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1. 첫 번째 편지(51)
* * *
숲의 공터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드문 일이었다. 본래 나와 세리아가 이 공터에서 만나면 으레 검을 휘두르거나 기합 소리를 흘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공터에 내려앉은 정적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팽팽히 당겨진 실처럼 당장이라도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끊어질 듯한, 아슬아슬한 분위기.
그 백척간두의 한가운데에 내가 서 있었고, 세리아는 그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나를 자꾸 그 끄트머리로 밀어내고 있었다.
여체만이 풍길 수 있는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그리고 몇 번을 보아도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조화로운 이목구비가 내 시야에 가득 찼다.
아무리 미모가 출중해도 지척에서 보면 모자란 점이 하나쯤 나오기 마련인데, 세리아에게는 그마저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축복 받은 유전자였다. 지근거리에서 관찰한 델핀 선배의 미모 또한 단점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벽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그녀의 미모를 느긋한 마음으로 감상하고 싶을 정도였다. 만약 그녀의 눈동자가 칙칙한 빛으로 가라앉아 있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최소한 지금과 같은 분위기에서 ‘느긋한’ 마음으로 그녀를 감상하는 일 따위는 불가능해 보였다. 음영이 사라진 세리아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어, 어제? 델핀 선배랑 말이지…….”
나는 잠시 지난밤의 기억을 되짚었다. 불쾌한 추억이 뒤섞여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얻은 것이 많은 시간이었다.
값비싼 포도주에, 델핀 선배에게 마지막에 한 방 먹일 수도 있었고, 배운 점도 많았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델핀 선배의 그 새하얀 나신.
델핀 선배의 명예를 위해서는 잊어버려야 하겠으나, 그날의 풍경은 아직도 내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사람의 기억이란 잊고 싶다고 잊어지고, 기억하고 싶다고 기억될 만큼 편리하지 못했다. 하물며 그처럼 인상 깊은 광경이었다.
아무리 잊고 싶어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델핀 선배에게는 불행이었고, 내게는 행운이었다.
지난밤의 추억을 더듬거리는 내 눈빛이 잠시 몽롱해졌다. 그러자 세리아의 눈동자에서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그녀가 내 멱살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면서, 싸늘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이안 선배… 지금 다른 여자 생각했죠?”
“아니, 네가 어제 델핀 선배랑 무슨 일 있었냐며!”
나는 억울한 마음에 그렇게 외쳤으나, 애초에 세리아는 그렇게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내 변명은 듣지도 않고, 초조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입에서 으스스한 중얼거림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역시, 또 빼앗기는 거야… 그, 그래서는 안 되는데, 소중한 건데… 다, 다시는 빼앗기고 싶지 않은데…….”
처음에 흐릿했던 그 읊조림은, 점차 감정의 색채를 더해가며 선명해졌다.
초조함, 분노, 질투, 증오, 열등감 등등. 온갖 감정의 탁류가 질척하게 엉겨 붙어 바닥으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세리아의 탁한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불안감을 증언했다. 내 멱살을 쥐고 있던 손 하나가 살며시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무심코 그 손톱을 제 입가로 가져갔다.
아득, 자그마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그녀가 손톱을 살짝 물어뜯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세리아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초조할 때 손가락을 제 입으로 가져가는 것은, 어린 시절 모성의 부재 때문이라고 들은 기억이 났다. 모유를 충분히 공급받지 못한 불만족스러움을 본능적으로 그렇게 해소한다고 했던가. 세리아 또한 마찬가지일지도 몰랐다.
왜 이토록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한 가지, 내가 슬슬 그녀를 만류해야 할 시점이라는 사실뿐.
하지만 어떻게? 나는 난감한 기분으로 고민에 잠겼다.
아득, 으득, 잠시 손톱을 물어뜯던 세리아의 고개가 퍼뜩 들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기묘한 감정이 명멸하고 있었다. 조금은 소름 끼치는 눈빛.
그녀의 입에서 감정의 진흙이 새어나왔다.
“이안 선배, 이안 선배만큼은 절대……!”
그렇게 세리아가 무어라 외치려던 그때, 내 망설임이 끝났다.
