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1. 첫 번째 편지(52)
* * *
한낮의 아카데미는 늘 그렇듯 평온했다.
나는 언제나와 같이 학생회관에 입점한 찻집에서 음료를 한 잔 샀다. 그리고 빨대를 쪽쪽 빨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향긋한 다향이 올라왔다. 머리가 상쾌해지는 이 느낌, 오랜 시간 수련과 공부로 지쳐 버린 뇌에 새로운 활력을 공급해 주는 냄새였다.
이것이 내 일상이었다. 3년째 아카데미를 다니면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견고한 일과. 그리고 그러한 하루를 보내는 내 곁에는 으레 둘 중 하나가 붙어 있곤 했다.
셀린 하스터, 아니면 레토 아인스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살짝 곱슬기가 감도는 갈색 머리카락에, 조금 피로한 기색의 녹색 눈동자를 가진 사내가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내 소꿉친구이자 가장 절친한 친구 중 하나인 레토였다. 그는 오늘도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 유르디나의 싸가지가 뭐라 하든?”
“아무 말도 안하던데? 얼굴만 싸늘히 굳어서, 헤어질 때까지 말도 안 했어.”
아이고, 내 말을 들은 레토의 입에서 절로 탄식이 새어나왔다.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는 레토의 반응을 보고 대략적으로나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잘못했구나. 아니나 다를까 레토의 입에서 곧 타박이 터져 나왔다.
“야, 안심시키지는 못할 망정……! 너 그러다 나중에 큰일 나는 수가 있어.”
“……큰일이라니?”
내 얼떨떨한 반문에 레토는 마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전해주듯 상반신을 숙였다. 그리고 내게 속삭였다.
“여자가 집착이 심해지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거든.”
그러면서 레토는 무시무시한 기억이라도 생각났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물론 내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 경고였다.
그 세리아 유르디나가?
나와 대련을 할 때도 폭력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빈틈을 드러냈던 그녀였다. 큰일이 난다고 해봐야 얼마나 나겠는가.
나는 하, 하고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세리아가 얼마나 착한 애인데… 그리고 또, 처음으로 생긴 친구라 그런 거겠지. 친구가 많아지면 차차 나아질 거야.”
내 반박에도 레토는 여전히 미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더니, 으으으음, 하는 신음을 흘렸다.
그가 고개를 좌로 갸웃, 우로 갸웃하다가,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야 너 말이지… 으으으음,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렇게 제 스스로 하던 말을 끊은 레토는, 곧 인자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데이면서 배우는 거지. 응원한다, 임마.”
“무슨 뜻인진 모르겠지만, 그래. 그래.”
나와 레토는 평소대로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한낮의 평화를 만끽했다.
최근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일이 너무 많았다. 기억을 잃은 이후부터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사건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저 아카데미만 졸업하면 그만이었는데, 어느새 아카데미의 유명인사가 되어 있다니.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피로한 느낌이었다. 최근 들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힘든 일이 너무나 많았다.
특히 최근 내 고민거리 중 하나는, 바로 셀린이었다.
나는 슬쩍 레토를 떠보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셀린은 어때?”
내 질문에 오호, 하고 레토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대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신경은 좀 쓰이시나 봐?”
“아니, 어제 잠깐 마주쳤는데 워낙 쌀쌀 맞아야 말이지.”
내가 머쓱한 목소리로 어제의 일을 고백하자 레토가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나와 셀린이 싸우는 꼴이 꽤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골방에 틀어박혀 살아가는 마법사다운 심보였다. 나는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길에서 마주친 셀린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가웠다. 그녀는 나를 흘겨보다가, 이내 혀를 쏙 내밀고 베에 하는 소리를 냈다.
그것이 끝이었다. 셀린은 그대로 흥, 하는 소리와 함께 떠나버렸다.
서리를 맞는 겨울나무의 심정이 이럴까. 나는 씁쓸하게도 여동생과 같은 소녀에게 버림받은 심정을 가슴에 새겨야 했다.
