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1. 첫 번째 편지(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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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핀 선배는 내 연이은 간청에 결국 옷매무새를 여몄다. 내 맞은편에 앉은 그녀의 핏빛 눈동자에는 묘한 짜증마저 맺혀 있었다.
조금 미움을 샀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내심은 조금 아쉽기도 했다. 델핀 선배의 말처럼, 그녀의 나신은 하나의 예술품처럼 아름다웠으니까.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대로 있다가는 내가 견딜 수가 없었다.
방 안에 흐르는 달콤한 향기, 은은한 조명이 연출하는 낭만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보기 드문 미모를 갖춘 반나체의 여인까지.
사내를 사냥하는 파리지옥이 있다면, 이 방의 모습을 하고 있을 터였다. 델핀 선배가 옷매무새를 여미고 나서야,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래봐야 여전히 델핀 선배는 아름다웠고, 가운 사이로 쭉 뻗은 그녀의 새하얀 다리가 어김없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내밀한 굴곡까지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만으로도 내게는 다행이었다. 방금 전 그녀가 다가왔을 때, 그 꽃과 같은 살내음에 일순 정신이 몽롱해졌지만 지금은 그래도 정신줄을 붙잡고 있지 않은가.
대화는 양측이 모두 이성적일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여인에 홀린 사내가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델핀 선배의 노림수 또한 미인계에 있었을지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려다가, 이내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 델핀 유르디나가, 고작 시골 자작가의 차남을 상대하려고 미인계를 쓴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녀도 할 수 있고, 내가 구할 수 있는 물건이라면 그녀도 구할 수 있었다. 실력이든 재력이든 지위든 어느 쪽이라도 나보다 델핀 선배가 우위였다.
내게 미인계를 쓸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니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지금 보여주는 델핀 선배의 모습은 평소대로의 그녀라는 뜻이었다.
내가 남몰래 한숨을 내쉬는 사이, 델핀 선배의 입이 열렸다. 고혹적인 목소리였다.
“손도끼를 휘두를 때는 그렇게 야수 같더니, 지금은 정절을 중시하는 어수룩한 샌님 같이 구네. 조금 실망했어, 손도끼 공자.”
나는 투덜거리는 델핀 선배의 모습에 헛웃음을 삼켜야 했다.
이 아가씨가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네, 외간 남자 앞에서. 잘못하면 혼삿길이 막힐 만한 추문으로 번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귀족만큼 정절을 까다롭게 따지는 존재들은 없었다. 뒤에서는 아무리 더럽고 추잡한 짓을 저지르더라도,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한 점의 흠결도 없이 깨끗해야 하는 것이 귀족이었다.
그런데 야밤에 남녀가 단 둘이 만나는데, 여인이 반나체로 있었다?
이 소문이 퍼지는 순간 그녀의 이미지에 타격이 갈 것은 분명했다. 그래봐야 ‘델핀 유르디나’라는 상품 가치가 워낙 월등하기에 흠집 수준에 불과하겠지만.
그래서 나는 조심스레 델핀 선배에게 조언했다. 주제 넘는 짓이었다.
“델핀 선배, 아무리 그래도 귀족이라면 몸을 보다 소중히 여겨야…….”
“필요 없으니까.”
그러나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델핀 선배는 그렇게 단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짧고 담백한 대답, 그래서 나는 도리어 당황하고 말았다.
“……네?”
“필요 없다고 말했어, 손도끼 공자. 왜 여인들이 사내들 앞에서 몸을 꽁꽁 싸매고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은 있나?”
델핀 선배의 나른한 질문에 내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러한 사회 제도 전반에 대한 논의는 내 전문이 아니었다. 레토라면 몰라.
하지만 최소한 상식적인 선의 답변은 할 수 있었다. 나는 얼마 전 성녀님께 들었던 설교를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야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육체는 이성과 달리 악신 오메로스의 손으로 빚어진지라 죄를 낳는…….”
“그러니까 필요가 없다는 거야.”
또 다시 단호한 목소리.
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델핀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느긋한 동작으로 빈잔 하나에 포도주를 따랐다.
쪼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향긋한 주향이 퍼져 나갔다. 그녀가 툭, 하고 잔을 밀자 잔이 주르륵 미끄러지며 내 앞으로 당도했다. 예술적인 힘 조절이었다.
코끝을 스치는 향만 맡아도 알 수 있었다. 고급품이었다. 그야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가 마시는 포도주니, 싸구려는 아닐 터였다.
이 한 잔이, 도대체 몇 골드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 잠시 이를 가늠해 보려던 나는, 곧 무의미한 일이란 생각에 그만두었다.
어차피 나와 그녀는 사는 세계가 달랐다. 내가 끙끙거리며 계산해 봐야, 그녀 앞에서는 하잘 것 없는 고민에 불과할 터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포도주를 들이키는 것, 나는 술잔에 담긴 포도주를 그대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달콤한 맛과 씁쓸한 풍미, 그리고 식도를 타고 넘어오는 포도주 특유의 그윽한 향까지.
좋았다. 술맛을 잘 모르는 나라도 알 수 있을 만큼 평범한 기성품과는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 내가 그렇게 첫 잔을 단숨에 들이키자, 델핀 선배의 눈에 은근한 만족감이 어렸다.
호쾌한 음주 방식을 즐기는 듯했다. 그녀도 북부 출신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그 혹한의 환경에서 생존해 온 인간들이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다소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다.
생김새만 보면 까다로운 식사 예절을 일일이 따질 것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그 귀족스러운 외모와 그녀의 취향이 다소 괴리되어 있어 조금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아름다운 것은, 소유욕을 불러일으키지. 누구나 그래. 여성의 육체 또한 마찬가지야, 아름다울수록 사내들의 음심을 자극하지. 제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그런 생각들…….”
