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1. 첫 번째 편지(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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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서운 속도로 도끼날이 짓쳐 들었다. 허공을 찢고 일직선을 그리는 은빛의 궤도, 델핀은 이를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사고했다.
이대로면 당한다. 저 도끼는 중간에 멈출 생각으로 휘둘러진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보다는 조금 더 느려야 했다.
한 치의 멈칫거림조차 없는, 고속의 일격.
당황한 채로 있을 시간은 없었다. 델핀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미 도끼날이 쇄도하고 있었지만, 아직 늦지는 않았다.
그녀의 단검에는 아직 오러가 맺혀 있었다. 마력으로 강화된 육체의 뼈까지 단숨에 관통하기는 힘들어도, 검을 회수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녀의 몸이 빙글 돌며 흰색의 가운이 펼쳐졌다. 춤을 추듯 거두어지는 단검과 도끼가 교차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삭,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어깻죽지가 살짝 베였다. 곧 핏물이 묻어나올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찰나마저 승패를 가르는 긴박한 전투의 한가운데였다.
이를 신경 쓸 수는 없었다. 델핀은 한 바퀴 회전한 그대로 단검을 휘둘렀다.
단검이 금빛 실선을 그으며 탄환처럼 쏘아졌다. 마력량 자체는 델핀이 우월했다. 아무리 질량의 차이가 있더라도 그녀의 단검이 힘겨루기에서 열세에 몰릴 리는 없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갑작스러운 회전 탓에 그녀의 몸이 아직 균형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는 점.
무게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한 몸은 완벽한 실력을 뽐내지 못했다. 외부의 충격에 취약해지고, 하반신에서 올라오는 힘이 없기에 그녀의 비수는 더욱 뭉툭해졌다.
그러나 아무리 빛을 잃었어도, 장인이 만든 검은 어느 때나 위력을 발휘하는 법.
이안이 곧바로 후속타를 가하려 시도했음에도 그녀의 단검과 도끼날이 마주치는 속도는 비등했다. 델핀은 이때 이를 악물고 더욱 힘을 실었다.
그 탓에 무게중심이 다시 기울어지며 그녀의 몸이 이안 쪽을 향했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반탄력으로 다시 돌아올 테니까.
델핀은 그 대가를 제대로 받아냈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안의 손도끼가 다시 퉁겨나갔다. 이안은 설마 무너진 자세에서 쏘아진 단검이 이 정도 위력을 가지고 있을지는 몰랐던지, 손도끼를 놓치고 말았다.
팽글거리며 손도끼가 허공을 날았다. 물론 델핀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그러지 않아도 기울었던 그녀의 몸은, 충돌의 여파를 온전히 감내할 수 없었다.
단검이 튕겨 나갔다. 그러나 손에서 놓친 것과, 아직 단검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달랐다. 델핀은 충격으로 몸이 살짝 뒤로 기울었음에도 승리를 확신했다.
그녀의 핏빛 눈동자에 희열이 스쳤다. 그녀는 다소 전율하기까지 했다. 어린 시절 검을 처음 본 날처럼 그녀의 가슴이 설렜다.
이 사내는, 물건이다.
망설임 없이 기습을 시행하는 그 판단력부터, 제 손을 희생하는 과단성, 그리고 전투를 피하지 않는 그 기질까지.
사냥개로 이보다 좋은 인재가 있을 수 있을까. 델핀은 오랜만에 무언가가 진심으로 가지고 싶어졌다.
그러나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오로지 강자의 특권이다. 약자는 소유당하고, 강자는 소유한다. 그것이 이 세계의 보편적인 진리였다. 그녀가 이안을 가지기 위해서는 우선 지금 당장 이안을 꺾을 필요가 있었다.
그녀의 발이 살짝 미끄러졌다. 그리고 꾸욱, 하고 그 발을 지지대 삼아 델핀의 몸이 곧바로 균형을 되찾았다.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빛살이 폭사됐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속도였다. 그것으로 끝.
어느새 승부는 끝나 있었다.
델핀의 단검이 이안의 목젖 앞에 멈춰 있었다. 이대로 힘을 주면, 그의 생명을 끊는 일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델핀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이 멍하니 이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안은 웃고 있었다. 서늘한 예기가, 델핀의 목덜미를 겨누고 있었기에.
지독한 냄새가 났다. 살과 고름, 피가 뒤섞여서 타는 냄새였다.
델핀의 눈이 서서히 제 목덜미 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칼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칼날을 따라, 점점 더 위로. 그녀의 눈동자가 칼을 쥔 손을 향했다.
핏물이 뚝, 뚝 떨어지는 손이었다. 그 부상의 원인은 명확했다. 그 관통상을 만든 것이 바로 델핀 유르디나, 그녀 자신이었으니 잘 알고 있었다.
