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5화 (45/649)

〈 45화 〉 1. 첫 번째 편지(45)

* * *

내 입이 다시 열릴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델핀 선배의 제안이 의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본의를 읽지 못할 만큼 그녀의 말이 불분명하지는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일종의 영입 제안이군요.”

델핀 선배는 내 대답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새하얀 손이 술병을 기울였다. 곧 빈 잔에 술이 차올랐다. 그녀가 입을 댄 잔이었다.

그녀는 그 잔을 다시 드는 대신, 다시 한 번 톡, 하고 밀어냈다.

주르륵, 하고 내 앞에 또 하나의 술잔이 당도했다. 나는 무슨 뜻이냐는 듯 델핀 선배를 바라보았다.

델핀 선배는, 턱을 괸 채 권태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북부에서는, 함께하자는 의미로 커다란 뿔잔에 술을 가득 부어서 나눠 마시지. 전우끼리 나누는 의식이야. 하지만 뭐, 아카데미 한복판에서 그럴 수는 없잖아?”

다소 야만적으로 보이고 말이야, 그녀는 그렇게 덧붙이면서 눈짓으로 술잔을 가리켰다.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 단지, 조금 더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해. 그러다 마음에 들면… 알지?”

그때는 정식으로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나는 이쯤에서 다시 고뇌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잡담이나 몇 마디 나눌 줄 알았지, 델핀 선배로부터 이러한 제안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너무 진도가 빨랐기 때문이었다.

아카데미 4학년쯤 되면, 고위 귀족들이 제 패거리를 모으는 경향이 있긴 했다. 졸업 이후 함께할 인재들을 미리 영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는 대개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끼리 자연스레 누군가를 중심으로 뭉치며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귀족들이 필요에 따라 합종연횡을 반복하는 일쯤이야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그러나 ‘함께한다’라는 말은 조금 의미가 달랐다. 이는 곧 동지가 된다는 뜻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신뢰를 쌓는 과정이 필수적이었다.

믿지 못할 상대에게 제 등 뒤를 맡기는 멍청이는 아카데미에 존재하지 않았다. 간혹 그런 멍청이가 들어오더라도 낙제를 면치 못할 테니까.

따라서 지금 델핀 선배의 제안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필요가 있었다.

하나, 내가 그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는 뜻.

그리고 또 하나, 나를 지금 당장 영입해야 할 모종의 이유가 있다는 뜻.

어느 쪽이든 내게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어차피 나는 차남에 불과했고, 작위는 장남인 형이 승계할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나도 따로 살 길을 마련해야 했다.

그 길이 제국의 5대 명문가 중 하나라면, 두말 할 나위 없이 좋았다. 심지어 그 후계자에게 직접 제안을 받은 셈이 아닌가.

나는 그녀가 준 잔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이대로 술잔을 들이키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델핀 선배처럼 아리따운 여인과 간접 키스도 할 수 있고,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내가 멈칫할 수밖에 없었던 건, 여전히 내 머리 한구석에 돌멩이처럼 박힌 의심이 가시지 않은 탓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잔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뗐다. 그러자 델핀 선배는 의외라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오, 하는 옅은 탄성과 함께 그녀의 입에 흥미롭다는 미소가 번졌다.

“조건이 확실하지 않아서 그런가? 의외로 깐깐하네, 손도끼 공자님은.”

“……궁금한 점이 하나 있어서요.”

말해보라는 듯, 델핀 선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더는 주저하지 않기로 했다.

“세리아가 최근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거, 알고 계셨습니까?”

그 말에 델핀 선배는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고작해야 그 정도가 궁금했냐는 듯, 그녀는 턱을 괴고 있던 자세를 바로하며 새 잔을 꺼냈다.

술잔에 술이 차오른다. 델핀 선배는 시시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 듣기는 했어. 그런데 내가 나서기도 전에 네가 정리했다며? 후후, 재주도 좋아. 세리아의 어머니 이야기는, 나도 가슴 아프지만…….”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가 돌았을까요?”

술잔을 기울이려던 델핀 선배의 손이, 그대로 멎었다. 그녀의 진홍빛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혹시 잘못 짚은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기왕 내친김이었다.

나는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감각을 느끼면서, 계속해서 추론을 이어갔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세리아는 유르디나의 성을 받았고, 고위 귀족입니다. 세리아의 어머니가 유르디나 가문의 금기나 다름없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급 귀족들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가문의 수치를 언급하는 건 부자연스러워요.”

그러자 흐음, 하고 델핀 선배는 묘한 소리를 내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흥미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적은 더 많아지는 법이지. 그것이 권력의 속성이야. 나를 시기하는 고위 귀족 가문이 있었을 수도 있지, 예를 들어 라이넬라라든가?”

