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7화 (47/649)

〈 47화 〉 1. 첫 번째 편지(47)

* * *

도끼날이 은빛 실선을 그으며 물체에 틀어박혔다. 콰직, 하고 날이 단단한 질감을 헤집는 감각이 손을 타고 울렸다.

그때까지도 델핀 선배는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내 손도끼는, 델핀 선배가 아닌 그녀가 권한 술잔을 찍었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이 산산조각 나며 허공에 흩날렸다. 마치 눈발이 날리는 듯했다.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그 달콤한 포도주의 향기.

핏물처럼 포도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탁자를 흠뻑 적시며 쏟아진 자줏빛의 액체는 곧 탁자 위를 범람했다.

허공에서 나와 델핀 선배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델핀 선배는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은 눈치였다. 그녀는 단지 후, 하고 옅은 웃음을 터트렸을 뿐.

그녀의 핏빛 눈동자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나는 그 사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델핀 선배.”

“응, 그래.”

그녀의 태연자약한 태도에 내 눈동자에 짜증이 깃들었다. 나는 살짝 미간을 좁힌 채, 조금쯤 들끓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자꾸 긁지 마시죠.”

“너무 티 났나?”

그리고 다시 한 번 술잔이 기운다. 달빛을 등진 태양 같은 여인은 고혹적인 자태로 포도주를 홀짝였다.

그녀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노골적인 호의를 담은 시선이었지만, 그것이 유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강자의 시선이다. 마치 흥미가 가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을 상대를 내려다보는 눈빛.

울컥한 내 눈동자에 더욱 사나운 기세가 어렸다. 그러자 델핀 선배는 그조차도 귀엽다는 듯 후후, 하고 웃어 버렸다.

손도끼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상대는 명문 중의 명문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이며, 그 이전에 반나체의 여인이었다.

귀족의 사적인 공간에 초대받는 것은, 상대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한 신뢰를 어길 수는 없었다. 하물며 제국 귀족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명예 아닌가.

아무리 상대가 나를 도발하더라도 넘어가서는 안 됐다. 그래서는 외통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저 눈빛.

내가 그녀에게 덤벼드는 경우의 수까지 모두 염두에 두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나를 제압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고.

기습의 이점조차 살릴 수 없다면 그녀를 습격할 까닭이 하등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면서, 탁자를 찍은 도끼를 거두었다.

고풍스러운 탁자 위에는 흉하게도 패인 자국이 남고 말았다. 그 자리를 쏟아진 포도주가 흘러들어갔다. 자줏빛으로 물드는 흉터.

물어내라고 한다면, 물어내야겠지. 물론 유르디나 가문의 정당한 후계자인 델핀 선배에게 있어 이는 푼돈밖에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손도끼를 다시 벨트에 매다는 나를 보고, 델핀 선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잔에 남은 포도주를 입에 마저 털어 넣었다. 슬슬 그녀도 술기운이 오르는지, 볼에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그녀가 눈꺼풀이 호선을 그렸다. 매혹적인 눈웃음이었다.

“나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괜히 괴롭히고 싶어지거든… 짓궂은 여자는 어때?”

나는 흐, 하고 되다 만 웃음소리를 흘렸다. 실없는 소리를, 내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오늘 겪어 보니 별로 같은데요.”

“유감이네, 하지만 괜찮아. 어차피 넌 내 밑에 들어올 테니까.”

그러면서 델핀 선배는 다시 천천히 걸어, 내 앞에 섰다. 그녀의 몸이 슬쩍 내게 다가섰다. 조금만 집중하면 그녀의 살갗에 이는 은은한 온기를 느낄 만한, 지근거리.

향긋한 포도주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델핀 선배의 뜨거운 숨결이 귓가를 목덜미를 적셨다.

“서로를 믿기 위해서는, 비밀도 없어야 하잖아? 그래서 특별히 알려준 거야.”

“후회하실 겁니다.”

“후회라… 내가? 아하핫!”

델핀 선배는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동작이 커진 것이 취기가 오르긴 오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슬슬 멍해지는 느낌이 나 또한 다소 취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델핀 선배와 같은 거물 앞에서, 하나도 떨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도.

담이 크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내 눈동자는 지금도 그녀의 급소 요소요소를 살피고 있었다.

새하얀 목덜미, 지금으로서는 가장 유력한 곳이었다. 그러나 델핀 선배는 그러한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참을 웃다 내 귓가에 속삭였다.

“……이안, 페르쿠스.”

흘깃 곁눈질로 보이는 그녀의 핏빛 눈동자는, 얼핏 흐리멍텅해 보였지만 그 깊숙한 곳의 이채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맹수의 자존심, 그리고 자기자신을 향한 절대적인 확신.

“나는,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어.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패배했을 때뿐이겠지.”

다시 말해 지금껏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또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절대적인 자신감이 엿보이는 말이었다. 델핀 선배가 아니었다면, 오만한 소리라고 웃고 넘어갔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화자가 델핀 선배라면 달랐다. 그녀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녀가 걸어온 삶의 궤적이 바로 그 증거였다.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언어는 그 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라 그 지위가 달라진다는 사실쯤은, 그럼에도 심통이 난 내 입에서는 자연스레 빈정거리는 말이 튀어나왔다.

