사리 그 말을 신용할 수 없었다. 언제나 당돌하고 사교성도 밝은 그 셀린이 초조해 한다고?
상상이 가질 않았다. 나는 여전히 못미덥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 수밖에 없었다.
레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더 이상 내게 믿음을 강요하진 않았다. 다만 내게 한 마디 부탁을 남겼을 뿐이었다.
“야, 오늘 너 내 옆에 딱 붙어 있어라. 내가 셀린이 어떻게 나오나 보고 만다, 진짜.”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쾌활하기 그지없었다. 셀린을 놀리려는 의지가 충만한 목소리였다. 이러지 저러니 해도 셀린의 불행은 그의 행복인 모양이었다.
물론 셀린이 진짜 심각한 상황에 처한다면, 가장 먼저 얼굴이 굳어버릴 테지만.
가족이란 그런 관계가 아니겠는가. 나는 이쯤에서 슬슬 화제를 전환하기로 했다.
“그보다, 레토.”
“응?”
아무렇지도 않은 듯 뱉어진 내 목소리에, 레토 또한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반응했다. 그러나 내 속은 조금 초조해져 있었다.
지금 꺼내는 이야기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리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지난번에 레토에게 말했을 때는 반응이 좋지 않았고.
그러나 이 무거운 짐을 나 혼자 짊어지기는 불가능했다. 최소한 신뢰할 수 있는 동료 하나쯤은 두어야, 고민을 나눌 수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내가 가장 먼저 고민을 털어놓을 상대는 하나뿐이었다.
나보다 머리도 좋고, 아는 것도 많고, 발도 넓어서 소식도 많이 전해듣는 절친한 친구.
레토 아인스턴, 그밖에 없었다.
“혹시, 미래에서 편지가 왔다면 어떻게 생각해?”
“아앙?”
레토는 빨대를 입에 물고 있다가,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냐는 듯 그런 의문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잠시 인상을 찌푸리고 고민에 빠지더니, 마시고 있던 음료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가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너, 그 지난번에 엠마 병상 앞에서 말했던, 그거 말이야? 아직도 충격이 안 가셨냐?”
“아니, 레토. 진짜라니깐? 자, 봐.”
나는 그러면서 품에서 고이 간직하고 있던 연애편지를 꺼내들었다. 고풍스러운 편지지에, 정갈한 필체. 교양 있는 귀족 영애가 쓴 것이 분명해 보이는 편지였다.
아무리 내가 거짓말을 하고 싶더라도, 이를 재현하기 위해서는 꽤 발품을 팔아야 할 터였다. 그리고 레토도 잘 알고 있듯 내가 그렇게까지 장난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레토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뭐하냐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눈짓으로 내가 내민 편지지를 가리켰다.
“뭐, 어쩌라고.”
“아니, 이것 좀 받아보라니깐? 이게 그 미래에서 온 편지인데…….”
그러자 레토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는 내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소리를, 내가 그렇게 물으려던 그 순간.
레토가 몸을 일으켜, 상반신을 기울였다. 그리고 내가 내민 손 위를 손바닥으로 휘휘 훑었다.
그러자 레토의 손이 편지지를 투과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내젓는 양. 내 눈이 부릅떠졌다.
내가 가진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게는 물리적 실체를 가지고 있는 물건이, 타인에게는 그렇지 않다?
레토의 낯빛이 딱딱해지는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그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너 정신 감정 좀 받아봐야 하지 않겠냐? 아무래도 그때 충격이 컸던 것 같아, 엠마가 습격당했을 때…….”
“아니, 아니라니까! 그, 지난번에 마수 토벌도 이 편지에 나온 내용대로 한 거야. 마수가 습격한다고 해서!”
나는 당황해서 변명을 주워섬겼으나, 레토의 표정은 심각해지다 못해 서글퍼지고 있는 지경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강제로 심리 상담을 받아야 할 판이었다.
나로서도 답답하긴 했다. 과연 이것이 진실인가? 혹은 사후에 만들어낸 환상이 아닌가? 나라고 그러한 의심을 완전히 풀지는 못했다.
그러나 검술 실습 시간에 있었던 마수의 습격은 내가 예언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우연한 일이 아니었고, 심지어 내게는 아직도 그날 꾼 악몽의 생생한 기억이 남아있었다.
그 피로에 젖은 금빛 눈동자.
그것이 내게 묘한 확신을 주었다. 이 편지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그러나 지금 내게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조차 나를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과거의 일로는 확신을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편지에 나온 미래의 내용을 읊었다.
“그러니까, 레토. 지금은 믿기지 않을 수도 있겠는데, 이 편지에 따르면 올해 수렵제에서 강력한 마수가 나타난다고 되어 있거든.”
“수렵제? 아아, 그러고 보니 파견 나갔던 4학년들이 슬슬 수렵제 때문에 복귀 중이라던데.”
“……?”
나는 레토의 반응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내 의아한 시선이 그를 향하자, 레토는 왜 그러냐는 듯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답답한 마음에,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시 편지의 내용을 읊었다. 조금 더 큰소리로.
“올해의 수렵제에, 강력한 마수가 나타난다니깐?”