내 팔이 곧바로 세리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세리아는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는지, 그대로 내 품에 폭 안겨 들었다.
푹신하고 따뜻한 감촉이 충족감을 주었다. 나는 그녀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세리아는,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입술만 달싹이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 전에 들은 기억이 났다. 세리아가 불안해 할 때면, 그녀의 어머니가 이러한 방식으로 그녀를 달래 주었다고.
손톱을 물어뜯는 것도 어린 시절의 모성과 연관이 있다면, 나 또한 그와 연관된 방식으로 그녀를 달래주면 될 터였다. 그러한 단순한 생각.
그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몸을 뻣뻣이 굳힌 채 내 몸에 안겨 있던 세리아는, 곧 힘을 풀고 얌전히 내 품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팔이 내 몸을 살짝 감싸 안았다. 흐릿한 광증이 감돌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새 폭풍우가 지난 바다처럼 잔잔해져 있었다.
나는 그녀를 달래듯이 속삭였다.
“세리아, 나는 어디도 가지 않아.”
내 말을 듣고 세리아는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다만 그녀의 눈이 사르르 감기고, 가팔라지던 숨소리가 가라앉았다.
아무 말도 없이 서로의 온기를 느끼기를 한참.
세리아가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입에서 토막난 소리가 새어나왔다. 이제야 정신이 들었다는 듯이.
“아, 으, 아, 아…….”
세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내게도 그 열기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방금 전 세리아가 보인 이상행동은, 그녀가 제정신이 아닐 때 저지른 짓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제정신을 되찾아 부끄러워하는 듯했고, 나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세리아에게 농을 던졌다.
“그렇게 걱정했어?”
세리아의 몸이 펄쩍 뛰어올랐다. 그녀가 내 품을 빠져나가자 단숨에 찬바람이 빈 자리를 채웠다. 조금은 쓸쓸한 기분이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세리아는 손가락으로 제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곤란하거나 부끄러움이 극에 달하면 나오는 버릇인 듯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팽팽 돌고 있었다. 그녀가 안쓰러울 만큼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아, 으, 그, 그, 그게!”
“너무 걱정하지 마, 그 소문 대부분 헛소리니까.”
내가 델핀 선배를 덮치거나, 그녀에게 굴욕을 주려고 옷을 벗겼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란 말인가.
혹은 내가 델핀 선배의 숨겨둔 애인이라는 소문까지도 퍼져 있었다. 하필이면 지난번에 엘시 선배가 그런 발언을 한 탓인 듯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괘씸한데, 엘시 선배를 한 번 더 찾아갈까 싶었다.
내 단언에 세리아는 조금 안심했는지, 고개를 푹 숙이면서도 조금 기쁜 기색을 보였다.
“여, 역시 그랬군요…….”
그렇게 믿고 있었다는 듯 이야기해 봐야, 방금 전에는 누가 봐도 의심하는 모습이었는데.
그러나 세리아를 조금 더 놀렸다가는 그녀가 울상을 지을지도 몰라서, 나는 그만두기로 했다. 표정 변화가 풍부한 세리아는 보기 드문지라 조금 더 놀릴까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말이다.
다만 나는 조금 걸리는 점이 있어서, 입술을 뗐다 붙였다. 이를 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해 보면 이미 세리아와 나는 수많은 비밀을 공유한 상태였다. 지금 와서 망설이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심지어 그녀가 잠시 제정신을 잃을 정도의 문제라면 더더욱.
세리아는 부끄러움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애꿎은 땅만 발로 죽죽 긋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더는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레 물었다.
“……세리아, 그러고 보니 너 조금 신경 쓰이는 소리를 하던데.”
“네, 네헵?! 으으…….”
나름대로는 그녀를 배려해서 나지막이 뱉은 목소리였으나, 이미 수치심으로 긴장할 대로 긴장한 세리아는 그마저도 갑작스러웠던 듯했다.
그녀는 다급히 대답하다가, 오랜만에 혀를 씹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꽤 귀여운 모습이었다. 나는 옅은 웃음을 흘리고는 세리아에게 물었다.
“뭐, 뺏기고 싶지 않다던가?”
