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1. 첫 번째 편지(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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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달빛이 창틈으로 스며들었다. 은은한 주홍빛 조명은 간지럼이라도 타는 듯 간간이 흔들리며 불 그림자를 비추었다.
태양을 닮은 여인이 그 몽환적인 배경을 풍경으로 앉아 있었다.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과 루비를 연상시키는 붉은 눈동자, 무엇이든 흐릿해지는 밤의 시간임에도 그녀의 외모는 빛이 났다.
차라리 색정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색이었다. 어디에서도 존재감을 잃지 않을 듯한 그녀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향기로운 포도주를 홀짝였다.
술을 삼키는 소리를 내는 목울대마저도 아름다웠다. 이 방에는 단 둘뿐이었고, 남녀는 술을 마셨고, 그러므로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고 보아도 좋았다.
그러나 그처럼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오직 여인뿐.
내 눈동자는 얼어붙은 듯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방금 전에,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의심은 하고 있었다. 혹시나 그럴 수도 있다, 라는 알 수 없는 확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을 터였다.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었다. 당연히 판단에 앞서 그 정도 각오는 필요했다.
그럼에도 나는 한동안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목이 탔는데, 포도주가 담긴 술잔은 여인이 건넨 술잔밖에 없었다.
그래서 갈증을 감내하기로 했다. 내 목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대체, 왜……?”
“그러지 않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
델핀 선배는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태연자약한 태도가, 나를 더욱 당황시켰다.
안타깝다고 하지 않았나?
세리아에게 어머니와 얽힌 추억은, 그리고 어느 날의 악몽과도 같은 기억은 오래 전에 박힌 가시와도 같았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해도, 굳은살이 박히고 더는 아프지 않아도 생각해도 어느 날 불현 듯 서릿발 같은 아픔이 찾아오곤 했다.
아무리 이복 언니라고 해도 그럴 자격은 없었다. 남의 가장 아픈 상처를 들쑤시는 일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나는 아주 초보적인 의문을 떠올렸다. 내 눈동자가 살짝 가라앉았다.
“네, 그러지 않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죠. 아니, 충분하다 못해 넘칩니다.”
내 무거운 목소리에 델핀 선배는 훗, 하고 웃으며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그녀의 눈이 흐릿한 야경을 담고 빛났다. 마치 나와 나누어야 할 대화가 그보다도 무가치하다는 듯, 그녀는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필요하나?”
“……네?”
나는 그 짤막한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 그렇게 의문성을 흘려야 했다. 델핀 선배의 핏빛 눈동자가 다시금 나를 향했다.
“그 이유들 말이야, 필요하냐고.”
“당연히 필요……!”
“아니, 필요 없지.”
울컥해서 터져 나온 내 목소리를 가로막고, 델핀 선배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잔에 남은 포도주를 마저 입에 털어 넣더니,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잔을 내려놓았다.
사락거리며 가운이 스치는 소리와 예술품과 같은 그녀의 육체, 달콤한 포도주의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고혹적인 자태로 살짝 탁자에 기댄 그녀는, 내게 말했다.
“손도끼 공자, 자고로 필요하다는 건 말이야… 승리하기 위해 쓸모가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묻는 거야.”
“……그렇다면 세리아의 어머니 문제를 후벼 파는 건 승리에 도움이 되고요?”
입술을 짓씹으며 내뱉은 내 말에, 델핀 선배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그것이 무언의 응답이었다.
잠시 사나운 눈빛을 한 나를 감상하던 그녀는, 이내 책상에 기댔던 몸을 바로 했다. 그녀가 나긋한 걸음걸이로 창가로 향했다.
깨끗한 유리창의 그녀의 앞모습이 흐릿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그곳에서도 그녀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아카데미에 입학해 왔지. 제국의 5대 명문가 중 어디든 마찬가지야. 그리고 우리 가문에는 전통이 하나 있어.”
“이복동생 괴롭힘을 사주하기?”
내 날카로운 조롱에도 델핀 선배의 여유로운 표정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녀가 손으로 창틀을 짚었다.
자연스레 그녀의 상반신이 숙여지고, 그녀의 등 뒤를 노려보고 있던 내 시야에 그녀의 하반신이 부각되었다.
늘씬한 다리와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는 골반, 그리고 얇은 가운이 달라붙으며 드러나는 엉덩이의 탐스러운 윤곽까지.
남성을 홀리기에 그보다 좋은 광경은 없을 터였다. 그러나 나는 다시 눈을 돌리지도, 헛기침을 하지도 않았다.
단지 미간을 살짝 좁힌 채로,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았을 뿐이었다. 그러한 내 모습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델핀 선배는 흘깃 뒤를 돌아보더니 피식 웃었다.
