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9화 (39/649)

〈 39화 〉 1. 첫 번째 편지(39)

* * *

결국 세리아는 내 품에 안겼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세리아 정도의 미녀가 안아 달라고 하는데, 이를 거절하는 사내가 존재하긴 할까?

물론 있을 수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나일 수도 있었고.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내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다시 시무룩해지는 세리아를 보면 누구나 그녀를 안아줄 수밖에 없을 터였다.

또 그녀가 울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한몫했다. 지금 세리아는 누가 봐도 불안정해 보였으므로.

그녀는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몇 번 비비적거리며 그 감촉을 느끼는 듯했다. 나는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았는데, 세리아는 아직 안도감에 취한 탓인지 별 반응이 없었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서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보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난 뒤. 그녀는 문득 깨달은 바가 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 얼굴은 붉어질 대로 붉어져, 세리아의 시선을 피하고 있은 지 오래였다. 그만큼이나 부끄러운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내 반응을 보고, 세리아도 비로소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깨달은 듯했다.

후배가 이성 선배의 품에 안겨서, 안도한 듯 가슴팍에 얼굴을 부비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연인으로 오해받을 여지는 충분했다.

순식간에 세리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가 더듬거리면서, 내 품에서 벗어났다. 그녀의 눈이 핑핑 돌았다.

“그, 그, 그러니까… 이, 이안 선배님? 이, 이건…….”

“아니야, 진정했으면 됐어…….”

사실 세리아는 진정하긴커녕 더욱 큰 패닉에 빠진 듯한 모습이었지만, 일부러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단지 내 품을 빌려주었던 일이 도움이 되길 바랐다. 그렇게 덮고 넘어가려는 나를, 세리아는 필사적으로 만류했다.

“드, 드, 들어주세요! 그, 그러니까 이건 어머니 때문에!”

“……어머니?”

그렇게 세리아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최근 들어 몇 번씩 듣고 있는, 세리아의 어머니에 대한 추억.

그러나 오늘 나누는 이야기는, 지금껏 나누었던 악몽과도 같은 기억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말하자면, 그 이전에 흐릿하게 남아있던 행복했던 추억들.

나와 세리아는 어느새 한적한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슬슬 강의를 들으러 가야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숲으로 난 길이라 이곳저곳에 꽃과 풀이 자라 있었다. 둘이서 대화를 나누기에는 적당한 분위기였다.

“어린 시절에, 제가 울거나 하면 어머니가 안아주곤 했거든요.”

“그때도 눈물이 많았나 보네.”

세리아는 내 말에 직전까지 펑펑 울었던 기억을 상기했는지, 볼을 살짝 붉힌 채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수치심으로 떨렸다.

“어, 어쨌든 어머니는 하녀 출신이라 자리를 비우시는 일이 잦았어요. 저를 낳은 이후에도 불려가셨을 정도였죠.”

“……아무리 그래도 그게 가능해?”

가주의 아이를 임신해서 낳은 여자였다. 아무리 유르디나 가문이 순혈주의라고 하더라도 그건 너무한 처사였다. 일개 하인처럼 불러내다니.

그러자 세리아의 목소리가 더욱 가라앉았다. 씁쓸한 미소조차 그녀는 입에 걸치지 못했다. 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

그것이 그녀의 감정을 감추기 위한 가면임을 알기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하인처럼 일을 시킨 건 아니었어요. 다만 가문의 어른들 중에서 못마땅해 하는 분들이 계셔서, 괜히 불러내 한 소리 하는… 그런 정도였죠.”

그러나 아무리 어린 나이라도, 그녀의 어머니가 멸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세리아가 모를 턱이 없었다.

오히려 말하자면 어린 나이일수록 아이는 어른들의 감정에 민감하다. 보통의 아이들은 그처럼 예민한 눈치를 떼를 쓰는 데 사용한다. 제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세리아는 그러지 못했을 터였다. 그녀의 말수가 적어지고, 표정이 점점 더 무표정해진 것도 그 무렵의 일일 테지.