그러나 복잡한 내 심경과는 달리, 레토는 그다지 걱정이 되지 않는 듯했다.
그는 내 울적한 안색을 살피다가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툭, 하고 들고 있던 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신경 쓰지 마, 지금 걔도 많이 초조할 테니까.”
“……셀린이 초조할 이유가 뭐가 있어?”
내가 어리둥절해서 되묻자, 레토는 혀를 쯧쯧 찰 뿐이었다. 그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그러니까, 초조해 하는 거지.”
결국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수밖에 없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넘기라고, 어린 시절에 여동생에게 배운 적이 있었다. 나름대로 상인으로서 재능이 있는 아이였으니 그녀의 말이 대개 옳을 터였다.
레토는 내 묵묵부답에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만 내저을 뿐이었다. 그러던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궁금한 점이 생긴 듯했다.
그가 말없이 빨대만 빨고 있는 내게 물었다. 순수한 의문이 담긴 질문이었다.
“야, 그러고 보니 너 수렵제 참가한다며?”
“응? 어, 어. 그렇지… 세리아랑 함께 참가하려고.”
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말을 더듬다가,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숨길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말하자면 적극적으로 레토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가 아닌가.
레토는 여전히 내 생각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조원은 어떻게 하려고?”
“그야…….”
나는 슬쩍 레토의 눈치를 살폈다. 눈치 하나는 귀신 같이 빠른 레토였다. 내 눈빛이 어떠한 의도를 담고 있는지 모를 턱이 없었다.
레토의 미간이 대번에 좁혀졌다. 그의 눈썹이 꿈틀, 하고 움직였다. 그의 불편한 심정을 대변하듯이.
“설마… 그중 하나가 나는 아니겠죠, 미친 새끼 씨?”
“레토…….”
나는 간절한 눈빛을 담아 레토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레토는 발작이라도 하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든 말든 나는 신뢰를 가득 담은 눈빛으로 그에게 권했다.
“……죽어도 한날한시에 죽기로 했잖아. 함께 가자.”
레토의 반응은, 솔직히 좋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곧바로 험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니, 미친놈아! 난 이론 마법사라고!”
“하지만 어떡해, 믿을 사람이 너밖에 없는데!”
레토가 눈치 챈 대로, 내가 생각하는 조원 후보는 바로 그와 셀린이었다.
세리아와 셀린의 사이가 걱정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내가 등 뒤를 믿고 맡길 만한 사람들은 그 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렵제에 참가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나를 믿고 따라와 줄 만큼 신의가 깊은 사람은 더 존재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네임드급 마수를 사냥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리 위험부담을 공유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 까닭조차 제대로 알려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근거 없는 말조차 신뢰할 수 있는 사이의 동료가 필요했다.
그러나 내 계속되는 강권에도 레토의 발작은 계속 이어졌다. 그의 고개가 거칠게 내저어졌다.
“안 돼, 안 돼… 이건 아무리 네 부탁이라도 들어줄 수 없어.”
나는 레토의 필사적인 거절에 쓰읍, 하고 입맛을 다셨다. 벌써부터 일이 꼬여서는 안 됐다. 나는 그를 달래듯 말했다.
“아무리 이론 마법사라고 해도, 시간만 있으면 마법은 쓸 수 있잖아?”
“그 시간이 존나게 오래 걸리니까 문제지, 임마! 게다가 마법진이나 회로 구성에는 얼마나 많은 준비가 필요한데? 그 급박한 전투 상황에서 일일이 대응이 가능하겠냐? 괜히 전투 마법사랑 이론 마법사가 나뉘어져 있는 게 아니라니깐!”
그런가, 나는 레토의 말에 한숨을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레토가 마법사라곤 해도, 그는 전투와 인연이 멀었다. ‘이론 마법사’라고 불리는 종류의 마법사였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주로 연구나 마법진, 아티팩트 등에 관심이 많았다. 일상생활에 마법을 적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마도공학을 선도하는 이들도 바로 이론 마법사들이었다. 힘 깨나 쓰는 귀족들의 고문 마법사들도 대부분 이러한 종류에 속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연구에만 몰두하다 보니, 정작 전투에는 별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전투 중에 한가롭게 마법진을 그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대규모 전쟁 같은 곳에서는 이론 마법사들이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하나, 제국의 정복 전쟁 이후 그 수준의 전쟁이 일어난 적은 손에 꼽았다.