아, 하고 안타까운 소리가 세리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녀는 조금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시무룩해져서 다시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 랬나요…….”
우울한 안색이었다. 슬픈 기억이 관계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 거의 확실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러한 반응이 나올 리가 없을 테니까.
이대로 가다가는 또 눈물바다가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세리아의 기분을 조금 가볍게 해주고자, 그녀를 놀렸다.
“응, 그랬어. 나만큼은 뺏기고 싶지 않다던데.”
“그, 그, 그, 그건 말이죠……!”
세리아는 늘 그렇듯 예상대로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축 쳐져 있던 그녀의 몸이 다시 빳빳하게 굳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더니, 제대로 변명을 내놓을 수 없었던 입은 말을 끊임없이 더듬을 뿐이었다.
결국 그 끝은 하나였다.
한참을 당황하고 있던 세리아는, 이내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밑 빠진 독에서 물이 빠져나가듯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맞아요, 어릴 때부터 언니한테 빼앗기는 일이 잦았거든요.”
흐음, 하고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침음만을 삼켰다.
그러리라고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당사자에게 직접 들으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는 세리아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쓸쓸한 기색이 스쳤다. 그녀는, 불안했던 것이다.
제 것이라고는 없이 자란 그녀였다. ‘유르디나’라는 성조차 언제 빼앗길지 모르는 그녀에게 있어, 나는 처음으로 생긴 친구였다.
그마저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을 터였다. 세리아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안 선배, 저는 어린 시절부터 검을 좋아했거든요.”
“그래 보여.”
“그런데 단 한 번도, 제 마음에 드는 검을 써본 적이 없어요.”
내 눈이 저절로 세리아의 허리춤을 향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검은 꽤 고급품이긴 했지만, 유르디나 가문의 자제에게 주어진 물건이라기에는 조금 급이 떨어지는 감이 있었다.
심지어 마수 사냥까지 나가며 실전을 치르던 세리아가 아닌가. 검은 여벌의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조금 더 좋은 품질의 물건을 쓸 만도 한데도.
지난밤 델핀 선배와의 싸움을 떠올렸다. 그녀가 쓰던 단검은 어땠지.
장인이 만든 물건처럼 날카로웠다. 금빛의 섬광이 시야를 갈랐을 때는 눈이 불타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때는 그것이 단지 델핀 선배의 꼼꼼함을 의미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야 떠올랐다. 델핀 선배를 만나기 전, 세리아가 남겼던 경고.
가지고 싶은 것은, 무슨 수를 써서든 가진다.
유르디나의 손이 닿는 범위 내에서 최고의 물건들은 모두 델핀 선배의 몫이었을 터다. 그렇다면 세리아가 가지고 갈 수 있는 몫은 뻔했다.
델핀이 남긴 것들, 세리아의 마음은 상관없었다. 오로지 문제는 델핀의 마음에 드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문제일 뿐.
나와 델핀 선배의 만남이 세리아의 아픈 기억을 건드렸던 모양이었다. 세리아의 쓸쓸한 고백이 이어졌다.
“어릴 때 기사들의 검을 보고, 하나만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받지 못했어요.”
“왜?”
“언니가 가지고 싶어 했으니까요.”
알 만하다는 듯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본 델핀 선배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승부욕만큼이나 소유욕도 강한 여자였다.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겠지. 그녀의 세계관 속에서 그녀는 승자고, 세리아는 패자였으니까.
“검뿐만이 아니에요. 대부분 그랬습니다. 심지어 어머니가 쫓겨났던 날조차, 제 의견 따위는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세리아 유르디나는 천출이고 패배자니까…….”
“……그렇다고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
“유르디나 가문에서는 그래야 합니다.”
내 뻔한 위로는 세리아를 달래지 못했다. 그렇게 대답하는 세리아는 지쳐 보였다. 이제는 포기했다는 듯, 그러면서 동시에 은근한 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결연한 의지였다. 그렇다면 그 유르디나의 방식대로 승부를 볼 수밖에 없다는, 그러한 각오.
한동안 입술을 짓씹던 그녀는,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평생 웃음을 지을 줄 몰랐던 소녀의 미소는 처량했고, 미소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친구도 없고, 가지고 싶은 것도 모조리 빼앗기며 살아온 그녀였다.
