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1. 첫 번째 편지(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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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었으나 아카데미에서는 빛과 열이 가시지 않았다.
사시사철 불이 꺼지지 않은 아카데미의 연구동은 하나의 등대와 같았다. 그곳에서는 수많은 학자들이 머리를 싸매고 학문에 전념하고 있을 터였다.
굳이 연구동뿐만이 아니더라도, 아카데미의 밤은 늘 밝았다. 수만 명에 이르는 인구가 상주 중인 이곳은 그 자체로 하나의 번화가를 이룰 조건을 만족하기에 충분했다.
지금 내가 앞에 선 화려한 건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건물에서는 은은한 조명이 뿜어져 나오며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기숙사 중 한 곳이었다. 고위 귀족 중에서도 값비싼 기숙사비를 감당할 수 있으며, 가진 바 실력까지 출중한 이들만이 입사할 수 있다고 전해지는 장소.
위대한 정복황제의 이름을 딴 ‘아이달로스 관’은 밤에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했다. 머무르는 학생들보다 그들을 시중 드는 사용인이 몇 배는 더 많다고 전해지는 곳이었다.
나 또한 나름 귀족 기숙사에 머무르고 있긴 하지만, 아이달로스 관은 차원이 달랐다.
내 방은 혼자 살기 적당한 크기의 1인실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곳은 방 하나하나가 저택의 크기를 방불케 한다고 들었다.
저 넓은 건물에 고작해야 수십 명만이 살고 있다니, 그 호화로움을 짐작할 만했다. 나는 그 아이달로스 관을 앞에 두고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괜한 긴장감에 손끝이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인연도 없는 아이달로스 관을 방문할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바로 델핀 유르디나가 나를 초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제국 5대 가문의 후계자이자 아카데미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였다. 아이달로스 관에 머물 자격이 충분했고, 제국에 특권을 거부하는 귀족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를 이 호화로운 기숙사로 부를 사람도 그녀뿐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무려 그 델핀 유르디나의 사적인 공간에 초대받은 것이다.
야밤에 남녀가 단 둘이 만나는데, 그 장소가 여인의 방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묘한 느낌이 풍겨왔지만 이미 약속을 맺은 뒤였다.
그럼에도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언제나 당당한 제국 귀족답게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딛으려 했다.
내 뒤를 졸졸 따라온 누군가만 아니었다면.
꾸욱, 하고 발걸음을 내딛으려던 내 옷자락을 누군가 힘을 주어 쥐었다. 내 눈이 자연스레 등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회색 머리카락과 짙푸른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소녀가, 다소 물기 어린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세리아였다. 내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세리아, 걱정하지 말라니깐.”
“그, 그래도…….”
세리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내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을 푸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내게 델핀 선배와의 약속이 있단 말을 들은 이후 쭉 이 상태였다. 저녁 수련이 끝난 뒤에도 내 뒤를 졸졸 따라와 ‘조심하라’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무슨 고위 마수를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고, 델핀 선배도 교양과 학식을 갖춘 귀족 영애일 텐데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세리아에게 까닭을 물어보기라도 하면,
“언니께서는, 일단 마음에 들면 어떻게든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거든요. 남에게 빼앗아서라도.”
혹시 내 손도끼가 마음에 들었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적당한 값을 치르고 팔아치워도 상관없었다.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가 돈이 부족할 일은 없을 테니까, 오히려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을지도.
내 그러한 위로에도 세리아는 울상을 지을 뿐이었다. 그녀가 이토록 내게 간절한 시선을 보낸 적은 없었기에 나는 난감한 기분이었다.
귀족이 돼서 약속을 어길 수도 없고, 애초에 단 둘이 보기로 했으니 세리아를 데려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세리아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세리아, 이제 가볼 시간이야. 설마 내게 약속을 어기는 불명예를 안기고 싶은 생각은 아니겠지?”
“그, 그렇겠죠…….”
내 엄격한 목소리에 세리아도 더는 나를 붙들기 힘들었던지, 시무룩해진 기색으로 서서히 내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그 모습이 꽤 귀여웠다. 처음 만났을 때는 얼음 조각처럼 차가운 낯빛만 보여주었는데, 어느새 그녀는 꽤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상대가 오직 나뿐이라는 사실이, 내게 흐릿한 만족감을 주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나는 가슴 속에 도사리는 음습한 욕망을 억눌렀다. 그리고 세리아를 안심시킬 때 늘 그랬듯이, 세리아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벌써 몇 번은 겪은 일이지만, 손을 잡을 때마다 세리아는 화들짝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곤 했다. 나는 그때 진심을 담아 세리아에게 말하곤 했다.
“나도 델핀 선배를 만나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무엇이든 뺏기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세리아.”
“……네. 이안 선배의 말이니까, 믿을게요.”