그래서 전투에 특화된 마법사들이 따로 생겨났는데, 그들이 바로 ‘전투 마법사’였다.
고속 영창과 다종다양한 마법으로 다양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도록 특화된 마법사들이었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마법사 특유의 막대한 화력도 투사할 수 있기에 어느 곳에서나 환영받는 존재들이기도 했다.
다만 어느 곳에서나 환영받는다는 건, 그만큼이나 수요가 많아 인력을 구하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알고 지내는 전투 마법사는 몇몇 있더라도,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레토를 영입하려고 했던 건데.
이토록 완강히 거부한다면 어쩔 수 없었다. 목숨까지 걸어야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우정을 빌미로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내 낯빛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한탄과도 같은 중얼거림이 절로 흘러나왔다.
“씁, 그럼 어떡하지… 아무리 그래도 마법사 하나쯤은 있어야 할 텐데…….”
그러자 레토도 조금쯤은 미안함을 느꼈는지, 헛기침을 하며 슬쩍 내 시선을 피했다. 내 우울한 기분이 전염되기라도 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잠시 레토와 내 사이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내가 머릿속으로 지금까지 쌓아온 인맥을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있는데, 문득 레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하나 있다.”
내 의아한 시선이 레토를 향했다. 그의 눈동자에서는 어느새 이채가 감돌고 있었다. 기막힌 생각을 떠올렸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그는 조금쯤 신나 보이기까지 했는데, 그는 키득거리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내게 말했다.
“너, 내 말대로만 해라. 그럼 마법사 하나 구할 수 있어.”
“……?”
결국 나는 내 절친한 친구의 조언을 따라 보기로 했다.
**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저 구석에서 학생 하나가 벽에 밀쳐지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그 앞에는 아담한 체구의 소녀가 서 있었고, 그 양옆으로 덩치 좋은 사내 둘이 대기하고 있었다.
골목의 벽면으로 밀쳐진 학생은 잔뜩 겁을 집어먹은 듯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메마른 사내였는데, 근육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검술학부는 아니었다.
아담한 체구의 소녀는 마치 인형과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 갈색 머리카락과 블루사파이어빛 눈동자, 뽀얀 피부만 보더라도 그랬다.
그러나 그토록 사랑스러운 그녀는, 그 외모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잔혹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야, 넌 내가 만만하냐?”
낮게 깔린, 위협적인 목소리. 입술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적의로 번들거리는 그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눈앞의 사내를 찢어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듯 살벌한 빛을 품고 있었다.
사내는 히이익, 하고 비명을 내지르며 벽면에 더욱 달라붙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랑스러운 외모의 소녀가 하, 하고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 전에 남들 앞에서 추한 꼴 한 번 보였다고, 이 엘시 라이넬라가 만만해? ‘오줌싸개’는 무슨, 씹… 이 찐따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진짜!!!”
나름대로 조곤조곤 말을 이어가려던 듯했던 소녀였으나, 어느 시점부터는 도무지 진정할 수 없었던지 그녀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소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의 손이 거칠게 사내의 멱살을 말아 쥐었다. 훅, 하고 사내의 상반신이 굽혀졌다.
겁에 질려 파르르 떨리는 사내의 눈을 마주하면서, 엘시 선배는 으득으득 이를 갈았다.
“내가 한 번 털렸다고 좆밥이라도 된 줄 알아?! 너 하나 조지지 못할 것 같냐고, 응?!”
“아, 아니에요…….”
“아닌데 그따위 좆같은 소리를 왜 입에 담아? 좆되고 싶어서 그런 거지? 아하하… 돌아버리겠네, 진짜.”