가소롭다는 뜻인지, 귀엽다는 뜻인지.
어느 쪽이든 나를 그다지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델핀 선배는 태연자약하게 화두를 던졌다.
“수렵제.”
“……네?”
‘수렵제’, 그 낱말을 또 다시 듣게 될 줄 몰랐던 나는 곧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델핀 선배는 매우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한다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수렵제에서, 우승하는 것. 그게 유르디나 가문의 전통이야.”
“하시면 되잖습니까.”
“그래, 할 거야. 그런데 내 불쌍한 동생이 헛된 꿈을 꾸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언니의 역할이겠지?”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제야 조금쯤 그녀의 생각이 이해가 갔다.
세리아는 올해의 수렵제를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는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델핀 선배가 4학년이라는 점, 적통과 천출의 격차, 그리고 유르디나 가문의 전통까지.
세리아는 그만큼이나 증명해 내고 싶은 것이다. 그녀도 당당한 유르디나의 일원이라고, 쓸모 있는 인간이라고. 그러니까 더는 두려워하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델핀 선배가 이를 알게 된 이상, 그녀로서는 변수를 최대한 줄여두고 싶었을 터였다.
그녀는 승리에 무척 집착하는 듯 보였으니까, 아무리 사소한 가능성이라도 없애고 싶었겠지.
잠시 입술을 짓씹으며 생각에 잠겼던 나는, 델핀 선배에게 물었다.
“그래서 세리아의 어머니 문제까지 건드린 겁니까?”
“아니, 그것만큼은 오해야. 나는 단지, 세리아가 훌륭한 조원들을 모으기 힘들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싶었을 뿐이거든. 그런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이야기가 돌더라고?”
그러면서 델핀 선배는 다시 창을 등지고 섰다. 그녀는 창틀에 살짝 걸터앉아서,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달아오른 목소리가 성대를 긁고 지나갔다.
“그럼 뒤늦게라도 막았어야죠……!”
그러나 내 위협적인 어조에도 델핀 선배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웃음까지 터트렸다.
“후, 아하하핫! 내가?”
델핀 선배는 검지로 스스로를 가리키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야, 세리아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손도끼 공자.”
후우, 하고 델핀 선배는 한숨을 내쉬면서 툭, 하고 몸을 다시 일으켰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 포도주 병을 쥐었다. 그리고 쪼르륵, 하는 소리.
술잔이 차올랐다. 그녀는 다소 싸늘해진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세리아는, 유르디나의 일원이야. 그 정도로 꺾일 만큼 나약하지 않아.”
그 말에 나는 몸을 벌컥 일으켰다. 내 눈동자에 노골적인 적의가 맺혔다. 그럼에도 델핀 선배는 느긋한 몸짓으로 포도주를 홀짝일 뿐이었다.
네가, 어쩌겠냐는 눈빛.
그 눈빛을 최근에 어디서 본 것만 같았는데, 나는 열이 뻗치는 와중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괴롭힘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기나 합니까? 세리아가 그때 얼마나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렸는지……!”
“그럼 그거대로 세리아가 약한 탓이겠지.”
그녀는 너무나 뻔한 대답을 내놓는다는 듯, 시큰둥한 모습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얼이 빠졌다.
“북부는 척박한 땅이야. 겨울이 길고 봄이 짧지… 파종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라, 풍요로운 동부에서 식량을 수입하지 않으면 굶어죽는 영민들이 속출할 거야.”
“……그거랑 세리아가 무슨 상관입니까?”
여전히 분한 기색이 섞여 있는 내 목소리에, 델핀 선배는 진정하라는 듯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느긋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런 북부에서 살아남기 위해, 유르디나 가문은 철저히 실용적인 노선을 택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때로는 무자비할 만큼 목표 달성에 집착했지. 그렇게 쌓아온 피와 철의 역사가 바로 유르디나 가문의 깃대에 흠집으로 새겨져 있는 거야.”
“그래서, 그 정도로 무너지는 나약한 인간은 유르디나 가문에 필요가 없다?”
탁, 하고 델핀 선배가 손가락을 퉁겼다. 정답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그 말이 내 들끓는 속을 달래주지는 못했다. 나는 여전히 사나운 눈빛으로 델핀 선배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델핀 선배는 또 다시 잔을 술로 채울 따름이었다.
“내 나름대로의 애정 표현이라고 생각해. 나도 세리아가 유르디나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았을 때, 뿌듯함을 느꼈거든. 언제나 나만 보면 시선을 내리깔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배웅하고… 후후, 귀여운 동생이야.”
세리아와 나누었던 대화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이복언니를 동경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날 밤 쓸모가 없으면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그 섬뜩한 경고를 들은 이후로 쭉.
