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1. 첫 번째 편지(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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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거리는 바람이 기분 좋은 오후였다. 아카데미에는 나른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은 학생들이 저녁 메뉴를 고민할 시간이었다.
평소라면 나 또한 그러한 일상에 녹아들어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특별한 용무가 있었기에, 나는 유동인구로 북적이는 중심가에서 얼마쯤 비껴나가 있었다.
밤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내 앞에 섰다. 아무도 쓰지 않는 강의동의 뒤편, 인적 드문 공터에는 그녀와 나 단 둘뿐이었다.
고깔모자를 쓴 소녀의 블루사파이어빛 눈동자가 처연히 흔들렸다.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피던 소녀는, 그러다 내 시선이 그녀를 향하기라도 할 테면 재빨리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제 고깔모자를 꼬옥 붙들고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누가 봐도 나를 두려워하는 모양새였다. 소녀의 그 사랑스러운 외모 탓인지 구도만 보자면 내가 악당이고, 그녀가 무고한 피해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나로서는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내 앞에 선 소녀의 이름은 엘시 라이넬라, 마도명문 라이넬라 백작가의 수재였다.
아카데미 최고학년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실력자로, 그 인형 같은 외모와 대비되는 잔혹한 성정으로 유명한 여인이었다. 지금만 하더라도 그녀는 또 다른 학생을 괴롭히다가 내게 제지를 당한 차였다.
그랬던 그녀가, 손도끼 좀 보여주었다고 이렇게 애처롭게 떨고 있다니.
그래도 그 성깔이 어디 가지는 않았던지 내게 순순히 끌려오지는 않았다. 그녀는 발악처럼 ‘시, 싫어!’라고 외쳤지만, 내가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다가서자 곧 백기를 들었다.
엘시 선배가 내 뒤를 졸졸 따라올 때까지는 몇 초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위협받고 있던 학생은 무사히 풀려났고, 엘시 선배를 수행하던 두 덩치는 멋쩍은 표정으로 그 자리를 떠나야 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엘시 선배가 그 빼빼 마른 사내에게 자신했듯, 다시 승부를 벌이면 십중팔구는 내 패배라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때는 기습의 이점을 살려 제압에 성공했을 뿐이지, 지금 맞붙는다면 일대일이라도 엘시 선배가 우위였다. 최근 내 실력이 빠르게 성장하긴 했지만 4학년 중에서도 실력자에 속하는 엘시 선배와 맞붙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날의 기억이 돌에 박힌 정처럼 엘시 선배에게 깊이 틀어박혀, 그녀는 지금 내게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툭, 건들면 깨져나갈 듯이 엘시 선배는 위태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울상을 지은 그 눈에서는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엘시 선배에게 괴롭힘 당하던 이들이 보면 꼴좋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조금 씁쓸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 선배였고, 나는 폭력을 즐기는 인간이 아니었다. 물론 최근 들어 수틀리면 손도끼를 뽑아드는 경향이 있긴 한데, 결과적으로 나는 나와 내 주변인들을 지키는 목적 외에 무력을 쓰는 일이 드물었다.
고작해야 지난 델핀 선배와의 대결이 그 예외에 속할 터였다. 내가 휘두른 폭력의 결과가 이토록 노골적으로 시각화되니 마음이 좋지 않을 수밖에.
물론 그렇다고 해서 후회스럽지는 않았다. 엘시 선배는 내게 위협을 가했고, 나는 그에 마땅한 대가를 돌려주었을 뿐이었다.
나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엘시 선배를 불렀다.
“엘시 선배.”
“……흐, 흐끅?!”
내 나지막한 부름에 엘시 선배는 경기라도 일으키듯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는 공포에 젖은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곤란했다. 나는 엘시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온 처지였다. 솔직히 말해 그녀의 두려움을 조금 이용해 보려는 심산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적당한 수준이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만큼이나 나를 두려워하면 동행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옆에만 서도 덜덜 떠는데, 상식적으로 그만큼 무서워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을 리가 없었다.
필사적으로 거부하려고 들겠지. 그리고 전투에서 동료란 최소한 등 뒤를 믿고 맡길 정도의 신뢰 관계가 필수적이었다. 강요된 동행은 어디까지나 하책에 불과했다.
안타깝게도 레토의 조언은 이러한 복잡한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가 전해준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만일 비협조적으로 나오잖아? 그럼 일단 손도끼부터 꺼내.’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투였다. 실제로 지금까지는 그 조언이 유효했지만, 지금부터는 아니라고 생각해야 했다.
나는 흐음, 하고 곤란하다는 듯 침음을 삼키며 턱을 받쳤다. 그 자그마한 몸짓마저 엘시 선배에게는 위협적이었던지, 소녀의 몸이 다시 움찔 떨렸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너무 나만 이야기한 감이 있긴 했다. 엘시 선배는 떠느라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혹시 말을 하다 보면 긴장이 풀어지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조심스레 그녀에게 권했다.
“엘시 선배,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대답…….”
“……으, 아니, 네, 네헷!”
‘대답’이라는 말이 들려오자마자 그녀는 몸을 바짝 굳히면서 그렇게 외쳤다. 경계 구호를 외치는 군인과 같은 자세였다. 내 손이 저절로 이마를 짚었다.
