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1. 첫 번째 편지(48)
* * *
다음날 아침, 나는 또 다시 신전을 찾아갔다.
우연히도 오늘 아침의 담당은 또 성녀님이었다. 최근 들어 그녀와 마주치는 일이 유독 잦았다. 기억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는 이름 정도만 아는 사이였는데.
물론, 그 원인은 전적으로 내게 있었다.
성직자의 일은 다친 자를 치료하는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지난 한 달 동안 나만큼 신전을 자주 이용한 사람은 없을 터였다. 성녀님과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잦은 만남은 호감을 수반한다. 어린 시절 읽었던 사교술의 기초였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지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성녀님의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연분홍빛 눈동자가, 내 얼굴과 피와 고름이 말라붙은 내 손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그 눈동자에 어리는 감정을 읽자마자 나는 곧바로 납작 고개를 숙였다.
비굴하다시피 굽어진 내 목을 타고, 자연스레 변명의 말이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성녀님. 그래도 이 또한 아루스께서 주관하신 계획이 아니겠…….”
“주를 망령되게 이르지 마세요.”
“넵.”
그러나 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는 성녀님의 싸늘한 목소리에 조기 진압 당하고 말았다. 나는 곧바로 뻣뻣이 정자세로 돌아와 힐끔거리며 성녀님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피감 있는 젖가슴이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언제 보아도 존재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나는 잠시 홀린 듯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돌렸다.
안 되지, 안 돼. 이러다가는 천벌을 받을지도 몰랐다. 천신 아루스가 가장 아끼는 딸만이 성녀의 자리에 오를 수 있지 않은가.
그토록 고귀하고 순결한 존재였다. 음심을 품는 것조차 어불성설이었다. 내게는 닿을 수 없는 꽃이고,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평생 내 존재조차도 알지 못하고 살았을지도 몰랐다. 그만큼이나 나와 그녀의 격차는 극심했다.
그에 비하자면, 지금은 얼마나 행복한 상황인가.
그 아리따운 성녀님께서 내 몸을 친히 걱정해 주고 계셨다. 은은한 광채를 품은 은빛 머리카락과 가슴을 간질이는 색감의 연분홍색 눈동자, 그리고 맑고 투명한 피부와 더불어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까지.
천신 아루스조차도 편애를 한다는 증거물이 바로 그녀였다. 한 폭의 성화처럼 그녀의 외양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녀의 몸이 지닌 여성적인 굴곡 또한 뭇 사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곤 했다.
성녀의 아름다움이 천신 아루스의 존재를 증명한다면, 그녀의 육체는 악신 오메로스의 존재를 떠올리게끔 만들었다.
목덜미부터 허벅지까지 이어지는 그 곡선은 매끄러움과 탄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물론, 그 굴곡도(?曲?) 또한 상당했다.어째서 순결해야 할 성녀가 그토록 색정적인 몸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우스갯소리로는, 그녀의 입학을 전후해서 신학부 남학생들의 회개 기도가 늘었다나.
그러한 여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 손을 조심스레 살피고 있다는 건, 분에 넘치는 영광이었다. 과장을 조금 섞자면 오늘의 일만으로도 아카데미에 입학할 가치가 있었다.
어느 시골 마을에 내려가면, 성녀의 손에 닿는 것만으로도 온갖 질병이 치유되는 줄 아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고귀한 신체와 맞닿을 수 있는 존재는 드물었다.
오로지 아카데미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애써 두려운 마음을 달랬다.
이상한 일이었다. 까닭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때때로 성녀님을 보면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그 자애롭기로 유명한 성녀님인데도 말이다. 귀천을 가리지 않으며, 순수하고 또 모두에게 친절하기로 유명한 그녀였다.
내가 공포를 느낄 만한 요소는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종종 그녀 앞에 설 때마다 고양의 앞의 쥐라도 된 듯한 느낌을 받아야 했다.
지금 내가 고분고분 그녀에게 손을 내민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성녀님은 조심스레 내 손을 감고 있던 붕대를 풀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부상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관통상뿐만 아니라, 화상까지도 복합적으로 작용한 상처였다. 그로부터 오는 고통은 무시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안 형제님, 설마 이 정도 부상을 당했는데… 지금에야 신전을 찾아오신 건가요?”
나는 그녀의 말에 머쓱하다는 듯 뒷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다소 뿌듯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야밤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성직자 분들을 깨우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 아, 아팟!”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성녀님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그녀의 손바닥이 내 팔뚝을 퍽, 하고 후려쳤다. 그 힘이 생각보다 강해서, 상처까지 충격이 전달되자 내 입에서는 절로 비명이 새어나왔다.
나는 억울하다는 눈으로 성녀님을 바라보았으나, 성녀님은 한숨을 푹 내쉴 뿐이었다. 그녀는 속상한 기색으로 내게 물었다.
“관통상에, 화상. 상처 부위가 열기로 지져져서 그나마 출혈은 덜했네요. 그래도 고통이 어마어마했을 텐데…….”
“아니, 뭐. 생각보다 견딜 만하던데요?”
째릿, 하고 연분홍빛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환자 주제에 성직자의 말에 이런저런 말을 덧붙여 봐야 진료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절대 그녀가 무서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가 조용해지자, 성녀님은 나를 본격적으로 타박하기 시작했다.
“이안 형제님, 얼마 전에 목숨을 소중히 여기겠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그, 그랬죠. 그런데 살다 보니까 여러 상황이 참…….”
