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1. 첫 번째 편지(50)
* * *
델핀의 나체가 달빛을 조명 삼아 전시됐다.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였다.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곡선을 그리는 여체는 조각상이라도 되는 양 아름다웠다. 그리고 한 손으로 쥐면 적당히 넘칠 듯한 탄력 있는 젖가슴과, 소중한 이가 아니라면 보여주어서는 안 되는 내밀한 부분까지.
전부 다 드러났다. 델핀보다 당황한 쪽은 이안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얼어붙은 델핀과 달리, 이안은 멍하니 델핀의 나신을 감상하다 곧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의 손이 자연스레 검을 거두었다. 이안은 두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아, 아니… 그, 그러니까 델핀 선배, 이건…….”
그때 똑똑, 하고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
“델핀 유르디나 님, 방이 소란스럽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혹시 들어가도 괜찮을런지요?”
델핀은 그녀답지 않게 화들짝 놀라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단검을 쥔 손을 내리고, 황급히 부정하려 했다.
“아, 아니… 괘, 괜찮… 흐윽?!”
그러나 하필 가운이 쓸어내린 자리가, 그녀가 다친 부위였던 것이 문제였다.
어깻죽지에 난 부상은 얕기는 해도 상처였다. 그곳을 아무리 부드럽다고 해도 천이 긁고 지나갔으니, 차가운 공기에 닿는 순간 옅은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잊고 있었지만, 당황해서 더듬거리며 말을 주워섬기다 보니 문득 감각이 되돌아오고 만 것이다.
그 소리를 들은 문 건너편의 사용인은, 깜짝 놀란 듯 곧바로 벌컥 문을 열었다.
“유, 유르디나 님! 무슨 일…….”
문을 연 하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새하얀 나신을 드러낸 여인,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사내. 마지막으로 달큰하게 코끝을 맴도는 술 냄새까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이안의 손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하녀의 입에서 아, 하고 탄식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나왔다.
델핀은 서둘러 부정하려고 했다. 그녀가 수치심으로 얼굴을 달구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 아니… 이, 이건……!”
“시, 실례했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시길…….”
그러나 이미 눈치 없이 젊은 청춘남녀의 즐거운 시간을 방해했다고 여긴 하녀는, 그러한 말과 함께 고개를 숙이며 퇴장할 뿐이었다.
델핀의 눈이 바닥을 향했다. 그녀의 얼굴은 새빨개져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부끄러움을 참아내는 중이었다.
어색한 분위기였다. 마찬가지로 얼굴이 달아오른 이안은,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등을 돌렸다.
“그… 제, 제가 진 걸로 합시다. 네, 그럼 다음에…….”
그는 엉거주춤 땅에 떨어진 손도끼를 챙기고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오고 말았다.
그것이 사건의 전말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은 순식간에 아카데미로 퍼져 나갔다.
**
최근 들어 나는 소문의 부당함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만 하더라도 그랬다.
내가 길을 걸을 때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당연하다는 듯 따라붙었다. 그래도 이건 꽤 익숙해졌기에 견딜 만했다.
문제는, 그들이 수군거리는 소문의 내용이었다. 기억을 잃은 이후 예민해진 내 감각은 그들이 나름대로 속삭인다고 하는 소리조차 잡아낼 수 있었다.
“델핀 선배가 비무장 상태로 있었는데, 손도끼로 위협했다던데?”
“굴욕을 주기 위해서였다며, 그렇게까지 고위 귀족이 싫은 거야?”
“으으, 무서워… 앞으로 백작 이상은 쟤랑 이야기하면 안 되겠다.”
어이없는 소문이었다. 도발을 한 쪽은 델핀 선배고, 나는 그에 응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마치 내가 고위 귀족을 향한 적대감으로 사건을 저지른 듯 소문이 퍼져 있었다.
내가 고위 귀족을 미워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지금껏 내가 일으킨 고위 귀족과의 갈등이라곤 세리아를 반죽음이 될 때까지 패고, 테안 패거리도 패고, 엘시 선배도 패고, 이제는 델핀 선배와도 충돌을 빚은 것뿐이었다.
