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1. 첫 번째 편지(41)
* * *
팟,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발이 땅을 박찼다. 누구도 반응하지 못하는, 찰나의 순간.
멈춘 시간 속을 오로지 나만이 유영하는 듯했다. 내 손이 허리춤의 검 손잡이를 쥐었다.
목표는 당연히 나를 등지고 선 엘시 선배, 그러나 그 옆에는 듬직한 덩치의 사내가 하나 버티고 있었다.
“뭐, 뭐야 이 새끼……!”
그는 느닷없는 인기척에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가, 경악성을 내지르며 곧바로 내 앞을 막아섰다. 과연 4학년,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달리 신속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의 잘못은, 검집에서 칼을 뽑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푸슉, 하고 은빛 실선이 그어졌다. 그리고 그 선을 따라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일순 내 앞을 가로막은 사내의 시선이 멍청해졌다.
그가 칼을 채 뽑기도 전에, 은빛 오러가 맺힌 내 칼날이 그의 팔뚝을 훑고 지나갔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얕은 상처도 아니었다.
검사 하나를 무력화하기에는 충분한 부상이었다. 사내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악!”
갑작스러운 소란에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내 앞을 가로막은 사내를 밀치듯 쳐낸 내 몸이 다시 한 번 쇄도했다.
엘시 선배와 눈이 마주친 건 그때였다. 그녀의 멍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상상도 못한 일격을 허용한 맹수처럼.
그러나 내 검은 그녀에게 닿지 못했다. 또 다시 내 앞을 두 명의 사내가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오른편의 사내는 듬직한 편이었고, 왼편의 사내는 메마른 편이었다. 그러나 둘 다 검을 쥐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이 교차하듯 검을 휘둘렀다. 시간차 공격, 각도도 시점도 두 말 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단련된 검수들이란 이토록 무서운 존재였다.
찰나에 불과한 시간 속에서도 본능의 영역에서 반응하니까. 그래서 기습에는 의외성이 필요했다.
나는 그들의 검격이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지점에 멈춰 서, 쇄도하던 힘을 그대로 검에 담아 던졌다.
쐐액, 하고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검이 날아든다. 두 사내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맺혔다.
“무, 무슨……!”
검이 노리는 곳은, 당연히 엘시 선배.
검의 투로를 읽어낸 두 사내가 급히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올려베기, 내쏘아진 칼날을 쳐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내 허리춤에서 어느새 손에 익은 부무장이 뽑혀 나왔다.
팍,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내의 허벅지에 자상이 생겨났다.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고, 비명과 함께 두 검사의 자세가 허물어졌다.
“끄아악!”
“크읍……!”
4학년 중 셋이 쓰러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했다. 가속에 가속을 더한 몸뚱아리는 남들과 다른 시간대를 유영하고 있었다. 희생자들이 내지르는 비명마저 느릿하게 흘렀다.
하지만 그 찰나의 시간을 감각할 수 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두 사내의 틈을 비집듯이 타넘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어느새 고속 영창을 끝마친 엘시 선배였다.
그녀의 몸에 푸른 마력이 깃들었다. 실드(shield) 마법이었다. 모든 마법사가 익히는 기초적인 마법 중 하나이자, 만약의 사태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중요한 마법.
엘시 선배 정도의 실력자였다. 아무리 다급히 썼다지만 그 위력이 약해빠질 리는 없었다. 오러를 덧씌워도 일격에 파쇄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유효타를 몇 방이나 먹여야 한다는 뜻인데, 그 정도 시간이면 지금도 넋을 놓고 있는 나머지 패거리가 참전하기에는 충분했다.
이를 깨달은 엘시 선배의 눈동자에 우쭐한 기색이 엿보였다.
네가 어쩌겠냐는, 깔보는 시선.
그녀의 입가에는 어느새 잔혹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이 시건방진 후배를 어떻게 손봐줄까 하는 생각이 그대로 엿보였다. 마치 잠자리의 날개를 찢는 아이처럼 순진무구하면서도 악의 넘치는 시선.
그래서 나는 말없이 몸을 날렸다. 검이 아니라, 몸을.
