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8화 (38/649)

〈 38화 〉 1. 첫 번째 편지(38)

* * *

아카데미의 부지 내에서는 수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살아가고 있다. 재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직원들이나 입점업체의 직원들, 그리고 여러 관리 인원들이 함께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보니, 아카데미는 늘 북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이곳에 머무르는 절반 이상은 혈기왕성한 청춘들이었다. 바깥에 나오면 만날 친구들이 가득하니, 그들이 쏘다니는 일은 더욱 잦았다.

그러나 아무리 아카데미에 사람이 붐빈다고 해도 모든 곳에 인파가 모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아카데미는 넓었고, 당연히 한적한 곳도 몇몇 존재했다.

예컨대 아카데미의 남쪽 숲이나, 부지 외곽에 위치한 낡은 건물들 뒷마당이 그랬다. 굳이 학생들이 찾아올 필요가 없는 장소이면서도, 아카데미의 중심지와 거리가 있는 곳들이었다.

이러한 장소는 어느새 테안 패거리와 같은 양아치들의 모임장소로나 쓰이게 되었다. 그 탓에 학생들의 발길은 점점 더 잦아들었고, 이제는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스러운 장소가 되고 말았다.

내가 세리아를 불러낸 곳도 그러한 장소 중 하나였다.

숲으로 향하는 길에는 낡은 건물 여럿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래 전에 연구동으로 쓰이던 건물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재건축이 결정됐거나 관련된 학문이 사장된 경우였다.

교무부 측에서는 어떻게든 이 건물을 활용할 계획을 입안 중으로 보이나, 대개의 행정 사무 절차가 그렇듯 지지부진한 진행률을 보이는 중이었다. 그래서 이곳은 아카데미에서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싶은 학생들이 종종 이용하는 곳이 되었다.

나와 세리아가 대화를 나누기에도 적당한 장소였다. 나는 낡은 건물의 뒤편에 남은 공터에서, 세리아를 보고 섰다.

그녀는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듯이.

그녀로서는 내가 첫 친구였다. 그러니까 친구가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지, 내 입에서 자그마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나도 세리아에게 진지하게 화를 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소 예민해져 있던 차에 머리를 식힐 핑계가 필요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달래주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세리아, 오늘 아침부터 계속 따라다녔지?”

내 지적에 세리아의 몸이 움찔, 하고 떨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바닥을 향했다. 애처로을 만큼 떨리는 눈빛이었다.

그 말대로였다. 세리아는 오늘 아침, 내가 화낸 직후부터 나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심지어 내가 숙소로 들어간 이후에도, 기숙사 앞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던 듯했다. 내가 기숙사를 나서자마자 다시 내게 몰래 따라붙었으니까.

사실 눈치 챈 건 그 이전의 일이었다. 세리아가 몸을 숨기긴 했지만, 최근 들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내 감각은 그녀의 기척을 금세 감지해 냈다.

세리아가 진심으로 기척을 죽이지 않은 덕도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활보하는 대낮의 아카데미에서, 기척을 죽인다면 그것대로 이상한 눈으로 쳐다봐질 테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 날 쫓아다닌 그녀였다. 당연히 무어라 할 말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물끄러미 세리아를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세리아는 흘깃 고개를 들어 내 눈치를 살피다가, 나와 눈동자를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나로서는 아무래도 좋다는 뜻이었는데, 그녀는 아직 내 화가 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곤란했다. 나는 그녀를 어떻게 달랠까 고민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세리아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다간 다음 강의 시간에 늦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세리아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녀의 당황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러나 아직 그녀와 내 거리는 꽤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서, 다시 세리아를 바라보았다.

무엇이든 말해 보라는 신호였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다가가면 그만이었다. 그때는 적당히 달래주면 될 테지만, 나는 세리아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을 듣고 싶었다.

귀중한 기회였으니까. 언제까지나 내가 그녀의 미숙함을 이유로 그녀를 돌봐줄 수는 없었다. 그녀도 나름대로 성장이 필요했다.

세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죄, 죄, 죄, 죄…….”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사과를 하려는 듯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일단 화난 상대에게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사과부터 건네는 건 묵은 감정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물론 사과를 먼저 전해 듣고, 잘못한 쪽은 역시 네가 맞았다며 도리어 다시 화를 내는 인간도 존재한다. 그러한 사람은 다소 감정적인 성격이므로 좀 더 시간을 두고 관계 개선을 시도하는 편이 나았다. 그러지 않으면 관계를 단절하든가.

세리아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나는 딱히 꽁한 마음을 오래 가지고 가는 성미는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도 잘못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었고.

이대로 세리아에게 사과를 전해 듣고, 나도 미안했다며 화해하면 끝이었다. 그리고 다시 예전과 같이 함께 수련도 하고, 잡담도 나누는 사이로 돌아가는 것이다.

완벽했다. 나는 속으로 그려지는 미래의 청사진에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세리아도 오늘 일로 알게 되겠지, 친구란 싸우기도 하지만 이렇게 화해도 하면서 더더욱 끈끈한 사이가 된다는 사실을.

그러나 세리아가 다음으로 보인 반응은, 내 상상 이상이었다.

“죄, 죄송, 흐윽… 죄송, 흑, 흐으윽…….”

그녀의 아쿠아마린을 닮은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방울져 떨어지는 눈물은 마치 세공된 보석이 깨져 나가듯 땅바닥에 부딪혀 산산이 부숴졌다. 나는 세리아의 반응에 당황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울고 있는 건가?

