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1. 첫 번째 편지(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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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시 선배의 머리를 쓰다듬은 지도 한참이 지났다.
처음에는 흠칫 몸을 떨며 놀라던 그녀였지만, 내가 계속해서 그녀를 쓰다듬자 내게 공격 의사가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그녀의 몸에 일던 경련이 점차 줄어들었다. 차츰 가파르던 그녀의 호흡이 제 박자를 되찾고 있었다.
“흐으으, 흐으, 흐으…….”
멍하니 나를 응시하는 동안, 엘시 선배는 그렇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진정하려 시도했다. 그 노력이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던지 엘시 선배의 뻣뻣하던 몸에 여유가 깃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온전히 호흡을 정돈하고, 그나마 대화가 가능해질 때까지 필요한 시간은 단 몇 분.
이성을 되찾은 엘시 선배의 볼에는 옅은 홍조가 감돌았다. 그녀는 여전히 눈동자의 물기를 지우지 못한 채로, 내 시선을 애써 피했다.
두렵다기보다는 부끄럽다는 반응이었다. 물론 나에 대한 공포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 그녀가 비명을 내지르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가 지닌 나에 대한 인식이 조금쯤은 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소녀는 흘깃흘깃 내 눈치를 살폈다. 이제 그만 쓰다듬으라고 화를 낼 법도 한데, 그러지는 않았다. 이대로 머리를 쓰다듬는 편이 진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단지 그녀는 아직도 울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내게 한 마디를 쏘아붙였을 뿐이었다.
“……나쁜 새끼.”
속삭인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자그마한 소리였다. 그마저도 무심코 중얼거린 것인지 엘시 선배는 스스로 내뱉고도 깜짝 놀라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 다시 공포가 맺힌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또 다시 손도끼를 휘두르기라도 할까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이대로 손도끼를 뽑아든다면 그것대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긴 했으나, 그 못된 상상을 실행에 옮길 만큼 나는 모질지 못했다.
나는 다만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머금었을 뿐이었다.
“제가 왜 나쁜 놈입니까?”
“너어, 너 때문에… 흐윽, 내,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풀잎에 맺힌 물방울처럼, 엘시 선배는 내가 그렇게 툭 건드리자마자 감정의 격류를 토해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흐릿한 적의가 느껴졌다.
“다, 다들 나를 좆밥 취급하고!”
“후배한테 졌으니 그럴 만도 하죠.”
“기습이었잖아, 이 비열한 놈아!”
엘시 선배가 목소리를 높이니, 아무리 듣기 좋은 목소리라도 귀가 째질 듯 날카로웠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쓰읍, 하는 소리를 내며 낯빛을 굳혔다.
그러자 엘시 선배는 움찔, 하고 몸을 굳히더니, 이내 주눅이 들어 제 고깔모자를 두 손으로 쥐었다.
“무, 물론 내가 졌다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니고… 으, 응. 내가 잘못하긴 했지.”
“그래서 마음고생이 심하셨던 모양이군요.”
내 말에 엘시 선배는 우물쭈물하며 바로 답하지 못했다. 또 함부로 입을 열었다가 방금 전처럼 실언을 할까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래서 그녀가 가장 극적인 반응을 보이던 말을 꺼내기로 했다.
“‘오줌싸개’라고…….”
“……아, 아니야!”
엘시 선배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기라도 할 듯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것만 보더라도 그녀가 그 별명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엘시 선배는 자그마한 주먹을 꼭 쥔 채로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살의가 맺혔다.
“오, 오줌 안 쌌다고! 그거 다 헛소문이란 말이야! 너, 너도 봤잖아. 그렇지, 응?”
“글쎄요,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간절한 눈빛으로 내게 매달리던 엘시 선배는, 내가 말끝을 흐리자 절망한 표정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피식, 하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귀여운 얼굴이긴 했다. 평소 행실만 좋았어도 아카데미 내에서 손꼽히는 인기를 누리지 않았을까.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 셈 칩시다.”