이것만큼은 엘시 선배도 부끄러웠는지, 그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후배한테 이만큼이나 수치스러운 반응을 보이기도 어려울 터였다.
“아, 아니… 그, 그, 그러니까… 으, 응! 왜, 왜애!”
당당함을 흉내 낸 목소리였으나, 숨길 수 없는 떨림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엘시 선배는 그렇게라도 방금 전의 수치스러운 답변을 수습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굳이 엘시 선배의 그러한 마음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엘시 선배는 여러모로 무너져 내릴 것처럼 보였다.
“제가 단 둘이 보자고 한 이유, 알겠어요?”
우뚝, 하고 엘시 선배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녀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고뇌의 기색이 스쳤다.
걸리는 부분이 너무 많은 듯했다. 그녀가 재빨리 제 고깔모자를 꾹 눌러쓰며 내 시선을 피했다. 더듬거리는 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그, 글쎄… 왜, 왜, 왜 보자고 한 건데에…….”
그녀의 청색 동공이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말끝이 늘어지며 제대로 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내 예민해진 청각은 상대가 아무리 말끝을 절어도 그 내용을 읽어낼 수 있을 만큼 날카로웠지만, 오랜 버릇 탓인지 나는 무심코 걸음을 내딛고 말았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엘시 선배는 이를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녀는 히익, 하고 짧은 비명을 내지르더니 그 자리에 웅크려 앉았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제 잘못을 읊어대기 시작했다.
“자, 자, 잘못했어요! 다, 다시는 까불지 않을게요. ‘그 새끼’라고 부르지도 않고, 다시 싸우면 이긴다고 하지도 않고, 그, 그리고 또…….”
내 걸음걸이가 잠시 멎었다. 아무래도 그날 엘시 선배에게 남은 마음의 상처는 꽤 극심한 편에 속한 듯했다. 내가 다가서는 것만으로도 이만큼이나 두려워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살면서 난생 처음으로 겪은 수치였다. 남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일 따위, 그녀에게는 낯선 일이었겠지.
그러지 않아도 평판이 좋지 않던 엘시 선배였다. 적도 많았던 만큼 며칠 동안 그녀가 겪었을 고난이 얼마나 심했을지는, 듣지 않아도 대략적이나마 예상이 갔다.
목숨을 위협받던 그날의 기억, 공개적으로 당한 수치, 그에 더불어 며칠 동안 그녀를 따라다니던 악독한 소문과 비방까지.
그것이 깊이 패여 있던 그녀의 감정의 골짜기에 더욱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러한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다.
곤란한데, 나는 벌써 두 번째로 드는 생각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엘시 선배를 놓아주고 싶었다. 냉정히 말해 그녀가 누구를 괴롭히고 다니던 ‘꼬마 악당’ 짓을 하고 다니던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내 눈에 들어온다면 제지하겠지만, 그 이상은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누구 하나가 이토록 망가진다는 것은 나로서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이대로 그녀와 나의 연을 끊고, 시간이 그 상처를 치료해 주길 바라는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은 나도 꽤 필사적이라는 점이었다.
수렵제가 다가오고 있었고,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든 세리아를 위해서든 네임드급 마수를 사냥해서 우승을 차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엘시 선배 정도의 전력이 얼마나 큰 힘이 될지는 굳이 가늠해 볼 필요까지도 없었다.
무조건 영입해야 했다. 할 수만 있다면.
내 고민이 깊어지는 줄도 모르고, 엘시 선배의 고해성사는 아직 현재진행형이었다.
“저, 절대 명예를 더럽힐 생각까지는… 그, 그래! ‘오줌싸개’! 오줌싸개라 해도 뭐라 하지 않을게, ‘오줌싸개’ 할 테니까, 그러니까 그마안… 흐으윽, 그, 그만…….”
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마땅히 생각나는 방법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
잠시 멈칫했던 내 발걸음이 다시금 이어졌다. 저벅저벅 걷는 내 걸음걸이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내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 엘시 선배는 더욱 몸을 웅크리며 파들파들 떨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이제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숫제 애원하는 어조에 가까웠다.
“왜, 왜 그러는데에… 왜 나한테만 그러냐구우! 흐끅, 사, 사과했잖아! 잘못했다고 했잖아, 오, 오줌싸개도 하겠다고 하잖아! 흐으윽, 오, 오지 마! 사, 살려줘! 아니, 사, 살려주세요! 히이이이익!”
엘시 선배의 지척에 달한 내 손이 움직였고, 엘시 선배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파르르 떨리는 몸이 그녀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
툭, 하고.
내 손이 엘시 선배의 모자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엘시 선배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고깔모자 너머라서, 솔직히 말해서 별다른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내게 폭력을 가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에는 충분했다. 덜덜 떨리던 엘시 선배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고, 멍하니 블루사파이어빛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엘시 선배.”
최대한의 위로를 담아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많이 힘들었군요.”
그 원인이 전하는 위로라는 점이 조금 우습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를 달래야 우선 대화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엘시 선배의 물기 어린 눈동자는,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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