그러면서 델핀 선배는 다시 술병을 들었다. 그녀의 빈 잔에 포도주가 들어찼고,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한 잔 더 하겠냐는 눈빛.
나는 말없이 잔을 내밀었고, 술병이 기울었다. 쪼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퍼져 나가는 달콤한 향기.
델핀 선배는 권태로운 손짓으로 술병을 거두어들였다. 그녀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인들이 ‘정절’이니 뭐니 하면서 몸을 싸매는 거야. 그래야만 사내들의 욕망을 잠재울 수 있으니까. 혹은, 가장 치명적인 순간에 무기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르고… 어느 쪽이든 간에 약자들의 생각에 불과해.”
“……어떤 의미에서 말입니까?”
“아무도 나를 가질 수 없는데, 왜 두려워해야 하지?”
오만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델핀 선배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말한다는 듯, 한 점의 의문조차 남아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설령 어떤 사내가 미쳐서 그녀를 덮치려고 든다 한들, 그녀를 무력으로 꺾을 수 있는 이는 드물 테니까.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잠깐 정신이 나가서 그녀를 덮치려 해봐야 몇 초 안에 제압당하고 말 터였다. 그래서 델핀 선배는 내게 나체를 보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는 강하기 때문이다. 그 광오한 자신감이야말로 ‘델핀 유르디나’라는 인간의 토대를 이루는 근원으로 보였다.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소유당하지 않는 여인.
나는 말없이 술을 한 잔 들이켰다. 이제야 조금쯤 그녀를 이해했다는 듯, 내 입에서 한숨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필요 없다’라고 하신 거군요.”
“그래, 나는 필요 없는 걸 싫어하거든. 아름다운 것은 뽐낼수록 더욱 가치 있어지는 법이지, 그렇지 않아?”
그녀는 그러면서 슬쩍 눈웃음을 지었다. 내 시선이 무심코 그녀의 뽀얀 살결로 향하는 것을 느낀 듯했다. 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눈을 돌렸다.
술을 마시니 또 제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위로하듯 내게 말했다.
“보고 싶다면 얼마든지 봐도 좋아, 흔치 않은 기회거든. 아무리 나라도 아무한테나 내 몸을 자랑하지는 않아.”
내 의아한 시선이 델핀 선배를 향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반나체를 보이는 상대도 기준이 있다는 말인가.
후후, 하고 델핀 선배의 입에서 옅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곧 내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오직 가치 있는 인간만이, 아름다운 것을 볼 자격이 있지.”
“‘가치 있는 인간’이라뇨?”
“후후, 그래. 다른 표현으로는… '쓸모 있는 인간' 말이야.”
노골적인 표현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불쾌하다고 여길 수도 있는 발언.
그러나 나는 그 말이 그다지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델핀 유르디나라면 마땅히 그러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일전에 세리아와 나누었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델핀 선배가 어린 시절의 세리아에게 던졌다던 그 말, ‘너도 쓸모를 증명하지 못하면, 저렇게 될지도 모른다.’였던가.
나는 말없이 술을 홀짝였다. 델핀 선배는 그러든 말든 제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갔다.
“내가 세상을 보는 관점은 오직 하나뿐이야.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 그 외의 관점들은 무용하지. 그런 의미에서, 너는 꽤 쓸 만한 인간이야.”
“엘시 선배를 쓰러트렸으니까요?”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려오던데.”
델핀 선배가 다리를 꼬고 앉은 것은 그때쯤이었다. 매끄럽고 탐스러운 허벅지가 슬쩍 드러났다. 내 눈이 절로 그곳을 향할 뻔했으나, 나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계속해서 휘둘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포도주를 들이켰다.
델핀 선배는 그러는 내가 귀엽다는 듯 쿡쿡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그녀가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들었어, 요즘 세리아랑 어울려 다닌다는 말.”
“의외로 좋은 후배더군요. 사회성이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검에 대한 재능은 뛰어나지만, 영 인간관계에는 소질이 없어 보였거든… 아무리 배 다른 동생이라도 유르디나의 일원인데, 저러다 평생 친구 하나 못 사귈까 걱정했었지.”
그렇게 말하는 델핀 선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그녀 나름대로 세리아에 대해 애정을 품고 있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으니, 그럴지도 몰랐다.
조금쯤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던 델핀 선배는, 잠시 침묵했다.
톡, 톡, 그녀의 검지가 탁자를 두드렸다. 생각에 잠긴 그녀의 핏빛 눈동자가 창밖을 향했다. 창으로 스며드는 달빛이 그녀를 도드라지게 하기 위한 조명처럼 느껴졌다. 그림과도 같은 광경.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나를 향한 것은,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흥미로운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 아무리 아카데미 3학년이라도 중하위권에 불과하던 사내가, 요즘 믿을 수 없는 활약을 보여준다는 소문이라든가.”
“운이 좋았죠.”
스스로를 낮추는 내 말에 델핀 선배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 뻔하디 뻔한 겸손의 말이 우습다는 듯이.
“겸양의 말은 필요 없어. 중요한 건 결과야. 운이 한 번 따라준다면 우연이지만, 여러 번 반복된다면 실력이지. 그리고, 나는 실력 있는 사람을 좋아해.”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델핀 선배가 들고 있던 술잔이 식탁에 내려졌다. 그녀의 볼에는 불그스름한 홍조가 감돌고 있었다. 술기운이 올라온다는 뜻이었다.
증기처럼 뜨거운 기운이 식도를 타고 머리를 찌르는 느낌이었다. 내게도 슬슬 술기운이 돌고 있었다. 델핀 선배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알고 있겠지?”
나는 대답 대신 침음을 삼켰다. 그 질문의 의도를 읽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의외였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렇게 나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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