“그, 그래! 나는 오줌싸개 아니란 말이야! 그런데, 그, 그 나쁜 새끼들이… 흐윽, 날 만만히 보고!”
엘시 선배는 감정이 복받쳤는지 다시 옅은 울음소리를 흘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다시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떻게든 팔로 눈가를 쓸어내리며 눈물을 감추려 했으나,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녀의 흐느낌은 더욱 짙어져 가고만 있었다. 그녀가 처량한 목소리를 흘렸다.
“히끅, 자꾸 나 오줌싸개라 하고, 쓸데없이 시비 걸고…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흑, 아무도, 아무도 없었는데, 흐어어엉…….”
당신 같으면 사람들 괴롭히고 다니던 인간 편을 들어주고 싶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반문하고 싶었으나, 우선은 말없이 엘시 선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음껏 울라는 듯.
본래 인간이란 그런 존재였다. 남에게 하던 짓이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오면 한없이 서러워진다. 나는 엘시 선배가 울게 두었다.
“나, 나 시집 어떻게 가… 흐으윽, 가문에서도 아무 말이 없고, 흑, 흐윽…….”
“힘들었겠네요, 엘시 선배.”
나는 전적으로 그녀에게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엘시 선배는 이제야 제 편을 만났다는 듯 더욱 서럽게 울었다.
사실 객관적으로 볼 때 엘시 선배를 편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긴 했다. 패거리를 몰고 다니며 후배 하나를 위협했다가, 역으로 기습당해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했다.
아무리 봐도 꼴좋다고 할 일이지 안타깝다고 할 일은 아니었다. 엘시 선배의 평소 행실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편을 들어준다면 이상한 상황이었다.
나처럼 속셈이 있는 인간이 아니라면 말이다.
슬슬 분위기가 넘어왔다고 생각한 나는, 엘시 선배에게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데, 그게 누구 탓일까요?”
“그, 그야 당연히 너… 히끅, 아, 아니야! 네, 네 잘못은 아니지!”
내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 나를 가리키려던 엘시 선배였으나, 내 표정이 싸늘해지자 곧바로 주장을 철회했다. 그녀의 감정이 흔들리는 지금이 기회였다.
나는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해 보세요. 왜 그날 엘시 선배가 저한테 당했는지를.”
“내, 내가 왜 당했냐고……?”
“그때, 누군가 방해하지 않았습니까?”
내 말에 엘시 선배의 블루사파이어빛 눈동자가 멍해졌다. 그녀의 기억이 과거의 어느 지점을 더듬거리고 있을 터였다. 그날, 나와 엘시 선배가 충돌하던 그때.
또 다른 등장인물이 있었다. 엘시 선배가 나를 경계할 수 없었던 까닭은, 반대로 그 인물을 너무나 경계한 탓이었다.
잠시 침묵에 잠겨 있던 엘시 선배는, 곧 블루사파이어빛 눈동자를 싸늘한 적의로 물들였다. 씹어뱉듯이, 그녀의 입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마치 그때처럼.
“델핀, 유르디나…….”
됐다. 나는 직감했다. 지금 이 순간, 엘시 선배의 분노와 원망은 모두 델핀 선배를 향하게 되었다.
애초에 공포의 대상인 내게 적의를 돌린다는 건, 엘시 선배로서는 불가능했다. 곁에만 있어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정도의 상대였다. 복수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본래부터 싫어하고 있던 인물에게 그 적의를 투사하는 편이 나았다.
그 대상으로 누구보다 알맞은 것이 바로 델핀 선배였다. 나는 계속해서 엘시 선배에게 속삭였다.
“델핀 선배한테 복수할 수 있다면, 어떡하겠습니까?”
“……복수?”
엘시 선배는 말만 들어도 솔깃하다는 듯, 내게 시선을 향했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면 엘시 선배의 명예도 되찾을 수 있겠죠. 다름 아닌 그 델핀 유르디나를 처음으로 패배시킨 사람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 그야 그렇지만… 어, 어떻게?”