내 추론을 증명하듯, 세리아의 고백이 이어졌다.

“사실 그렇게까지 불안해할 일은 아닌데, 그때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요. 어머니를 두고 가문의 분위기가 흉흉하다는 걸.”

“그래서 울었구나, 어머니가 떠날까 봐.”

“……네.”

세리아는 그러면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볼에 떠오른 홍조는 여전했다. 그녀가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 보면, 그 말은 곧 내가 그녀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실제로 어머니처럼 여기지는 않을 테지만, 그만큼이나 소중한 존재라는 뜻이었다.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처음으로 사귄 친구이기 때문이겠지. 그녀 또한 점점 더 인간관계가 넓어지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사실 말 몇 마디를 가지고 절교하는 친구는 없으며, 더욱이 나만을 굳이 특별 취급할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때가 되면 내 마음은 조금 쓸쓸해지겠지만, 그 이상으로 세리아가 성장했다는 뜻이니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터였다.

그래도 나는 무언가 심통이 나는 기분이라, 세리아에게 짖궂은 말을 건넸다.

“내가 그렇게 소중해? 어머니랑 비견될 만큼?”

“그, 그, 그건 그러니까…….”

세리아는 곧바로 허둥지둥하면서 무어라 변명하려 했지만, 새빨개진 그녀의 얼굴이 이미 본심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큭큭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내 두 손이 자연스레 세리아의 손을 쥐었다. 놀란 세리아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나는 진지해진 눈빛으로 말했다.

“난 고작 그 정도로 떠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앞으로는 불안해하지 말란 뜻이었다.

레토의 조언에 따르면, 여자에게는 손을 쥐고 단정적인 어조로 말해야 더욱 확신을 줄 수 있다고 들었다. 두 눈을 마주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과연 레토의 말이 효험이 있는지, 세리아의 얼굴이 다시금 달아올랐다. 그리고 시선을 살짝 내리깔면서, 묘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이제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겠지, 나는 그제야 만족해서 세리아의 손을 놓아주었다. 세리아는 일순 안타까운 듯 아, 하는 소리를 냈지만 곧 조용히 제 손을 품에 안았다.

남은 온기라도 느끼겠다는 듯. 그만큼이나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이였다.

앞으로도 신경을 많이 써주어야겠지. 최소한 세리아에게 친구가 몇 명 더 생길 때까지.

그러한 생각과 함께 세리아와 발걸음을 옮기던 내가 우뚝 멈춰선 것은, 길거리에 핀 어떤 꽃을 발견했을 때였다.

하늘빛의 꽃잎이 눈에 띄었다. 여섯 장의 꽃잎이 활짝 펴서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그 꽃의 이름을, 나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내가 발걸음을 멈추자, 세리아는 의아한 눈빛으로 내 시선을 쫓았다. 그리고 곧 자그마한 탄성을 내질렀다.

그 목소리에는 은근한 반가움이 섞여 있었다.

“아, 세피아 꽃이네요.”

“……알고 있어?”

나는 그렇게 무심코 되묻고 말았다.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였으나, 세리아는 세피아 꽃을 바라보느라 그러한 기색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는 평소와 같은 어조로 말했다.

“네, 어머니가 좋아하던 꽃이거든요. 어릴 때는 어머니가 꽃을 꺾어서 제 귓가에 꽂아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리아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드문 광경이었다. 세리아는 미소 짓는 일이 드물었는데, 그만큼이나 세피아 꽃에 얽힌 추억이 많은 듯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편지의 말미에 적혀 있던, 하나의 이름.

‘세피아’라는 예명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검술 실습 강의 때 있었던 마수의 습격과, 앞으로 있을 수렵제까지도.

내 눈동자가 조용히 내 옆에 선 여인을 향했다. 언제나 얼음 공예품 같던 그녀는, 지금 따스한 눈빛으로 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격차가 상당했다.

일순 가슴이 설렐 정도로.

“아직도 세피아 꽃을 보면, 마음이 따스해지는 느낌이 들어요. 어머니가 제게 남겨준, 몇 안 되는 추억이니까…….”