쿵, 하고 그녀의 실드와 내 몸뚱아리가 충돌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그쯤에서 그치지 않고 억지로 몸을 밀착시켜 다시 한 번 엘시 선배를 밀었다.
실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충격만을 흡수한다. 모든 종류의 힘에 저항한다면 숨조차 쉴 수 없을 것이 뻔했다. 나는 그 아슬아슬한 선을 타넘고 있었다.
어, 어, 하는 순간 엘시 선배는 이미 넘어진 뒤였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탄 것은, 나.
“너, 너, 지금 뭐하는… 꺄아아아악!”
쾅, 쾅, 쾅! 은빛의 오러를 덧씌운 손도끼가 미친 듯이 엘시 선배의 몸을 두드렸다. 그럴 때마다 반투명한 막이 생겨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안에서, 엘시 선배는 울며 비명을 내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 그만! 사, 살려… 흐윽, 으… 살려줘! 아, 아무나… 꺄아아아아아악!”
콱, 하는 소리가 마지막이었다.
그래봐야 임시로 씌운 실드였다. 반항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도끼날이 박힌 지점을 중심으로, 반투명한 막에 균열이 번져 나갔다. 돌이킬 수 없는 속도였다. 그리고 곧 쨍그랑, 하는 파열음과 함께 실드가 산산이 깨져나갔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빛의 입자가 사방으로 비산하며 몽롱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러나 그 광경을 목도한 엘시 선배의 얼굴에는 짙은 절망이 어렸다.
공포에 젖은 그녀의 파란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 눈망울에는, 손도끼를 치켜든 내가 비치고 있었다.
엘시 선배는 더는 공포를 참지 못했다. 그녀가 비명처럼 울부짖었다.
“그, 그만!”
그 순간, 손도끼를 휘두르려던 내 팔이 우뚝 멎었다.
하아, 하아, 하고 가파른 숨결에 따라 내 가슴이 부풀었다 내려 앉았다를 반복했다. 전투에 집중하느라 몰랐는데, 꽤나 무리한 모양이었다. 폐부가 쥐어 짜이듯 아팠다.
멈춘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내게 달려들고 있던 엘시 선배의 패거리들도, 얼이 빠져 나와 엘시 선배를 바라보고 있던 델핀 선배의 패거리들도, 그리고 수백 명의 구경꾼들도 입을 굳게 다물었다.
기묘한 정적이었다. 세계가 일순 정지한 듯한 착각.
뚝, 하고 내 머리카락을 타고 떨어진 땀 한 방울이 대지를 적셨을 때에야, 다시 세상에 활기가 돌아왔다.
그 신호는, 엘시 선배의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흐윽, 흐으윽… 내가, 내가 졌어. 그, 그러니까… 흑, 제, 제발, 흐윽… 그, 그만해애… 흐윽, 흐어어엉……!”
그 울음소리는 높고 길었다. 하는 짓은 시정잡배와 같더니, 우는 소리만큼은 그 인형 같은 외모에 걸맞게 여리고 청명한 소리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 그녀로서는 치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델핀 선배도 아니고, 무시하고 있던 3학년 후배인 내게 뒤를 잡혀 처참히 패했다. 지금 울면서 목숨을 구걸하는 그녀의 기분이 어떨지, 나로서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제야 구경꾼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델핀 선배는 아직도 넋을 놓고 있었고, 엘시 선배의 패거리는 허망한 눈으로 나와 내 밑에 깔린 엘시 선배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후우, 하고 숨을 가다듬었다. 손도끼를 쥔 손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나지막이, 내가 속삭였다.
“엘시 선배, 방금 전에 뭐라 그랬죠?”
“흐으, 흐으윽… 뭐, 뭘?”
엘시 선배는 내 갑작스러운 질문에 의문을 느낀 듯, 그 물기에 젖은 푸른 눈동자에 나를 가득 담으며 물었다.
그 비 내린 날의 호수와 같은 눈동자에 반사되고 있는 내 모습은, 땀과 피에 절어 꽤 사나웠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델핀 선배에 마음에 들었으면, 하룻밤 정도면 기다려 준다고요?”
