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2화 (42/649)

〈 42화 〉 1. 첫 번째 편지(42)

* * *

엘시 선배 패거리와 충돌을 벌인 지도 벌써 하루가 지났다.

그동안 꽤 많은 일이 있었다. 셀린에게 위험한 짓을 왜 하냐는 타박을 듣는 것은 물론이고, 혹시나 해서 들린 신전에서는 성녀님께 일장연설을 들어야 했다.

나는 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강변했으나, 그 대가로 명예가 목숨보다 중하지는 않다는 설교에 감화받은 척을 해야 했다.

성국의 사제들은 귀족에게 명예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있어 삶이란 천신 아루스에게서 부여받은 사명과도 같았다.

그런데 ‘명예’를 운운하며 그 귀중한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려 드니, 그들을 치료하는 입장으로서는 어이가 없을 만도 했다. 위험을 자처하는 것은 귀족이지만, 그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전적으로 사제의 역할이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국가마다 문화가 다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아무리 내가 설득해 봐야 성녀가 뜻을 꺾을 리는 만무했고,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고리타분한 설교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감명 받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

이를 대략 몇 분 정도 시행하면 대다수의 사제들은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인다. 성녀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안 형제님, 제 말에 그토록 감명을 받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제국 귀족들은 대개 제 말을 듣기 싫어하던데, 형제님만큼은 예외로군요. 이 또한 아루스의 은총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연분홍빛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뿌듯함이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우쭐해졌는지 어깨를 쭉 폈는데, 그러자 그러지 않아도 존재감 넘치는 그녀의 흉부 곡선이 더욱 도드라졌다.

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성호를 그었다.

아루스시여, 죄 많게 태어난 당신의 아들을 용서하소서.

그러나 성녀님은 내가 긋는 성호를 감동의 표시쯤으로 오해한 듯했다. 더욱 신이 났는지 은근히 동작이 커진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덕에 그녀의 질량감 있는 젖가슴이 탄력을 자랑했다. 나는 침음을 삼키며 다시 한 번 성호를 그었다.

아루스시여, 생각해 보니 수컷으로 태어난 것이 제 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이 또한 주의 선물로 알겠나이다. 임마누엘.

순식간에 자기합리화를 끝마친 나는, 아닌 척하면서도 흘깃흘깃 성녀님을 훔쳐보았다. 성녀님은 마지막까지 자애로운 미소를 남길 뿐이었다.

“최근 명성이 드높은 이안 형제님의 신앙이 이토록 깊으시니, 하늘에 계신 주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앞으로도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으면 좋겠군요. 임마누엘.”

그러면서 그녀는, 흘깃 나를 바라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마지막 순간, 나는 죄악감에 차마 성녀님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는 없었다.

신화에 따르면 인간은 천신 아루스와 악신 오메로스가 함께 빚은 존재다. 그런데 이성을 천신 아루스가 지은 반면, 육체는 악신 오메로스가 지었기에 아직도 인간의 육체에는 죄성이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그 말대로였다.

참으로 죄 많은 육체였다.

내가 아니라, 성녀님의 육체가.

나는 그렇게 배덕감 어린 추억을 뇌 한 켠에 구겨 넣고, 신전을 나서야 했다.

그 외에도 일은 많았다. 우선 어딜 가나 따라붙는 시선과 수군거림이 첫 번째.

기억을 잃고 난 뒤, 처음으로 눈을 떴던 날이 떠오를 정도였다. 오히려 말하자면 그때보다도 더 심한 면이 있었다.

세리아를 대련에서 쓰러트렸다는 소문은, 현실감도 없고 목격자도 100명 남짓에 불과했다. 어쩌다 운이 좋았다, 정도로 정리해도 할 말이 없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엘시 선배를 습격한 장소는 아카데미 한복판이었다. 애초에 폭력이 금지된 아카데미 내에서 이러한 볼거리가 제공되는 일 자체가 드물기도 했고, 하물며 3학년 학생이 4학년의 유명 인사를 쓰러트린 적은 더더욱 없었다.

게다가 내가 쓰러트린 상대가 엘시 선배라는 점도 소문의 확산에 한몫 했다. 엘시 라이넬라가 누구인가, 그 ‘꼬마 악당’이 아니던가.

정작 그녀 앞에서 ‘꼬마’라는 낱말 중 한 글자라도 운운했다간 지독한 응징을 각오해야겠지만,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 그 별명은 이미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자그마한 키에, 인형 같은 외모. 겉모습만 보면 분명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하지만 그 거친 입과 싸가지 없는 성격, 패거리를 몰고 다니며 학생들을 겁박하고 다니는 행태는 그녀에게 정반대의 이미지를 부여했다. 하고 다니는 짓만큼은 길거리 시정잡배와 다름이 없던 탓이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꼬마 악당’이다. 다소 귀여워 보이는 호칭이었지만, 그녀의 악랄함에 대해서는 치를 떠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러던 엘시 선배가, 패거리를 이끌고도 후배 하나를 당해내지 못한 것이다.