“너무 방심하시면 안 될 텐데요… 특히, 지금처럼 비무장으로 계실 때는.”

“시험해 볼래?”

델핀 선배의 입가에 도발적인 미소가 맺혔다. 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흥미 없다는 듯 슬쩍 시선을 돌렸다.

내 손도끼가 뽑혀 나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팍, 하고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도끼날이 번뜩였다. 단두대의 칼날처럼 손도끼가 최적의 궤적을 그리며 떨어졌다.

일직선, 단순하면서도 가장 위력적인 일격이었다. 일반적으로 리치가 짧은 무기는 손해를 감수하기 마련이지만, 이처럼 지근거리에 적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짧으면 짧을수록 순식간에 가속도를 붙이기 쉬워진다. 내 손도끼 또한 마찬가지였다. 발검보다도 더욱 빠른 속도로 내리 그어지는, 서늘한 빛.

그러나 그 선이 채 그어지기도 전이었다.

캉, 하는 충돌음과 함께 불꽃이 비산했다.

어느새 제 허벅지 부근을 더듬거리던 델핀 선배의 손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휘둘러치듯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는, 금빛의 광채.

단검이었다. 어느새 황금빛 오러가 맺힌 단검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 손도끼를 쳐냈다. 예상외의 충격에 손도끼가 높이 퉁겨졌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금빛 오러가 덧씌워진 단검이, 내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살갗에 은은한 열기가 느껴졌다.

델핀 선배의 오러는, 닿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금속마저 녹여버리는 강렬한 열기를 품고 있다고 들었다. 고작해야 따뜻하다고 느낄 수준이라면 그녀가 봐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내 입에서 끄응, 하고 불만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델핀 선배는 슬쩍 눈웃음을 지었다.

갑작스러운 운동량을 견디지 못한 그녀의 가운이 어깨에서 살짝 흘러내렸으나, 나는 애써 시선을 그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러면 검사로서나, 남자로서나 패배하는 듯한 느낌이라서.

델핀 선배는 내 손도끼가 높이 퉁겨진 그대로 움직임이 멎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단검을 거두었다. 단검에 맺혀 있던 금빛 오러가 흩어졌다.

“……무기를 숨기고 있었던 겁니까?”

“당연하지, 그럼 나쯤 되는 인간이 호신 수단도 없이 누군가를 독대할 줄 알았어? 아, 혹시 가지고 싶으면 가져도 좋아. 허벅지 안쪽에 매달아뒀던 거지만.”

그래서 칼날에서 향긋한 향이 났던 거구나. 나는 문득 그녀의 칼날이 내 목젖 부근에 닿았을 때, 흐릿하게 느껴지던 향기의 정체를 깨달았다.

델핀 선배는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만만한 눈빛이었다. 기분이 꽤 좋아 보였는데, 지금이라면 혹시 몰랐다. 내가 달라고 하면 단검을 진짜 건네줄지도.

매력적인 제안이었지만, 내가 내놓을 대답은 늘 같았다. 나는 떨떠름한 눈빛으로 델핀 선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필요 없습니다.”

자존심하고는, 연이은 내 거절에 조금쯤 빈정이 상했는지 델핀 선배의 얼굴이 샐쭉해졌다. 그러나 곧 그녀는 어차피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하여튼, 이제 알겠지? 방심을 하든 말든 네가 날 이기는 건 불가능…….”

그때, 도끼자루를 쥐고 있던 내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델핀 선배의 단검과 충돌하며 높이 치켜들어진 손도끼였다. 아직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고, 팔 근육이 팽팽히 긴장하는 순간 그 이후의 일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공기를 찢으며, 고속으로 도끼날이 내리쳐진다.

또 다시 기습이었다. 방심을 틈탄, 완벽한 기습이라고 생각했으나 델핀 선배의 대응은 더욱 기민했다.

그녀의 핏빛 눈동자가 다시 차갑게 가라앉더니, 그녀의 단검이 다시 섬전처럼 쏘아졌다. 이대로라면 직전의 상황이 반복될 것이 뻔했다. 델핀 선배의 눈동자에 흐릿한 조소가 스쳤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푹, 하고 살갗을 찢는 소리와 함께 핏물이 터져 나왔다. 눈을 부릅뜬 쪽은 델핀 선배였다.

왜냐하면 그녀의 단검을 가로막은 것이, 내 손바닥이었기 때문에.

타는 듯한 격통이 느껴졌다. 살갗과 근육이 파헤쳐지는 느낌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척추를 바늘이 찌르고 지나가는 듯한 그 통증, 나는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입을 이를 악물어 억지로 틀어막았다.

델핀 선배의 눈동자가 멍청해졌다. 설마 이럴 줄은 몰랐다는 듯이.

비열한 수작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지금 무엇보다 그녀에게 한 방을 먹여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손도끼가, 드디어 그녀에게 닿는 순간이었다.

* *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