혹시 그녀가 ‘세피아’일까.

한동안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그러한 의문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

그날 오후, 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아카데미의 대로를 걷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오늘 있었던 세리아와의 기억들이, 물에 방류된 치어들처럼 마구잡이로 내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세피아’라, 과연 세리아가 그녀일까.

미래에서 연애편지를 보낸 상대, 누군가가 휘갈겨 쓴 경고를 토대로 생각해 보면 그녀와 나는 연인이 되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세계의 멸망을 막을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도 실감이 나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그럼에도 그 문구는 뾰족한 돌처럼 내 가슴에 늘 박혀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세리아와 미래에 연인 관계가 되는 걸까. 시골 자작가의 차남치고는 대단한 출세였다. 아무리 서녀라고 해도 세리아는 유르디나의 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제국 5대 명문가와 혈연으로 묶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세리아는 그 실력뿐만 아니라 미모 또한 출중한 재원, 쌍수를 들고 환영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그러나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영 미심쩍은 느낌이었다.

진짜로, 내가? 그녀와 연인이 된다고?

세리아에 비하자면 너무 급이 떨어지는 상대가 아닌가. 어쩌면 내가 괜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고작 그 정도만으로 세리아가 ‘세피아’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을 때였다. 어느 순간, 내 팔에 부드러운 충격이 전해졌다. 나는 깜짝 놀라 충격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시선을 돌렸다.

검은 머리카락, 황갈색 눈동자. 사랑스러운 외모의 소녀는,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인물이었다.

셀린 하스터, 그녀는 그녀답지 않게 어색한 미소를 띄우며 내 팔에 달라붙었다.

“우, 우, 우연이네! 이안 오빠, 아니… 오라버니?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

이 계집애가 왜 이래, 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셀린은 여전히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오늘 아침에 레토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는 셀린이 곧 내 화를 풀어주러 오리라 추측했었다. 과연 친남매처럼 자라온 사이답게 그의 예측이 옳았던 모양이었다. 안타까운 점은, 이러는 셀린의 모습을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레토는 정작 이 자리에 없다는 점일까.

나는 벌써 화가 다 풀렸다고 이야기하려다가, 괜한 호기심이 치솟아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셀린이 어떻게 나오나 보자 싶어서였다. 그러자 셀린은 더욱 초조한 눈빛이 되었다.

그녀는 곧 소매로 제 눈가를 찍어내며 우는 체를 하기 시작했다.

“이 셀린이는, 오라버니 생각에 하루도 마음이 편치 못했답니다… 그때 화내고 돌아가던, 그 냉랭한 뒷모습…….”

“아직 하루도 안 지났는데, 당연히 하루도 마음이 편치 못하지.”

“아, 어쨌든!”

내 지적에 평소처럼 짜증을 내려던 셀린은, 이내 찔끔했는지 다시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시 생글거리며 내 팔에 꾸욱 달라붙었다.

“소녀, 깊이 반성했답니다… 그때 이안 오라버니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일, 셀린이가 조금 심했어요. 그러니 화를 풀어주시겠죠?”

“싫은데.”

“아 왜애!”

셀린은 내 단호한 거절에 울상을 지으며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내게 매달렸다. 애교 섞인 목소리였다.

“화 풀어라, 응? 응? 내가 잘못했어어… 앞으로는 이안 오빠 앞에서 그렇게 싸우지 않을게.”

“내 앞이 아니면 앞으로도 그러려고?”

“아니, 근데 그 찐따년이 자꾸 신경을 긁잖… 아, 아아! 안 해, 안합니다! 셀린이 완전 항복! 이안 오빠 말 잘 들을게!”

셀린은 내 추궁에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본심을 말하려다가, 곧 내가 그녀를 뿌리치려 하자 곧바로 항복 선언을 하고 말았다.

내 입에서 피식, 하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러는 셀린의 모습이 꽤 귀여워서였다.

내 웃음소리를 들은 셀린의 얼굴에 곧장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신이 나서 내게 물었다.