그러한 삶은 그녀에게 웃음과 행복마저 앗아가 버렸다. 참으로 지독한 이야기였다. 누구나 그 속내를 깊이 파고들면 이토록 슬픈 이야기가 하나씩 나오는 걸까.
세리아는 억지로 태연함을 가장한 채, 내게 말했다.
“이상하네요, 원래 제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 편인데. 왜 이안 선배 앞에서는… 그, 그럼, 훈련할까요?”
세리아는 슬쩍 내 눈치를 살피며 그렇게 제안했다. 이대로 묻어두고 끝내겠다는 심산으로 보였다.
그 의도 자체에는 동의했다. 더 이야기해 봐야 부끄러운 꼴만 더 보일 테니까.
다만 내가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한 까닭은, 내 마음의 무게추가 비로소 기울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델핀 선배를 떠올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누군가의 상처를 헤집고, 승리를 위해서는 그래도 마땅하다는 그 당당한 태도.
세리아에게 어머니를 비롯한 모든 것을 빼앗아 갔는데, 열패감으로 몸부림치는 이복동생을 짓밟으려 했던 그녀를.
“……세리아.”
“네, 네헷?! 우, 으으…….”
세리아는 내 나지막한 부름에 또 다시 혀를 깨물고 말았다. 그녀가 다시 시무룩해졌다. 그러나 이미 어느 생각에 잠겨 있던 나로서는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았다.
다만 먼 곳을 응시하면서, 세리아에게 물었을 따름이었다.
“수렵제, 참가한다고 했지?”
“……? 네, 그렇습니다.”
흐음, 하고 미심쩍다는 내 시선이 세리아를 향했다.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조원은 다 구했어?”
움찔, 하고 세리아의 몸이 떨렸다. 내 질문이 정곡을 찌른 탓이었다.
수렵제는 4인1조로 진행된다. 당연히 세리아 혼자서는 참가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조원을 모아야 한다는 소리인데, 그러지 않아도 가뜩이나 인간관계가 좁은데 최근 소문도 좋지 않은 그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리아는 더더욱 풀이 죽고 말았다. 그녀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 아니요.”
우울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내가 다음으로 던진 말에, 그녀의 분위기는 곧바로 반전됐다.
“내가 모아줄까?”
“저, 정말인가요!”
내 제안에 세리아는 대번에 화색이 되었다. 환하게 밝아오는 얼굴을 보니 괜히 나까지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내가 본 세리아의 반응 중에서는 가장 극적인 표정 변화였다. 그녀의 낯빛은 기본적으로 도도하고 차가우며, 감정을 드러낸다 해도 눈꼬리나 입꼬리가 조금 움직이는 수준에 불과했는데.
그만큼 반가운 제안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피식, 하고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마침 수렵제에서 할 일이 있었거든.”
그러나 세리아는 내가 덧붙인 말을 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기분이 좋은지 눈을 반짝이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역시, 이안 선배는 믿을 수 있어요. 언니와 있었던 소문도 전부 거짓말인 게 맞았군요.”
“당연하지, 아직도 의심하고 있었어?”
내 황당하다는 듯한 반응에, 세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는 믿겠다는 듯이.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마지막으로 내게 물었다.
“하기야,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었어요. 이안 선배가 언니의 나체를 본다든가…….”
흠칫, 하고 지금껏 자신만만하던 내 몸이 굳었다. 하필이면 그 과장된 소문 중 유일한 진실을 세리아가 입에 담은 탓이었다.
세리아는 강한 신뢰의 눈빛을 보내며, 내게 말했다.
“그것도 거짓말이죠, 이안 선배?”
“으, 으응…….”
세리아에게 돌려줄 내 반응은 미묘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세리아와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자, 세리아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그녀의 눈동자에서 다시 빛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깊고 질척한 색으로 가라앉았다.
“……이안 선배?”
“아니, 뭐… 그러니까 말이지, 세리아.”
나는 세리아의 싸늘해진 목소리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식은땀을 흘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까지는 사실이야.”
세리아의 아쿠아마린빛 눈동자에서 음영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