그리고 델핀 선배는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로서 온갖 지원을 받으며 승리를 쌓아올렸을 것이다. 반면 세리아는 유르디나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때까지 혹독한 수련을 거쳐야 했다.
세리아가 델핀 선배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서 있는 환경부터가 달랐다. 설령 세리아가 더욱 빛나는 재능을 가지고 있더라도, 시간과 금전을 메꿀 만큼은 아니었을 터다.
만에 하나 세리아가 델핀 선배보다 앞서가려 했다면, 유르디나 가문은 오히려 세리아를 향한 지원을 끊어버렸을 것이다. 그것이 고위 귀족의 세상이다.
세리아에게는 지나치게 혹독하고, 델핀 선배에게는 지나치게 따스하다. 그래서 세리아는 늘 델핀 선배 앞에서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을 테지.
내 목소리가, 더욱 깊이 가라앉았다.
“……그렇게 살아서, 승리는 잘 쌓아 왔습니까?”
“그럼,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지. ‘불패’란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로서 누구보다 적합하다는 증거야.”
“절 영입하려고 했던 것도, 그 연장이군요.”
흐응, 하고 델핀 선배는 말해 보라는 듯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매혹적인 눈빛이었지만, 내 가슴에는 열기와 한파가 뒤섞이고 있는 중이라 나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세리아 주변에 느닷없이 쓸 만해 보이는 놈이 나타난 것 아닙니까. 수렵제의 조원을 모을 정도로는 충분하죠.”
“그리고 또 그 ‘꼬마 악당’도, 네가 있다면 더 기어오르지 못할 테고.”
친절하게도 델핀 선배는 그렇게 내 답변의 모자란 부분을 보충해 주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제게 진실을 밝힌 겁니까?”
내가 도달한 마지막 의문은, 바로 그것이었다.
어째서 내게 진실을 말했는가. 시치미를 떼도 좋고, 이를 빌미로 내 죄책감을 부추겨서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수도 있었다.
그것이 더 나은 전략이었다. 그럼에도 델핀 선배는 굳이 어려운 길을 택했다.
내게 진실을 말하는 것, 그것이 나와 델핀 선배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들 것은 비교적 명확해 보였는데 말이다.
그래서 처음 델핀 선배의 말을 들었을 때, 내가 더욱 당황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델핀 선배는 내 말을 듣더니, 그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문제라는 듯 눈을 감고 제 입술을 톡, 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델핀 선배는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말했다.
“글쎄? 말했던 대로, 용기에는 보상이 따라야 하는 법이기도 하고…….”
그 말과 함께 멎어 있던 델핀 선배의 움직임이 부활했다.
그녀는 늘 그렇듯 사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앞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새하얀 목덜미와, 코가 멀어버릴 것만 같은 달콤한 향기.
그리고 포도주의 향긋한, 뜨거운 열기가 내게 와 닿았다. 어느새 그녀는 내 눈앞이었다.
매혹적인 여인의 육체가 자리하고 있었으나, 내 눈은 흔들림 없이 델핀 선배의 붉은 눈동자를 노려볼 뿐이었다. 델핀 선배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내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 다음 순간, 내 귓가를 간질이는 그녀의 목소리.
“……너 하나가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잖아?”
그것이 한계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벨트에 매달린 손도끼의 손잡이를 쥔, 그때.
마법처럼 델핀 선배의 몸이 내게서 멀어져 갔다. 내 손이 어디에 있는 줄 모를 그녀가 아니었음에도, 델핀 선배는 술잔에 다시금 포도주를 채워 넣을 뿐이었다.
그녀가 흘깃 시선을 내게 던졌다. 그 의도는 하나뿐이었다.
뽑을 테면, 뽑아 보라는 눈이었다.
나는 손도끼를 쥔 손을 부르르 떨다가, 곧 힘을 풀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곳은 델핀 선배의 사적인 공간이고, 심지어 상대는 비무장. 그렇다고 해도 내가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지만, 명분이 너무 약했다.
아카데미 내규를 넘어 더욱 심각한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차마 손도끼를 뽑지 못했다.
델핀 선배는 그럴 줄 알았다는, 픽, 하고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그리고 눈짓으로 아직 포도주가 가득 차 찰랑이는 술잔을 가리켰다.
본래 그녀가 마시고 있다가, 내게 권했던 술잔이었다. 북부에서는 동지의 의식을 상징한다고 했나.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델핀 선배를 응시했다. 델핀 선배는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내게 말했다.
“……어때,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잔 하는 건? 꽤 비싼 술인데.”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벼락같이 손도끼가 뽑혀 나왔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 델핀 선배조차 눈치 채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그녀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도끼날이 찰나를 찢고 들어간 그 순간,
쾅, 하고.
손도끼가 빛살처럼 내리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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