내 이어지는 목소리에, 엘시 선배는 몸을 흠칫 떨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사납고, 살기를 담은 황금색 눈동자. 엘시 선배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은 분명히 그랬다.
“그, 그건… 오, 오해! 그래, 오해가 있었어!”
“엘시 선배, 알고 계시죠? 귀족의 명예를 건 싸움은, 늘 생사결이라는 거.”
엘시 선배의 필사적인 변명에도, 손도끼를 든 내 팔이 내려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엘시 선배의 눈동자가 다시 공포로 물들었다.
그녀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자그마한 몸체가 덜덜 떨리니 몇 배는 더 애처로워 보였다. 구경꾼들도 나와 엘시 선배의 대화를 들었는지,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다급해진 쪽은 엘시 선배의 패거리였다. 그들은 내게 다가서려 하다가, 내가 몇 번 흘겨보자 뒤로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아무리 빨라도, 내 손도끼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그러자 엘시 선배는 더욱 필사적으로 변했다.
“그, 그러니까… 오해, 오해였어! 나, 나는 네 명예를 더럽힐 의도가…….”
그러나 엘시 선배의 애원은 내 표정에 아무런 파문도 일으키지 못했다. 엘시 선배의 눈동자에 어린 공포가 더더욱 짙어졌다. 그녀는 이제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
아무리 명예가 걸렸다고 해도 그것이 살인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가문 간의 앙금이 남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엘시 선배는 다소 안심하고 있었다.
패배 선언만 하면 되리라는, 잠깐의 수치만 감수하면 되리라는 안일한 생각.
그러나 실드 안에서 손도끼가 제 목을 당장이라도 내리찍을 듯이 내리쳐지고, 오러를 담은 칼날로 망설임조차 없이 제 패거리를 긋던 내 밑에 깔린 상황이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이러한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진짜로 죽이는 거 아니야?
내가 손도끼를 더욱 높이 치켜들자, 엘시 선배는 몸을 웅크린 채 비명을 내질렀다.
“자, 잘못했어! 잘못했습니다! 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사, 살려주세요! 살려줘! 누구든 나 좀 도와… 꺄아아아악!”
팍, 하고.
도끼날이 엘시 선배의 머리 바로 옆을 내리찍었다.
긴장한 낯빛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던 관중들의 눈에 안도의 기색이 스쳤다. 그래도 제 누나는 소중했는지, 여차하면 내게 달려들 듯 자세를 잡고 있던 루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구경꾼들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정작 내게 생명의 위협을 받은 엘시 선배는, 아직도 덜덜 떨리는 눈으로 제 옆을 찍은 손도끼를 훔쳐보았다.
그 서늘한 예기에 그녀의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깃들었다. 히이익, 하고 그녀가 버둥거리며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그러한 그녀의 귓가에,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엘시 선배…….”
내 눈이 흘깃 루핀을 향했다. 예전에 그녀의 남동생에게도 해주었던 이야기 같은데.
“……다음은, 없습니다.”
엘시 선배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나는 손도끼를 뽑고, 다시 허리춤에 찼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후우, 하고 숨을 내쉬니 그제야 호흡이 좀 편안해진 기분이었다.
오늘 또 미친 짓을 했다.
안전을 제일로 생각했다면 델핀 선배와 엘시 선배의 충돌이 마무리 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맞았다. 왜 이리 요즘따라 적극적으로 나서는지,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기분만은 상쾌했다. 얼떨떨한 눈으로, 나와 엘시 선배를 번갈아 보고 있던 셀린에게 내가 말했다.
“가자, 셀린.”
“……어, 어? 응, 그, 그래!”
그렇게 멍하니 서 있던 셀린을 데리고, 나는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엘시 선배의 패거리들과, 주위를 둘러싼 구경꾼들이 자연스레 물러나며 길을 만들어주었다.
그대로 그 길을 걸어가기면 하면 될 일.
그러나 자리를 뜨려던 나를 붙잡을 만한 사람은, 아직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잠깐.”
그 짤막한 부름에 내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내 지친 눈동자가 등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그 진의를 알 수 없는 핏빛 눈동자가 한 쌍.
“잠시, 대화나 나누지 않을래?”
그 델핀 유르디나가, 내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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