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0화 (40/649)

〈 40화 〉 1. 첫 번째 편지(40)

* * *

아카데미 한복판에 정적이 내려앉는 일은 흔치 않았다.

유동인구만 최소 수천 명에 이르는 곳이었다. 지금만 하더라도 주위에는 최소 수백 명의 인파가 몰려 있었으며, 그중에는 교직원들도 얼핏 얼굴을 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지금의 사태에 개입할 의사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몇몇 교수들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기까지 했다. 그것이 아카데미의 정신에 가장 알맞은 반응이었다.

아카데미는 교육 기관이지만, 동시에 훈련 기관이었다. 노골적으로 규정을 위반하지만 않는다면 아카데미가 학생 간의 갈등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지금 대치하고 있는 두 파벌은, 각각 4학년을 대표하는 인물을 위시로 하고 있었다.

마법학부의 엘시 라이넬라, 그리고 검술학부의 델핀 유르디나.

뭇 사내들을 홀리는 아름다움이나, 가문의 위세, 그리고 가진 바 실력까지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유명 인사들이었다.

아무래도 엘시 선배가 델핀 선배에 비해 조금 부족하다는 인식은 존재했다. 그러나 이는 델핀 선배가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이지, 엘시 선배가 모자라다는 뜻이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는 엘시 선배가 더 나은 면도 있을 터였다. 그래서 여태껏 델핀 선배와 경쟁 구도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바로 지금처럼.

엘시 선배는 싸늘한 눈빛으로 델핀 선배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새파란 눈동자가 서릿발 같이 차가웠다. 그녀의 입술은 꾹 닫혀져 있어, 은은한 긴장감을 드러냈다.

그에 반해 델핀 선배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엘시 선배의 적의를 가득 담은 눈동자를 마주하고도 그랬다. 델핀 선배는 도도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 자리에서 하품이라도 할 듯한 태세였다.

그야말로 두 고래가 맞붙은 격이었다. 그 사이에 낀 새우가 되고 싶지 않은 구경꾼들은 숨을 죽인 채 사태의 향방을 관전했다.

본래라면 나 또한 그러한 새우 중 하나가 되어야 했으나, 그럴 수 없다는 점이 못내 안타까웠다.

나는 지금 그 두 마리의 고래가 두고 다투는 먹잇감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속으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엘시 선배 패거리한테 몇 대 얻어맞고 끝날 일이 점차 확산되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양대 가문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기라도 한다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지금 이 구도에서는 두 가문이 세력을 다투기 위한 명분도 충분했다.

애초에 라이넬라 가문의 삼남이 내게 쳐맞은 건 유르디나 가문의 일원을 건드렸기 때문이 아닌가.

유르디나 가문이 나를 보호할 이유로는 충분했다. 그렇다고 라이넬라 가문도 물러설 만한 싸움은 아니었는데, 그들로서는 시골 자작가의 차남에게 일방적으로 수모를 당한 셈이었다.

자존심 강한 고위 귀족이 이를 아무 일도 아닌 양 넘길 수는 없었다.

성녀가 나서 중재를 했다기에 이대로 잘 끝날 줄만 알았는데,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나는 말없이 마른세수를 했다. 곤혹스럽다는 뜻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내게 신경 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동안 서늘한 눈빛으로 델핀 선배를 응시하던 엘시 선배의 입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그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노골적인 조롱조가 그녀의 앙증맞은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오랜만이야, 유르디나… 그 사이에 오지랖이 꽤 넓어졌나 봐? 우리 라이넬라 가문의 행사에 간섭하고 말이야.”

이 일은 어디까지나 라이넬라 가문의 일이니, 신경 끄고 갈 길 가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그럴 작정이었으면 델핀 선배는 수첩을 던지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녀는 흐음, 하고 입술에 검지를 얹고 톡톡 두드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민에 빠진 얼굴, 그러던 그녀는 곧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언제 보아도 태양과 같이 아름다운 미소였다.

“……싫은데?”

그 담백한 대답에 엘시 선배는 울컥한 듯 보였다. 그녀의 눈매가 더욱 사나워지더니, 입술을 한 번 달싹였다.

짐작컨대 그녀가 진정으로 내뱉고 싶었던 말은 욕지거리였던 듯했다. 하지만 차마 제국 5대 명문가 중 하나인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에게 그럴 수는 없었겠지.

엘시 선배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이내 짜증이 뚝뚝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아하, 그러셔? 혹시 남몰래 이 꼬맹이를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던가? 그 정도라면야, 하룻밤 정도는 참아주지 못할 건 없는데.”

살짝 선을 넘는 발언에 구경꾼들이 숨을 삼켰다. 엘시 선배의 발언은 두 가지 의미로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의 성적 추문을 암시했다는 점.