“고작 이틀도 되지 않아서 신전에 다시 찾아올 만큼 말인가요? 그리고, 이 부상… 실수 따위로 얻을 만한 수준은 아니에요. 또 누구와 다투신 거죠?”
조곤조곤 쏘아붙이는 성녀님의 바가지 솜씨에 나는 쩔쩔 매는 수밖에 없었다.
본래부터 화술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기도 했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몸조심 하겠다고 호언장담한 지 이틀도 되지 않아 찾아온 일이 죄송하기도 한 탓이었다.
성녀님은 나를 타박하는 와중에도, 착실히 내 상처를 돌보아 주었다. ‘성녀’라는 호칭에 걸맞게 그녀의 신성력은 양과 질 모두 남달랐다.
짓무른 상처에 서서히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언제 보아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마법사들도 치유를 촉진하는 마법을 배우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연치유를 앞당길 뿐이었다.
심각한 화상을 치유하거나 절단된 신체 부위를 재생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성력을 가진 사제들뿐이었다. 그렇기에 ‘신의 힘’이라고 불리는 것일 테지만.
성녀님의 꾸지람이 한참이나 이어지는 동안, 내 손은 어느새 부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말끔해져 있었다. 고작해야 시큰한 정도의 통증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앞으로는 부디 몸을 소중히 여기세요. 이안 형제님의 목숨은, 형제님만의 몫이 아닙니다. 형제님께 의지하고 의지 받는 모든 이들의 몫이죠.”
나는 늘 그렇듯 이어지는 성녀님의 설교를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며 한 귀로 흘려버렸다. 가끔 내가 너무 말이 없다 싶으면, 한 마디만 내뱉으면 그만이었다.
“임마누엘.”
“과연 이안 형제님, 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을 잘 알고 계시는군요. 맞습니다. 천신 아루스께서 태초에 인간을 지으실 적에, 무한한 생명과 영광을 약속했으니…….”
그러면 성녀님께서 들뜬 어조로 말을 이어가니, 지루함만 견뎌낼 수 있다면 이보다 쉬운 일이 없었다. 신나 보이는 성녀님이 귀여워 보이기도 했고.
이곳은 신전이었고, 환자는 언제나 존재했다. 아무리 성녀님이라도 내게만 시간을 쓸 수는 없을 터였다. 다시 말해, 그 성녀님의 기나긴 설교도 결국에는 끝이 찾아온다는 뜻이었다.
한참이나 내게 설교를 이어가던 성녀님은, 문득 정신을 차렸는지 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녀는 깜짝 놀랐는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시, 시간이 어느새 이렇게……?”
“저, 성녀님. 저야 성녀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무척 즐겁습니다만, 다른 환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내 말에 성녀님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녀가 드물게도 말을 더듬었다.
“그, 그렇군요…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이안 형제님. 임마누엘.”
이제야 해방이다. 나는 그러한 안도감을 느끼면서, 몸을 일으켜 망설임 없이 신전을 떠나가려 했다.
내 발걸음을 붙잡는, 성녀님의 마지막 질문만 아니었다면.
“……그런데 형제님.”
출구로 나아가던 내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의문을 담아 뒤를 흘깃 바라보니, 성녀님은 침착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당황하고 말을 더듬던 모습이 거짓이라도 된다는 듯, 그녀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젯밤은,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나는 잠시 침묵했다. 어젯밤이라.
핏물, 뇌를 불태우는 듯한 통증,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느꼈던 희열.
멍하니 나를 응시하던 진홍빛 눈동자와, 직선으로 내리 찍히던 은빛의 실선이 떠올랐다.
그렇게 내가 멍하니 서 있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성녀님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역시, 비밀이군요.”
“요즘은 비밀이 많아야 인기가 많다더라고요.”
‘신비주의’라나 뭐라나, 나는 그렇게 시시한 농담을 끝으로 신전 밖을 나섰다.
새벽녘이 지나, 이제 하늘에는 태양이 따스한 빛을 내리쬐고 있었다. 아침이었다. 수많은 인파들이 북적대며 아카데미의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그리고 신전 앞을 지나던 학생들은,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란 듯 보였다. 지나가던 이들의 발걸음이 일시에 멎고, 그들의 시선이 못 박힌 듯 나를 향했다.
그래봐야 찰나에 불과했다. 그들은 다시 갈 길을 가기 시작했으며, 아카데미는 그렇게 다시 평소의 일상을 되찾았다.
단 하나, 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빼고.
“저 사람이야, 저 사람. 그 ‘손도끼 공자’… 어젯밤에는 델핀 선배랑…….”
“설마, 그 델핀 유르디나를 덮쳤… 헙!”
내 금빛 눈동자가 수군거리는 이들을 하나하나 응시하자, 소란스럽던 주위가 급격히 조용해졌다. 나는 그저 한숨을 푹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아카데미에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무언가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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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핀 유르디나는 그날 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회심의 일격이었다. 도무지 피할 수 없다. 최소한 그녀의 생각으로는 그랬다. 당연히 또 다시 승리하리란 확신에 가득 차 있던 그녀의 시야에, 핏물이 팍, 하고 튀겼다.
사내의 손이었다. 그녀의 단검은, 그 손에 가로막혀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사내의 나머지 손에 들린 날붙이는 달랐다.
손도끼가 쇄도하던 날의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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