생각해 보니 조금 많긴 했다. 그럼에도 나는 억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모두 나름의 까닭이 있었던 탓이다. 어쩌다 그 상대가 전부 고위 귀족이었을 뿐.
헛소문은 날개를 단 듯 퍼져나가더니, 이제는 멋대로 소문의 내용을 두고 다투는 사람까지 나타나곤 했다.
“그나마 델핀 선배라서 마지막에 단검으로 목젖을 겨눌 수 있었다는데…….”
“무슨 소리야? 손도끼 공자가 칼을 목덜미에 대고 있었다던데?”
“야, 무슨 손도끼 공자가 칼이야. 그럼 ‘칼 공자’겠지.”
“그, 그건 그런가?”
지나가는 행인이 속삭이는 소리를 엿들은 나는 허, 하고 헛웃음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내 주무장은 검이었는데, 어느새 손도끼가 너무 유명해져 버렸다. 그 덕에 어제 델핀 선배도 무심코 내 검의 존재를 잊어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평생을 써오던 무기보다 부무장이 주목받는다는 사실은 내게 상처를 주었다. 내 어깨가 축 늘어졌다.
나도 검술 고수가 되고 싶었다. 손도끼 고수가 아니라.
어제 델핀 선배와의 전투는 내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그녀는 아카데미 4학년 중에서도 검술학부 수석이었다. 그 실력만큼은 진짜였다.
당시 델핀 선배는 비무장 상태에, 단검이라는 자주 쓰지 않는 무기를 다루었고. 술까지 마신데다 내게 기습까지 당했다.
그럼에도 십중팔구는 내 패배로 귀착될 뻔한 싸움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의외성을 노려 어떻게든 무승부를 거두긴 했지만, 다시 한 번 싸운다면 패배하리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것이 진정한 실력이었다. 의외성에 의존할 필요도, 갑작스러운 열세에 처해도, 기습을 당하더라도 실력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수련이 필요했다. 다행스러운 점은, 어젯밤에도 느꼈지만 내 실력이 점점 더 진일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전투를 거칠 때마다 그랬다. 처음에는 감각이 예민해지더니, 그 다음에는 손도끼를 다루질 않나, 이후에는 투척에도 능숙해지고 요즘에는 판단 능력뿐만 아니라 검술도 어느 정도 늘어난 느낌이었다.
마치 실전을 거칠수록 잃어버렸던 실력을 되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만 여전히 마력량만큼은 죽어라 오르지 않았다. 검술도 여러모로 나아지긴 했지만, 기본기는 여전히 부족했다. 결국 이 두 가지는 편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오로지 수련밖에 없었다. 나는 내심 각오를 다졌다. 오랜만에 의욕으로 불타는 느낌이었다.
마침 이제 곧 세리아와 저녁 수련을 할 시간이었다. 아침에는 신전을 다녀오느라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 오늘 보면 델핀 선배의 이야기도 할 겸 대화를 나누어야 할 듯 싶었다.
수련시간을 좀 더 늘려도 좋고. 세리아의 수련량을 따라가기만 해도 내 실력이 지금보다는 더 나아지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내 발걸음이 멈칫한 것은, 어느 게시판 앞이었다.
그곳에는 전단 하나가 붙어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학교의 행사를 홍보하는 내용이었다.
[수렵제 일정 안내]
그 제목이 내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결국 게시판 앞으로 가 전단의 자세한 내용을 살폈다.
대부분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 행사는 위대한 정복황제 아이달로스 폐하가 가장 사랑하던 축제이며, 숲의 마수 중 가장 강한 사냥감을 잡은 사람이 우승하고, 별개로 가장 많은 사냥감을 사냥한 사람에게도 특별상이 존재한다. 그리고 어쩌고 저쩌고.
내 눈이 멎은 곳은 따로 있었다. 짤막하면서도 내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한 한 줄.
[수렵제 참가신청은 축제 당일을 기준으로 일주일 전 저녁 6시까지 받습니다.]
수렵제라, 참가는 해야 할 테지.