그러면서 소녀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피로와 아픔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지난 며칠의 시간이 그녀에게는 커다란 시련이 되었던 듯했다.
그녀는 지친 눈빛으로, 손에 파지직, 하는 전류를 일으켰다.
사내의 눈동자에 맺힌 공포가 더더욱 짙어졌다. 그가 부들거리며 소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시도했으나, 그 자그마한 체구와 달리 소녀의 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아무리 마법사라도 목숨을 건 전장에서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검술학부에 비해 신체가 유약하기는 해도, 어느 정도는 몸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소녀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라면 심약한 성인 남성 하나쯤은 압도할 수 있었다. 그래봐야 비슷한 수준의 검사에게 걸리면 순식간에 박살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빼빼 마른 사내는 검사가 아니었고, 따라서 소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싱긋, 하고 소녀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이를 마주한 사내라면 가슴이 콕, 하고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 법한 귀엽고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험악한 말만 아니었다면.
“내가 그 새끼한테 어쩌다 한 번 털린 거 가지고, 오줌싸개니 지랄이니… 야, 내가 다시 그 새끼랑 싸우면 질 것 같냐?”
“아, 아닙니다!”
사내는 그 물음이 유일한 동앗줄이라도 되는 양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자 후, 하고 소녀가 깊은 숨을 내뱉었다.
“그래? 잘 아네?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봐.”
“……?”
멍하니, 사내의 눈이 소녀를 향했다. 소녀는 다시 한 번 빙긋 미소를 지어 주었다.
“지금부터, 이 전류로 네 신경을 조져줄 거거든? 알다시피 마법사는 마력 제어 능력이 중요해서 말이야… 내가 이렇게 미세한 제어를 또 기막히게 잘해요. 존나, 존나 아플 거야. 그런데 비명 지르지 마, 알겠지?”
사내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는 애처롭게 떨다 못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듯 보였다. 그러나 그는 주저앉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팍, 하고 소녀가 질렸다는 듯 사내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밀쳤다. 사내는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으나, 그 양팔을 소녀의 옆에서 대기 중이던 두 덩치가 붙잡고 말았다.
“딱, 10초다. 뒤질 것 같겠지만… 그래도 참아, 알겠지? 만약 중간에 비명을 지르면…….”
서서히 걸어, 소녀가 울먹거리는 사내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의 손에 맺힌 전기가 새파랗게 빛났다. 파지직, 거리는 소리.
“……처음부터 다시 한다, 명심해. 난, 약속을 꼭 지켜.”
“으, 으으아아아아아악!”
사내가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쳐도 그 폭력에서 벗어날 수단은 없어 보였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절망 어린 몸짓, 소녀는 그 모습을 보고 즐겁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 이래야지. 당연히 나를 보면 이래야 하는 거야.
그러한 생각이 얼핏 비치는 눈동자였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엘시 선배.”
내 나지막한 부름에, 엘시 선배가 짜증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사나운 눈빛으로 몸을 돌리며 내게 외쳤다.
“어떤 눈치 없는 씹새, 끼… 가…….”
그리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그녀의 손에 맺힌 푸른 전하가 곧바로 흩어졌다. 부릅떠진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을 경악을 말해주고 있었다.
침묵이 감돌았다. 엘시 선배에게 위협받고 있던 학생은 어리둥절한 기색이었고, 그를 붙잡고 있던 두 덩치도 나를 보고 몸을 딱딱히 굳혔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럴 때 레토가 뭐라고 했더라, 그래.
아무 말도 없이, 내 손이 허리춤을 향했다. 엘시 선배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본능과도 같은 반응.
이윽고 내 손에, 손도끼 한 자루가 뽑혀 나왔다.
엘시 선배가 히끅, 하고 딸꾹질을 했다. 그녀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리더니, 상반신마저 애처로울 만큼 덜덜 떨렸다. 그대로 두면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듯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공포에 젖은 눈동자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겁먹은 그 얼굴.
필요 이상으로 나를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상냥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우리, 이야기 좀 할까요?”
엘시 선배의 낯빛이 더없이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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