“그렇다면 델핀 선배를 음해했겠죠, 세리아를 음해해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심지어 세리아의 어머니는 가문의 일원도 아니에요. 유르디나 가문이 아니라, 오직 세리아만의 약점이죠.”

델핀 선배는 포도주를 홀짝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나를 향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태연자약한 태도가 오히려 더욱 거슬렸다.

묘한 직감이었다. 내 목소리가 조금 더 진중하게 내리깔렸다.

“제국의 5대 귀족 가문의 수치를 건드리고도,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한 뒷배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겠지, 그래서?”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만한 사람이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아요.”

그때까지도 델핀 선배의 시선은 창밖을 향해 있었다. 그 꿀과 같이 권태로운 시선, 마치 세상사에는 별다른 흥미가 없다는 그 눈빛.

그래서 나는 마지막 순간, 한 번 더 번민하는 수밖에 없었다.

델핀 선배는 너무나 멀쩡해 보였다. 그야말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야기를 듣는다는 듯이, 마치 ‘흥미’라는 감정이 증발하기라도 한 듯한 표정.

정녕 의심 받는 인간이 그러한 얼굴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제 와서 멈추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내가 델핀 선배의 초대를 받아들인 이유, 그 단 한 가지의 의문이 언어의 옷을 입고 뱉어졌다.

“……델핀 선배가 그랬습니까?”

델핀 선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포도주를 홀짝이면서, 창밖의 풍경을 감상했다. 조명이 켜진 아이달로스 관의 풍경은 아늑한 분위기를 풍겼다.

나도 침묵을 지켰다. 하고 싶은 말은 전부 다 했다.

델핀 선배가 긍정하면 긍정하는 대로, 부정하면 부정하는 대로 내가 더 이야기 할 건덕지는 없었다. 내가 내뱉은 말은 어디까지나 어설픈 추리에 불과했으니까.

만약 레토나 셀린이었으면 좀 더 구체적인 얼개를 짜올렸을지도 몰랐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 둘의 조언을 받았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만약 정말로 그랬다면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면치 못했을 터였다.

그 델핀 유르디나가, 배 다른 동생이라지만 제 동생의 아픈 가정사를 이용한다?

그 목적조차 불분명했다. 동기가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추리라도 써먹을 데가 없었다. 하물며 상대는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가 아닌가.

의심만으로도 중죄했다. 귀족에게 있어 명예는 목숨보다 중요했다. 그리고 이러한 의심은 그 자체로 델핀 선배의 명예를 손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다시 말해 나는 오늘도 미친 짓을 했단 뜻이었다. 지금은 그 결과를 판결을 앞둔 죄수의 심정처럼 기다리는 중이고.

목이 타서, 나는 두 개의 술잔 중 내가 쓰던 잔을 들었다. 그곳에는 포도주가 조금 남아있었다. 나는 이를 단번에 들이켰다.

델핀 선배의 입이 열린 것은, 그러고도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뒤의 일이었다.

“……내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그녀의 말은 내 추측의 아픈 지점을 찌르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답했다.

“그거야 저도 모르죠. 단지, 조금 궁금했을 뿐입니다.”

델핀 선배의 눈동자가 그제야 나를 향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루비를 연상시키는, 그 타오르는 듯한 진홍빛.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의 입가에, 옅은 호선이 그어졌다.

“그 말, 얼마나 무례한 건지는 알고 있겠지?”

나는 찔끔해서 그녀의 시선을 피해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델핀 선배가 흐릿한 미소를 짓는 것으로 보아 분위기가 나빠 보이지는 않았지만, 또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 내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델핀 선배의 입에서 자그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맑고 청명한 웃음소리였다. 나는 도무지 델핀 선배가 웃는 까닭을 알 수 없어서,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웃음을 터트리던 그녀의 눈이, 나를 담았다. 그녀의 루비를 닮은 눈동자에는 어느새 짙은 흥미가 머무르고 있었다.

“재미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담이 너무 크단 말이지? 그 엘시 라이넬라를 손도끼로 위협하던 것도 모자라, 이 델핀 유르디나의 면전에서 그런 의심을 꺼낸다고?”

“그,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

“아니야, 아니야. 용기에는 대가가 따라야지. 북부의 귀족답게, 네게 솔직히 답해줄게.”

그러면서, 델핀 선배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로 내게 말했다. 너무나 평온한 표정.

“……맞아, 내가 했어.”

그래서, 나는 잠시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평탄한 어조와 그 내용의 괴리감이 순간적으로 내 사고회로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내 멍청한 시선이 델핀 선배를 향했다.

그녀는, 싱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와 처음 마주쳤던 그날처럼.

“내가 했다고, 네 말처럼.”

변함없이 아름다운 미소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품은 감상은 정반대였다.

그때는 북풍 속에서 찬란한 태양을 마주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그래.

맹수의 시선을 마주한 듯, 피가 싸늘하게 굳는 느낌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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