“우, 웃었다? 지금 오라버니, 웃었지? 화 풀렸지?”

“글쎄, 너 하는 거 봐서.”

“에이, 화 풀렸으면서~”

그러면서 그녀는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 정말 내 화가 풀렸나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물론 내 화는 오래 전에 풀렸으므로,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나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셀린은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기분이 좋아져서, 은근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정 화 안 풀렸으면… 가슴 만질래?”

유혹하는 듯한, 달콤한 목소리. 그녀의 숨결이 귓가를 간질이자 찌르르, 하는 감각이 척추를 타고 올랐다.

그러나 내 대응은 오직 하나였다. 내 주먹이 셀린의 이마에 작렬했다.

“아얏!”

“까분다, 또.”

“아, 아프잖아!”

셀린은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이내 옆에서 무어라 궁시렁거리기 시작했다.

남자도 아니라느니, 자기처럼 예쁜 여자를 거절하다니 역사에 죄를 짓고 있다느니, 하나 같이 너무한 소리뿐이었다.

물론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셀린의 장난에 일일이 어울려 주다간 끝도 없을 테니까. 다만 그녀와 내 관계가 원래대로 돌아갔음에 흡족함을 느꼈을 뿐.

나와 셀린은 곧 평소처럼 시시덕거리며 장난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그녀와 내가 단 둘이서 걷고 있을 때였다.

턱, 하고 누군가 내 앞을 막아서는 것이 느껴졌다.

내 의아한 시선이 눈앞을 향했다. 그곳에는, 마법사들이 쓰고 다니는 고깔모자를 쓴 소녀가 버티고 서 있었다.

귀티 나는 갈색 머리카락에, 신비를 품은 푸른 눈동자. 키는 셀린보다도 작았지만, 고깔모자 덕에 조금쯤은 신장이 커 보였다. 그래봤자 어린아이처럼 보였지만.

나는 그녀의 정체를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의 옆에 울상을 짓고 따라붙은 사내가, 익숙한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루핀 라이넬라. 예전에 나한테 한 대 얻어맞은 사내였다. 다음은 없다고 경고했던 것 같은데, 담도 좋게도 또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조차도 자의로 끌려온 것은 아닐지도 몰랐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으니까. 내 눈이 조용히 소녀를 향했다.

다시 보니 소녀가 아니었다. 그 어깨에 두른 검은 망토가, 그녀의 학년을 상징하고 있었으니까.

4학년, 최고학년이었다. 그러고 보니 수렵제를 위해 하나둘씩 복귀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녀 또한 그런 모양이었다.

'엘시 라이넬라', 마도명문 라이넬라 가문의 수재 중 하나였다. 당연히 4학년 중에서도 실력파에 속하는 선배였다.

그리고 그녀를 위시로 덩치 좋은 몇몇 4학년 선배들이 내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엘시 라이넬라가 몰고 다니는 패거리일 것이다.

생긴 것은 인형처럼 생겨서, 하는 짓은 범죄조직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내 입에서 끄응, 하는 신음이 새어나왔다.

용무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지만, 나는 선배를 향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엘시 선배, 무슨 일입니까?”

“네가 내 동생 팼다며?”

단도직입적인 말이었다. 내 눈이 슬쩍 엘시 선배 뒤에 선 루핀을 향했다. 그는 귀티 나는 외모와 달리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엘시 선배에게 매달렸다.

“누, 누, 누나… 그만 두자니까! 이 새끼 보통이 아니야! 완전 미친놈이라고!”

그러나 엘시 선배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차가운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조용히 안 해? 그러니까 가문에서도 좋은 말을 못 듣지… 라이넬라 가문의 공자가 시골 자작가의 차남한테 쳐맞고 아무 말도 못하는 게 말이 돼?”

루핀은 그 말에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아직 내가 무서운 모양이었다.

셀린이 내 팔을 쥔 손에 힘을 꾸욱, 하고 주었다. 슬쩍 보니 그녀는 꽤 두려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상대는 선배들이었다. 그리고 고위 귀족들이고. 그녀가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는 나도 그래야 했을 테지만, 기억을 잃은 후 비정상적으로 담대해진 나는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엘시 선배에게 물었을 따름이었다.