기습과 행운, 그리고 여러 가지 정황이 내게 유리했던 덕은 있었다. 그러나 시시콜콜한 사정까지 일일이 헤아려 가며 퍼지는 소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소문 속에서 엘시 선배는 망신 중에서도 대망신을 당한, 심지어는 내가 두려워 오줌까지 지린 못난 선배가 되어 있었다.

그 정도면 귀족의 명예고 뭐고 없었다. 평생 동안 흑역사로 안고 가야 할 터였다.

그중에서도 오줌을 지렸다는 소문에 대해서는 가문 차원에서 나서야 할지도 몰랐다. 모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그렇게 망측한 소문이 퍼져 나가면 혼삿길만 막힐 테니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조금 미안하긴 했다.

엘시 선배가 한 짓이라곤, 패거리를 끌고 와서 힘없는 후배를 인적이 드문 공터로 끌고 가 반쯤 죽을 때까지 패려고 한 것밖에 없지 않는가?

물론 이 또한 미수에 그쳤을 뿐이고, 실제로 엘시 선배가 어떤 악랄한 짓을 꾸미고 있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다시 생각해 보니 별로 미안하지 않았다. 정의는 언제나 승리하는 법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소문은 하루가 지나서도 계속 퍼져 나가고 있었다. 오히려 변형에 진화까지 거치는 중이었다. 뜬소문의 특징이었다.

레토의 귀에도 그러한 소문이 들어간 듯했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킥킥거리며 웃었다.

“이야, 이게 누구야. 아카데미의 그 유명한 ‘손도끼 공자’ 아니야?”

“뭐냐, 그 별명은.”

‘손도끼 공자’라니, 그 이상한 별명에 내 인상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그러나 레토는 내 반응을 보고 오히려 좋아 죽겠다는 듯 웃음소리를 높였다.

그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웃음을 참기 힘들다는 뜻이었다.

“풉, 큭… 아니, 누구 하나 조질 때마다 그렇게 손도끼를 애용하신다며? 테안도 손도끼에 당해, 엘시 선배도 손도끼에 당해… 덕분에 요즘 무기점에서는 부무장으로 손도끼가 유행이라더라.”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다는 듯 허,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손도끼를 애용한 까닭은, 단순히 그것이 부무장으로서 의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검사들은 검 하나만 다루기도 힘들어 하니까.

검사의 길은 길고도 험했다. 대부분의 검사들은 부무장 하나를 제대로 익히기 위해 투자할 시간으로 오러를 연마하는 편을 더욱 선호했다.

그러나 내 사례가 증명하듯이, 부무장도 일단 능숙하게 다룰 수만 있다면 실전에서 강력한 이점을 제공한다. 검을 잃어도 싸울 수 있고, 리치와 속도가 완전히 다른 새로운 무기가 등장한다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혼란을 줄 수 있었다.

심지어 나처럼 무기 투척에도 조예가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검이든, 손도끼는 던져서 다양한 변수를 창출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내가 그토록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시킨 덕이었다.

미숙한 부무장의 사용은 오히려 치명적인 빈틈을 노출할 우려를 수반했다. 하물며 손도끼 같은 부무장은 주무장보다 리치가 짧았다. 위험성도 증대되는 것은 당연했다.

나도 기억을 잃은 후, 몸이 본능처럼 손도끼를 다루지 않았다면 부무장의 추가는 꿈도 꾸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내가 쓰는 무기가 유행 중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그다지 실용성 있는 선택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를 모르고 있을 레토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그래서 그가 더더욱 즐거워하는지도 몰랐다.

그는 남의 고통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배배 꼬인 마법사의 전형이었으니까.

어째서 마법사란 족속들은 다 이따위 인간들뿐일까, 나는 속으로 한탄하는 수밖에 없었다.

“웃기지 않냐? 누구는 막, 진지하게 그러더라. 사실 네 주무장이 손도끼인데, 검으로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고… 푸하하하하!”

“웃지 마라.”

나는 너무나 즐거워하는 레토의 모습이 묘하게 거슬려 그렇게 말했지만, 레토의 웃음은 끊이지 않았다. 그는 나를 칭찬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큭큭… 그래도 잘했다, 임마. 이름 좀 날리려면 그렇게, 어? 좀 인상 깊은 이미지가 하나쯤은 있어야지. 이제 너 어디 가서 슬쩍 손도끼만 들어도 다들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칠걸?”

“아무리 그래도 그러겠냐…….”

나는 한 번 시험해 보라는 레토의 강권에 못 이겨 손도끼를 꺼냈다. 그러자 아카데미 한복판을 걸어가고 있던 재학생들이, 공포심 어린 눈으로 내 주위를 비켜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한 명성이었다. 나는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 아닌데.

세리아와 함께하는 저녁 수련 시간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나와 엘시 선배의 충돌이 다시 화두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세리아의 아쿠아마린빛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를 향한 동경과 존경의 시선이었다.