델핀 선배는 명문가의 후계자로서, 그 정절을 소중히 여긴다. 성적 추문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엘시 선배는 마치 델핀 선배가 마음에 들기만 하면 아무 남자와도 굴러먹는 여자라도 되는 양 비꼰 것이다. 유르디나 가문에서 분개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그녀의 발언은 페르쿠스 가문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다는 점.

아무리 엘시 선배가 고위 귀족이라 해도, 나 또한 제국 귀족의 일원이었다. 함께 황제 폐하를 섬기는 신민으로서 도를 넘는 비난을 가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었다.

그녀의 말만 들으면 마치 내가 귀족 부인의 하룻밤용 남창 같지 않은가.

귀족의 언어는 그 힘만큼이나 책임도 무거웠다. 이를 모르고 있을 엘시 선배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슬슬 선을 넘는다는 건, 한 가지 의미밖에 없었다.

무력충돌을 빚어보려는 것이다. 델핀 유르디나든 이안 페르쿠스든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이라면 덤벼보라는 뜻, 그 외에는 해석의 여지가 없었다.

먼저 싸움을 걸긴 애매하니 도발해 보려는 의도가 명백했다.

델핀 선배야 그러한 모욕을 받았음에도 가문에 모든 문제를 일임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고, 나야 시골 자작의 차남에 불과하니 적당히 묵살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나는 이 순간 살짝 고민했다.

지금 엘시 선배와 그 외 떨거지들은 온 신경을 델핀 선배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이때 엘시 선배의 뒤통수라도 후려갈기면 어떨까?

“그동안 자신감을 많이 되찾았나 봐, 라이넬라… 얼마 전에도 자신만만해서 덤볐다가 망신만 당했잖아? 그때 네 시무룩한 얼굴이 꽤 볼 만했는데 말이야.”

“그건 일대일로 맞붙었을 때고, 자고로 마법의 진면목은 충분한 호위가 있을 때 발휘되는 법이지… 이때, 실험해 보겠어?”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어느새 깊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엘시 선배를 기습해서 쓰러트린다.

가능성은 있었다. 아직 엘시 선배는 내 정확한 전력을 파악하지 못했을 터다. 그날 루핀은 내게 한 대 얻어맞고 내내 기절해 있었으니, 자세한 전투 상황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물며 엘시 선배와 그 패거리들은 내가 선공을 가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4학년으로 구성된 다수의 집단, 심지어 그중에는 실력파 마법사까지 존재했다. 상식적으로 3학년이 기습한다고 해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진검을 쓴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오러를 쓰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는 현격했다. 아무리 위대한 고수라도 눈 먼 칼에 찔리면 죽음을 맞이하듯이, 오러 사용자끼리의 대결에서는 아주 잠깐의 방심조차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나는 후배에, 혼자고, 심지어 명예로운 귀족으로서 참을 수 없는 모욕까지 받지 않았는가. 자고로 귀족의 명예를 건 승부는 늘 진검승부였다.

선택을 앞둔 내 눈동자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엘시 선배도, 델핀 선배도, 그 누구도 내 변화를 눈치 채진 못했다.

“아, 좋아. 재미있겠는데… 어디 한 판 할까? 돌아오자마자 서열 정리를 해야 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서열 정리? 누가 누굴 정리해? 이 쓸데없이 반짝거리기만 하는 암코양이년이……!”

두 여인의 목소리가 교차한 그 순간, 주위에 시립해 있던 패거리들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여차하면 검을 뽑겠다는 일촉즉발의 그 순간.

엘시 선배는 살기등등한 미소를 지은 채 델핀 선배를 노려보고 있었고, 델핀 선배는 조금 차가워진 눈으로 엘시 선배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사냥꾼의 눈빛이었다. 당장 충돌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각 패거리의 이목이 상대편에게 집중되었다. 구경꾼들의 이목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백 명의 인파가 수군거리면서 엘시 선배와 델핀 선배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아카데미 한복판에서 패싸움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교수로 보이는 사람 중 몇 명은 슬슬 못마땅한 얼굴을 짓기 시작했다.

슬슬 나서야 하나, 그대로 두어야 하나 고민 중인 듯했다.

귀족의 명예를 건 승부라면 아카데미 학칙에도 부합하니 내버려 두어야 할 테고, 단순 무력충돌이라면 제지해야 할 의무가 그들에게는 있었으니까.

그들의 고민은 길지 못했다.

그러기도 전에, 빛살과도 같이 내 신형이 쏘아졌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지만, 그래.

기회가 없다면 몰라, 가능성이 생겼는데 당하고 살 수만은 없었다.

그것이 내 선택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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