“그러니까 수렵제가 곧 다가온다고. 나도 알아, 그거 모르는 아카데미 학생도 있나? 그게 무슨 상관인데?”
이럴 수가, 나는 할 말을 잃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내뱉은 내용과 레토가 전해듣는 이야기에는 묘한 간극이 있었다. 편지에 나온 정보를 전달하려고 하면, 그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내용으로 이야기가 치환되는 듯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사실 미래에서 연애편지가 온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한데, 눈앞에서 이 정도 수준의 왜곡이 일어나니 나는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내가 멍하니 시선을 내리깔자, 레토는 슬슬 심각한 표정으로 침음을 삼켰다. 내가 정신이 나갔는지, 그렇지 않으면 내 말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지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곧 한숨을 내쉬었다. 결심이 선 듯, 그가 말했다.
“저기, 이안. 만약 네 말이 진짜라면 말이야…….”
“……진짜 맞다니깐?”
내가 조금 흥분한 목소리로 맞받아치자, 레토는 진정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렇다고 한다면, 너에 한정돼서 시간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커.”
그 말에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레토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레토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말하지 않아도 그가 하고 있을 생각은 뻔했다.
‘이래서 검술학부는 안 돼’, 그는 내게 조곤조곤 설명을 시작했다.
“시공간을 왜곡시키는 건 마법으로도 힘들어. 최고위 마법 정도나 가능할까? 그마저도 범위는 한정되어 있어. 그런데 먼 미래에서 편지가 날아왔다는 건, 정보가 전해졌다는 거야.”
“정보가 전해져서, 그게 왜?”
레토는 그쯤에서 음료를 쪽쪽 빨았다. 그는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이 맞는지 아직도 고민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왕 내친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설명을 시작했다.
“미래에서 정보가 전해졌다는 것만으로도 세계에는 무지막지한 왜곡이 발생해. 예를 들어, 너 마수 토벌이 편지에 나온 내용을 보고 저지른 짓이라 했지?”
“응, 그렇지.”
“그럼 그 편지가 날아온 미래에서는 어떻게 마수를 토벌한 걸까? 또 편지를 읽고?”
“그, 렇겠지……?”
내 자신 없는 대답에 레토는 고개를 내저었다. 오답이라는 뜻이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시간이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애초에 네가 편지를 읽었다는 과거가 없으면, 마수를 토벌했다는 미래도 발생하지 않아. 그렇다면 미래에서 편지를 써서 네게 보내는 일도 발생하지 않겠지? 사건의 인과관계 자체가 갇혀버리는 거라고. 마치 원처럼.”
“……?”
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레토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레토는 답답한지 자그맣게 욕지거리를 한 번 내뱉고는, 머리를 짚으며 내게 말했다.
“굳이 이해할 필요는 없어. 단순히 생각해… 그러니까, 핵심은 그 정보 하나만으로도 왜곡이 어마어마해진다는 거야. 그거 보정하는 데 드는 마력은 더 어마어마하고. 그러니까 그 왜곡의 범위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시간 역행의 범위를 한정 지었는데, 그게 너라는 개인이 된 거지.”
“그게 가능해?”
“미래에서 편지가 날아왔다며, 그건 말이 되냐?”
내 입이 단번에 다물어졌다. 레토는 여전히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일단 그는 짧은 시간이나마 나름대로 추론한 내용을 내게 알려주었다.
“그러니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내게 그 편지를 아무리 보여주고 싶어도 보여줄 수 없다는 거지. 그러면 왜곡의 규모도 커질 테니까, 애초에 막아놓은 거야. 물론 우회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흐음, 하고 레토는 식탁을 검지로 톡, 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것도 잠시, 그는 이내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지금으로서는 생각나는 방법이 없어. 아무튼, 그렇다는 거야. 나도 한 번 알아볼 테니 너도 괜히 애 쓰지 마. 물론, 나는 굳이 내기를 해야 한다면 네가 미쳤다는 쪽에 걸겠지만.”
“그러지 마라, 진짜. 나 진지해…….”
결국 그날 레토와의 대화로 내가 알아낸 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연애편지는 오직 내게만 온다. 그리고, 나 외의 사람들은 이를 볼 수 없다. 편지의 내용을 전달하는 것도 미래의 정보를 과거에 전하는 것이라 불가능하다.
절망적인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 편지의 내용을, 홀로 짊어질 수밖에 없다는 건가?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깨가 무거웠다. 지금까지는 괜찮았다. 수렵제까지도, 무리하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연애편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세계의 멸망을 내가 막아야 한다면?
그것이 가당키나 한가, 나는 시골 자작가의 차남에 불과했다. 고작해야 그 정도가 내 그릇의 한계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세계의 멸망을 막아내라니,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털레털레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나는 문득 인기척을 눈치 챘다. 사실 한참 전부터 눈치 채고 있었지만,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함부로 그녀를 부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어느새 인적이 드문 골목. 슬슬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때일지도 몰랐다.
“……나와, 세리아.”
그러자 내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건물 뒤에서, 소녀 하나가 우물쭈물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세리아였다. 그녀는 긴장한 낯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간절한 눈빛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