결과가 말해주는 현실은 명확했다. 델핀이 손도끼를 쳐낸 순간, 이안은 다친 손으로 검을 뽑았다. 그렇기에 델핀의 속도가 우월했음에도 그녀의 목덜미를 동시에 노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방법은 오로지 하나밖에 없었다. 단검에 꿰뚫려 살과 피가 뒤섞여 타고 있는 손의 통증을 참아내고, 검을 뽑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 찰나에, 그러한 판단을 내린다는 것부터가 비정상이었다. 인간의 육체는 기본적으로 고통을 피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이는 무의식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할 때조차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고통스러운 선택을 기피한다. 그러지 않아도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텐데, 그 손에 힘까지 준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델핀은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혹시 통각이 마비되기라도 한 걸까?
그녀의 눈동자가 멍하니 이안의 손과 얼굴을 훑은 이유였다. 그러나 그녀는 곧 그러한 가설을 폐지할 수밖에 없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 그 파문은 당장이라도 쥐고 있는 검을 놓칠 듯 극심했다. 손뿐만이 아니었다. 그 손을 지탱하고 있는 팔도,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입꼬리마저도.
전부 다 떨리고 있었다. 지독한 통증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제는 칼날마저 덜덜 떨릴 만큼 그는 무리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웃었다.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델핀 선배… 제 주무장은 손도끼가 아니라 검입니다.”
델핀 유르디나, 그녀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었으니까. 사내의 미소가 그러한 감정을 여실히 전달하고 있었다.
오로지 그러기 위해서 그는 제 손을 버렸다. 그리고 무의식이 거부했을 텐데도 꿰뚫린 손으로 검을 쥐었다. 놀라운 의지였다.
아니, 어쩌면 무의식에서조차 이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몰랐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 정도 반응 속도가 나올 수도 없었다. 육체의 본능마저 짓누르는, 그 강렬한 승부욕.
그 결과가, 지금 델핀의 눈앞에 있었다. 그녀의 목에 당도한 그의 칼날과, 그것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예기.
그때까지 멍청한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고 있던 델핀은, 헛웃음을 삼키며 한 마디를 남기는 수밖에 없었다.
“……미친놈.”
“그 미친놈을 건드린 델핀 선배는, 그럼 뭡니까?”
여유로움을 가장한 말투였지만, 이안은 당장이라도 검을 놓칠 듯 힘겨워 보였다. 식은땀이 묻어나오는 그의 이마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델핀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마치 끓어오르는 듯한, 호의인지 적의인지조차 알 수 없는 감각. 그러나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가지고 싶었다. 망가트리더라도, 이 사내를 가지고 싶다. 델핀 유르디나의 심장에서 그 질척한 감정의 씨앗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 뒤를 엄습하는, 또 하나의 감정.
굴욕감. 언제나 무패의 신화를 써왔던 그녀로서는, 낯선 감각이었다.
그래서 델핀은 지금 어떠한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을 뿐이었다. 마치 이안을 따라하듯이.
“글쎄, 함께 미친년이라도 돼주길 바라는 거야?”
“전혀요, 그보다는 판정부터 내려주시죠.”
독한 사내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비명을 내지르며 칼을 놓아버리고 싶을 텐데, 자그마한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그토록 역력한 고통의 흔적을 보이면서도.
신음을 참느라 악물어진 이 사이로, 질문이 던져졌다.
“……이 정도면, 제가 이겼습니까?”
델핀은 잠시 침묵했다.
이겼냐고? 실력차나 여러 정황을 고려했을 때, 그야 판정승은 이안이 가져가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델핀 유르디나는 차마 그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첫 패배라, 그럴 리가,
승패를 가르는 것은 오로지 마지막 순간뿐이었다. 지금 서로의 목을 겨누고, 목숨을 거두어 갈 수 있는 이 상황.
델핀은 흐, 하고 웃으며 말했다.
“아니.”
이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로서는 평가가 너무 박하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델핀은 언제나 당당했다.
그녀는 굴욕을 뒤로 하고, 또 다시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잘 쳐줘도 무승부…….”
그리고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던 그 순간.
스르륵, 하고 그녀의 어깨에 겨우 걸쳐져 있던 가운이 흘러내렸다.
델핀은 아차, 싶은 눈으로 흘러내리는 가운을 바라보았다. 그러지 않아도 느슨하게 걸쳐져 있던 가운이었다. 전투를 벌이며 회전하고, 기울어지고, 그러면서 델핀의 옷매무새는 이미 아슬아슬해져 있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불의의 일격을 허용했던 것이다. 어깻죽지를 스쳤던, 이안의 손도끼.
그것이 결정타였다. 더는 델핀의 몸에 걸쳐질 지지대를 상실한 가운은, 기다렸다는 듯이 흘러내리며 델핀의 새하얀 나신을 세상에 공개했다.
정적이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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