“이래도 괜찮습니까? 이곳은 아카데미 한복판인데요.”

“응, 안 되지. 그러니까 우리끼리 조용한 곳으로 가자.”

그러면서 엘시 선배는 어딘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지만, 인적이 드문 공터로 가잔 뜻일 터였다.

주변을 지나다니던 학생들이 하나둘씩 모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떤 상황인지 짐작을 못할 만큼 바보 같은 사람은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나서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라이넬라 가문은 명문가였으며, 엘시 선배의 명성 또한 뛰어났다. 그녀가 데리고 다니는 패거리들도 실력이 보통은 아니겠지, 이러나 저러나 아카데미에서 4학년까지 버틴 이들이었다.

괜히 덤터기를 쓰기 싫다면, 조용히 있는 편이 맞았다. 셀린이 내 옷자락을 꾹꾹 잡아당겼다.

“이, 이안 오빠…….”

나는 잠시 셀린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엘시 선배에게 담백한 어조로 말했다.

“셀린은 보내 주시죠, 어차피 볼일 있는 쪽은 저 아닙니까.”

그 말에 엘시 선배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하고 웃었다.

“남자네? 좋아, 나도 필요 이상으로 일을 벌이고 싶진 않아.”

다시 봐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하는 짓이 전혀 그렇지 않아서 문제지.

엘시 선배가 슬쩍 눈짓을 하자, 떡대 몇 명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는 셀린을 그쪽으로 밀었다. 그녀가 엉거주춤 밀려나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난번과는 상황이 달랐다. 기습도 불가능하고, 상대는 벼르고 벼른 4학년들. 심지어 엘시 라이넬라라는 실력 있는 마법사까지.

아무래도 집중치료실 신세를 한 번 더 져야 할 것 같은데, 성녀님께 또 혼나야 할 듯 싶었다.

내가 그렇게 한숨을 내쉬고,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셀린이 결심했다는 듯 입술을 짓씹은 그때.

콱,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던 떡대 하나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풀썩, 하고 거구가 쓰러지는 소리.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 자리에 서 있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모두의 멍청한 시선이, 쓰러진 사내의 뒤통수를 향했다.

그곳에는 자그마한 수첩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모서리에 찍힌 걸까, 하지만 아무리 무거운 수첩이라고 해도 아카데미의 4학년을 일격에 기절시킬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그 수첩을 던진 인물이, 그 이상의 실력자라는 것.

눈동자가 서서히 움직였다. 수첩이 날아왔으리라고 추정되는 방향을 향해,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갈라지듯이, 인파들이 물러선다.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길이었다. 그러한 대접을 받는 여인은,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다음으로는 진홍빛 눈동자, 새하얀 피부, 그리고 늘씬한 몸매까지.

그림으로 그린 듯한 북방계 미인이었다. 그녀는 칠흑의 망토를 걸친 채로, 당당하게 걸었다. 그 뒤를 수행하듯이 몇몇 사람들이 뒤따랐다.

태양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여인, 불에 이끌리는 날벌레처럼 사람을 모으고 다니는 그녀에 대해서는 나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유르디나 가문의 적통, 북방을 지키는 금사자.

“……델핀, 유르디나.”

씹어뱉듯이, 그 이름이 엘시 선배의 입에서 뱉어졌다. 그녀의 파란 눈동자에는 벌써 노골적인 적의가 맺혀 있었다.

그러든 말든, 델핀 유르디나는 미소를 머금었다.

너무나 자신만만한 태도, 마치 엘시 선배와 그 패거리 따위는 그녀에 비하자면 작은 티끌조차 되지 않는다는 듯.

“고양이 몇 마리가 새끼 고양이를 괴롭히길래, 조금 거슬려서… 옛날 말로, '안중지정(?中之?)'이라 하던가?”

바로 그녀야말로, 세리아가 넘어서야 할 최대의 벽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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