세리아는 그제야 어느 정도 안심이 된다는 듯, 볼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밤에 보니 그 미모가 더욱 빛이 났다. 이처럼 어여쁜 후배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건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들어선 아이달로스 관의 내부는 과연, 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화려하고 고풍스러웠다.
고작해야 로비에 불과할 뿐인데, 수십 명의 사용인들이 오고가며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나를 입구에서 맞이한 관리인 또한 그중 하나였다.
그는 이미 델핀 선배에게 이야기를 들었다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익숙한 듯 앞장서서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깔끔한 일처리였다. 나는 도시에 처음 나온 촌놈처럼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며 아이달로스 관의 내부를 감상했다.
앞으로 내가 아이달로스 관을 얼마나 볼 수 있겠는가.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아이달로스 관의 내부 풍경을 머리에 꾹꾹 눌러담았다.
나중에 레토와 셀린에게 자랑할 심산이었다. 그 비밀스러운 아이달로스 관의 내부 이야기였다. 나와 함께 제국의 하급귀족 삼총사를 이루고 있는 그 둘에게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될 터였다.
그러한 생각과 함께 걷다 보니, 어느새 어느 문 앞이었다. 단 한 사람이 살고 있는 방의 문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큰 문.
똑똑, 하고 나를 안내한 관리인이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델핀 유르디나 님, 일전에 말씀하셨던 이안 페르쿠스 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안에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 대신, 문이 저절로 열렸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관리인은 이미 수천 번은 본 광경이라는 듯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는 내게 고개를 숙인 채, 안쪽을 팔로 가리켰다. 들어가라는 뜻이었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이 앞은 그 델핀 유르디나의 개인실이었다. 아무에게나 공개하지 않을 그 비밀스러운 공간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배덕감이, 일순 나를 망설이게끔 했다.
그러나 나는 곧 고개를 저으며 잡념을 털어냈다. 얼마 전에 처음 본 사내를 초대할 정도로 배짱이 있는 여인이었다. 나를 딱히 특별히 생각할 것 같지는 않았고, 어쩌면 그녀의 개인실은 델핀 유르디나에게 있어 또 하나의 사교장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며 델핀 선배의 방에 들어선 나를 맞이하는 건.
“……오랜만이야, ‘손도끼 공자’.”
나체에 가운만을 걸친 채로, 흐트러진 자세로 앉아 있는 델핀 선배였다.
은은한 방의 주홍빛 조명이 그녀의 새하얀 피부를 비추었다. 그리고 꿀처럼 진득한 권태를 담은 진홍빛 눈동자와, 매력적인 입술.
찬란한 금발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달라붙은 가운이 드러내고 있는, 그녀가 지닌 여성으로서의 곡선.
일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녀의 방에서는 짙은 향기가 났다. 무슨 향기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단지 여인의 냄새라는, 그러한 생각만이 뇌리를 스쳤을 뿐.
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진,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홀린 듯 가운 사이로 드러난 델핀 선배의 봉긋한 가슴골을 감상하고 있던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자마자 펄쩍 뛰며 외쳤다.
“아니, 아니, 아니… 아무리 그래도 뭐라도 좀 챙겨 입으셔야죠!”
그러면서 나는 곧바로 시선을 돌렸으나, 델핀 선배의 표정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잔에 담긴 포도주를 홀짝이며, 오히려 의아한 목소리로 내게 물어왔다.
“……왜?”
고개를 갸웃, 하면서 던진 질문.
그 질문에 내 뇌리가 잠시 표백됐다. 왜냐고? 까닭이야 많았다. 나는 당황한 와중에도 더듬거리며 이유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그… 저는 외간남자고, 델핀 선배께서는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로서 그 고귀한 몸을 조금 더 소중히 여기실 필요가…….”
“혹시 보기 추한가?”
“아니요! 저, 예쁘긴 한데…….”
정절의 중요성을 강변하던 내 말끝이 흐려지자, 델핀 선배는 피식, 하고 웃고 말았다.
그녀의 핏빛 눈동자가 조용히 나를 응시했다. 당황한 듯 시선을 피하면서도, 흘깃흘깃 그녀를 살피는 내 모습을 확인한 그녀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맺혔다.
“그렇다면 마음껏 보도록, 아마 보기 드문 예술품일 테니… 옛말로, ‘창해유주(????)’라고 하던가?.”
그리고 그녀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사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가운의 부드러운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얼핏 그녀의 새하얀 나신이 조금 더 드러난 듯한 느낌도 들었다.
델핀 선배가 다가올수록, 나는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물러섰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그녀는 소리 없이 걸어,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녀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내 방에 온 것을 환영해, 이안 페르쿠스.”
나는 그제야, 세리아의 경고를 다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델핀 선배를 조심하라던 그 말.
무엇인가를 빼앗길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내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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