그 자존심 강한 세리아가 아니던가. 그녀가 이복 언니를 향한 열등감을 가지곤 있어도, 그녀 스스로 품어 온 자부심과 도도함만큼은 진짜였다.

그래서 내게 패배한 뒤, 다시 대련을 신청했던 것이다.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오늘이 두 번째였다.

지난번에 괴롭힘을 당하던 세리아를 보았을 때, 세리아는 애써 눈물을 닦아냈다. 비참하고 처량한 마음이었을 텐데, 그 몰골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그러나 오늘 방울져 떨어지는 눈물은, 그날 흘린 눈물보다 더욱 많아 보였다.

그 정도로 감정의 풍랑이 거세다는 뜻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니 세리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죄송, 흐윽… 죄송, 합니다… 요, 용서해… 흑, 주세요…….”

감정의 파도는 곧 그녀의 눈동자뿐만 아니라 전신으로 번졌다. 그녀의 몸이 살짝 떨렸다. 애처로운 광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무심코 세리아에게 다가서는 수밖에 없었다.

몸은 때때로 말보다 많은 것을 전한다. 지금의 세리아가 그랬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짙은 슬픔만이 묻어나오고 있었지만, 그녀의 떨리는 몸은 조금 더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불안과 초조, 그리고 두려움.

애써 쌓아올린 소중한 관계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그 생각이, 도도하고 자존심 강한 소녀를 비굴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세리아는 고개 숙여 내게 사죄를 전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꼭 쥐어진 두 손 중 하나를 붙잡았다.

흠칫, 놀란 세리아의 고개가 들렸다. 그녀의 눈물 젖은 눈동자가 나를 가득 담았다.

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남은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냈다. 내 입에서 절로 그녀를 타박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보냐? 울 일까지는 아니잖아.”

엄지로 쓱 훑듯이 그녀의 눈가를 훑어내자, 세리아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몇 번 더 그녀의 눈가를 훔치자 그제야 눈물이 멎었다.

세리아는, 얼빠진 소리를 냈다.

“으, 이, 이안 선해……?”

발음이 샜다. 그러나 나도 세리아도 이를 신경 쓰지는 않았다. 세리아는 딸꾹질이라고 할 것처럼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나도 그녀가 갑작스레 터트린 눈물에 당황한 상태였으니까.

나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세리아를 바라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울기는 왜 울어. 조금 싸운 거 가지고… 그러다간 앞으로 얼마나 더 울려고?”

“하, 하지만 이안 선배가 처음으로 화를 내셔서…….”

세리아는 우물쭈물하면서 다시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다시 옅은 불안감이 스쳤다.

그래서 불안했던 건가. 이래서는 화도 함부로 못 낼 판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화 좀 내면 어떻다고? 그때는 나도 예민해서 그랬어, 세리아. 미안해.”

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사과에 세리아는 다시 고개를 들어 내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내 화가 풀렸다고 확신했는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눈동자에는 옅은 물기가 남아있었다. 그녀가 흘깃흘깃 나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불안해?”

내 나지막한 물음에 세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다시금 숙여지는 고개가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흐음, 하고 나는 침음을 삼켰다. 설마 화를 한 번 낸 것만으로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될까?”

사실 다소 비겁한 질문이었다. 상황을 해결할 능력이 없으니, 선택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나쁜 방식.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이 선택이 최선이었다. 나는 우는 여자를 달래는 법을 잘 알지 못했고, 하물며 세리아 같은 여자를 울려본 적은 이번이 난생 처음이었다.

내게 여자를 울려본 경험이라곤 기껏해야 어린 시절 셀린을 몇 번 울린 정도가 전부였다. 애초에 세리아가 눈물을 터트린 까닭도 짐작이 가지 않았고.

세리아는 왜 그토록 불안해했을까, 그러한 의문을 해소하지 못한 나로서는 그녀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내 느닷없는 질문에 세리아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고민하듯 살짝 시선을 흘렸다. 그러던 그녀는 이내, 결심했다는 눈이 되었다.

그럼에도 차마 꺼내기 힘든 말이었는지, 그녀의 입술이 몇 번이고 열렸다 닫혔다. 그러던 그녀가 비로소 입을 연 것은, 그보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난 뒤의 일.

그리고 그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란.

“……아, 안아 주세요.”

또 다시 내 예상을 아득히 상회하는 말이라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세리아의 살결에서는, 달콤한 향이 났다. 촉촉이 젖은 숨결과 물기가 가시지 않는 눈동자, 그리고 살짝 상기된 볼까지.

흐르듯 떨어지는 곡선이 눈에 띄었다. 여체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적인 굴곡이었다. 내 머리가 일순 몽롱해졌다.

우는 여자에게는 기묘한 매력이 있었다. 사내를 끌어당기는, 그리고 당장이라도 덮치고 싶게끔 하는 마력이.

그래서 나는,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단지 아무 말도 없이 나를 올려다보는, 세리아를 한참이나 바라보았을 뿐.

범죄적인 미모였다. 그 아름다운 여체의 곡선까지 포함해서, 무의식적으로 사내를 홀리는 법을 터득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숨결이 코끝을 간지럽혔을 때, 그제야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꿈을 꾸다 깬 듯한 느낌, 몽롱해졌던 정신이 찬물을 마주친 듯 각성했다.

그리고 그렇게 가까스로 돌아온 정신으로, 내가 처음으로 떠올린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이 맹랑한 후배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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