일단 편지 내용에 따르면 내가 참가하는 것까진 맞았으니까. 그리고 우승까지 한다는데, 나로서는 도무지 그럴 가능성이 떠오르지 않았다.
조금 비겁한 마음도 들기도 했다. 데렉 교수님을 적당한 말로 구슬려, 위험한 마수를 맡기는 것이다.
아무리 네임드급 마수라도 급이 있었다. 데렉 교수님은 이름이 붙은 마수들 중에서도 온 나라를 떨게 한 마수도 두어 번 잡아본 적이 있는 실력자 중의 실력자였다.
짐작컨대, 숲에 도사리고 있는 마수는 네임드 중에서도 급이 높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나를 비롯한 조원들이 네임드급 마수를 사냥한다는 미래가 도출되지 않았다.
그러고도 가능과 불가능을 가늠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 마수가 등장한다는 미래와, 그 약점까지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내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솔직히, 편지의 내용을 그대로 지켜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세계가 멸망한다는데, 도대체 수렵제 우승과 세계 멸망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로서는 실감 나지 않는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당면한 위기, 그러니까 숲의 마수로부터 인명 피해를 방지하는 정도면 되지 않을까. 그러한 나약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여전히 내 마음속에는 걸리는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세리아, 그리고 델핀 선배.
세리아는 가문에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어 한다. 올해 수렵제가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다. 그리고 델핀 선배는, 세리아의 가장 연약한 상처를 후벼 팠다. 세리아라는 변수를 최대한 제어하기 위해서.
지난밤에는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흐지부지 됐지만, 델핀 선배가 용서 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흐느끼고, 쓰러질 듯 휘청이던 세리아의 지난 시간들.
그처럼 연약한 알맹이를 숨기고 있는 그녀를, 나는 돕고 싶었다. 이 또한 나의 진심이었다. 그래서 내 고민과 시름은 더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세리아를 도울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안전한 길을 갈 것이냐.
양자택일은 언제나 괴로운 법이었다.
**
숲의 공터에 도착하니 늘 그랬듯이 세리아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햇빛이 반짝이며 그녀의 회색 머리카락을 비추었다. 아쿠아마린을 닮은 눈동자와, 그 색감을 돋보이게 하는 뽀얀 피부까지.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녀는 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곧바로 시선을 내게로 향했다.
나는 손을 들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세리아, 나 왔……?”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려던 나는, 곧 말끝을 흐리는 수밖에 없었다.
세리아가 인사조차 듣지 않고, 아무런 말도 없이 내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저벅저벅 걸어 어느새 내 바로 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던 나로서는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세리아가 도대체 왜 이러지?
그러한 의문에 언어를 입혀 입 밖으로 내뱉기도 전에, 세리아의 가녀린 손이 내 멱살을 쥐었다. 그리고 꾸욱, 하고 힘을 주어 나를 잡아당겼다.
엉거주춤 내 상반신이 기울고, 세리아와 내 얼굴이 가까워졌다. 서로의 숨결이 섞일 듯한, 그 아슬아슬한 거리.
세리아의 몸에서는 풋풋한 향기가 났다. 델핀 선배의 향이 달콤한 장미의 향기라면, 그녀의 향은 은은한 풀꽃의 향기를 닮아 있었다.
지금 내 뇌리를 스치는 생각은 그러한 감상밖에 없었다. 그만큼이나 세리아의 행동은 느닷없었고, 또 그 까닭조차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단지 나는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이안 선배.”
나지막이 흘러나온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조금쯤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알 수 없는 감정을 담은, 온기 없는 목소리.
당황한 내 시선이 세리아의 눈동자를 쫓았다. 언제나 맑고 영롱했던 그녀의 아쿠아마린빛 눈동자, 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그녀의 따스한 심성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래, 그랬던 눈동자인데.
“어제, 언니랑 무슨 짓 했어요?”
그토록 깨끗하고 아름다웠던 세리아의 눈동자가, 마치 심연처럼 빛을 잃은 채 질척하게 가라앉아 있어서.
나는 그대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다만 생각했다.
무섭다, 내 목젖에 단검을 들이밀었던 델핀 선배보다도 더.
내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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