아니, 나 너보다 약한데.

그러나 차마 아끼는 후배의 존경을 뿌리칠 용기는 없어, 나는 굳이 별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심지어 세리아는 어디서 들고 왔는지, 교내 동아리에서 발행하는 신문을 하나 들고 오기까지 했다. 예전에 그녀에 대한 나쁜 소문을 쓰던, 그 신문이었다.

개인적으로 그 이후로 내게선 인식이 나빠진 신문이었으나, 세리아는 그 기사를 보지 못했던지 그다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눈을 빛내면서 기사를 몰입해 읽고 있을 정도였다.

그녀가 내게 기사 하나를 내밀었다. 그 헤드라인은 다음과 같았다.

‘꼬마 악당 참교육 사건! 홀대받던 제국 하급귀족의 반란은 어디까지?’

“반란이라니, 뭐 이따위 참람한 말을 귀족한테…….”

그 한 줄만 읽고도 나는 황당한 마음에 그렇게 중얼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반역은 중죄였다. 어느 나라에서든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제국 출신이든 열왕국 출신이든 귀족은 그 비슷한 말조차 꺼내기 꺼리는 편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아카데미라지만, ‘반란’ 같은 표현을 쓰다니.

벌써 어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하물며 ‘하급 귀족’이라는 표현의 대칭점에는 누가 봐도 ‘고위 귀족’이 위치하고 있음이 암시되고 있지 않은가.

바깥에서도, 아카데미에서도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고위 귀족들에게 밉보여 좋을 턱이 없었다. 단 한 줄만 읽었음에도 정신적 피로가 쌓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내 마음과는 달리, 세리아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넸다. 그래봐야 남들은 구분할 수도 없는, 아주 미세한 차이에 불과했지만.

“이안 선배, 그 엘시 라이넬라를 이기다니… 대단하세요.”

“아니, 운이 좋았던 것뿐이야.”

그리고 느닷없이 진검을 뽑은 덕도 좀 봤고, 상대가 방심한 덕도 있었다.

정면에서 일대일로 맞붙었다면 그 패거리 중 하나나 둘은 이겼을까?

그마저도 최근 내 실력이 급성장하고 있다는 점과, 손도끼라는 부무장의 실전성에 기대서 내린 후한 평가였다.

물론 3학년이 4학년을 두고 ‘하나나 둘’을 이야기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미 실력이 꽤 있다는 뜻이긴 했다. 다시 생각해도 경탄스러운 일이었다.

기억을 잃고 나서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실전을 겪을수록 내 실력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다만 한계는 있었다. 그래봐야 ‘실전에 강하다’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고, 여전히 내 기본기와 마력량은 과거에 비해 조금 나아진 수준에 불과했다.

결국 진정한 실력은 변수와 의외성에서 드러나지 않고, 탄탄한 기본기와 마력량으로부터 나온다. 이를 보완하는 것이 앞으로 내가 해결해야 할 숙제가 될 터였다.

그러나 내 생각이 어찌됐든, 세리아는 내가 아카데미에서도 유명한 실력파 선배를 이겼다니 마냥 좋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희미한 즐거움이 어렸다.

“그래도 이안 선배가 대단하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요. 어떻게 그 시점에 기습할 생각을 하셨나요?”

“글쎄, 그냥 그러고 싶던데.”

조금 이상해 보이는 발언이었지만, 세리아는 과연 진정한 고수는 직감부터가 남다르다며 감탄을 터트렸다.

이쯤 되니 내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오러를 쓴다는 가정 하에 지금 내가 세리아와 맞붙는다면, 십중팔구는 내 패배로 끝이 날 터였다. 그러한 상대에게 금칠을 당하고 있으니 불편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세리아의 의아한 시선이 나를 향하자, 나는 마침 생각난 이야깃거리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나 만났어.”

“……?”

“네 이복 언니.”

아, 하고 세리아의 입에서 옅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기색이 다소 우울해졌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눅이 들었다’라는 표현이 알맞을 터였다.

그만큼이나 세리아에게 그녀의 이복 언니는 거대한 벽인 듯했다.

하기야 아카데미 최고학년인 4학년 중에서도 검술학부 수석이다. 그 실력이 어떨지는 겪어 보지 않아도 대략 짐작이 갔다.

세리아는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어떠셨나요?”

“평가를 내리기엔 너무 짧은 만남이었어. 의외로 내게 호의적이던데? 아, 그리고.”

나는 탁, 하고 손바닥을 치며 막 떠오른 기억을 세리아에게 이야기했다. 세리아의 눈동자에 의아한 빛이 머물렀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오늘밤에, 따로 만나기로 했어. 단 둘이서.”

세리아의 낯빛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녀의 보석 같은 눈동자에서 일순 빛이 꺼졌다. 극적인 반응이라서, 나는 당황하는 수밖에 없었다.

세리아가 왜 이러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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