“수렵제.”
나는 마치 그것만이 유일한 답이라는 듯, 확신이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엘시 선배의 눈동자가 잠시 멍해졌다.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는,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수렵제에서 우승을 해야만 하는 전통이 있다더군요. 그런데 수렵제에서 우리가 우승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엿을 먹일 수 있겠지… 그래, 그거 괜찮은데!”
내 제안을 들은 엘시 선배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다시 봐도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그녀가 웃는 것만으로도 주변이 한층 밝아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녀가 그 앙증맞은 입을 열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 썅년한테 한 방 먹일 수 있단 말이지! 좋아, 다시는 시건방진 소리가 나오지 않을 만큼 조져 버려야…….”
“……어, 음. 그러니까 드리는 말씀인데, 저와 함께하는 편이 어떻습니까?”
나는 그녀의 입에서 더 험한 말이 나오기 전에, 그렇게 제안했다.
엘시 선배의 의아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엘시 선배는 델핀 선배를 적대할 이유가 충분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도 향간에 도는 소문쯤은 들었을 터다. 그럼에도 굳이 수렵제까지 가서 델핀 선배를 쓰러트려야 할 까닭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리라.
미래에서 온 편지와, 세리아와, 그날 밤 델핀 선배와 나눈 대화까지 얽혀 있는 복잡한 이야기.
그 모든 것을 당장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고민에 빠져 있는 내게, 엘시 선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왔다.
“응? 내가 왜? 너 말고 좀 더 실력 있는 애들이랑 함께하는 편이… 히이익, 아, 알았어! 할게! 하겠습니다! 아니, 함께하게 해주세요!”
마땅히 돌려줄 대답이 없어서, 나는 허리춤의 손도끼를 슬쩍 보여줌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자괴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말솜씨에는 한계가 있었고, 손도끼에는 한계가 없었으니까.
그래도 엘시 선배의 의욕을 복돋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였다. 이제 델핀 선배를 향한 복수심으로 불타는 엘시 선배가 수렵제에 대충 임할 걱정은 없었다.
다만, 엘시 선배는 조금 이상한 버릇이 든 듯했다.
“그… 야, 야.”
이제 슬슬 헤어질 때였다. 엘시 선배도 진정한 듯하고, 서로 갈 길 가려는데 갑작스레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아담한 체구의 소녀가 볼을 살짝 붉힌 채, 내 옷깃을 꾹꾹 잡아당기고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그게 말이야…….”
소녀는 굉장히 부끄러워 보였다. 나는 그녀가 각오를 다질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주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궁금하기도 했다.
결국 엘시 선배는 눈을 질끈 감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게 부탁했다.
“또, 또 쓰다듬어 주면 안 될까……?”
당연히 나는 곧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그 제안이 너무 의외라서, 나도 순간적으로 멍청히 그녀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엘시 선배는 더더욱 부끄러워졌는지, 새빨개진 얼굴을 툭 떨구었다. 괜히 내 옷깃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부, 불안하단 말이야!”
수치심이 가득 들어간 목소리로, 엘시 선배는 그렇게 외쳤다. 그제야 나는 대략적인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악질적인 소문에 시달리던 그녀였다. 한껏 예민해진 신경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을 테지. 하물며 얼마 전 그녀는 내게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다.
그 상처를 치유받고 싶은 것이다. 최소한 이 사태를 만든 원흉인 내게 더는 공격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안심할 수 있겠지.
그 정도라면야, 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내 손바닥이 다시금 엘시 선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솔직히 고깔모자가 걸리적거려서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엘시 선배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얌전히 내 쓰다듬을 받아들였다. 이러니 꽤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와 화해하게 된 기념으로 농을 던졌다.
“앞으로 착하게 굴면 또 쓰다듬어 줄게요.”
“……누, 누가 네 애완동물이라도 되는 줄 알아!”
엘시 선배는 울컥해서 그렇게 외쳤지만, 곧 아차 싶었던지 내 눈치를 살피며 다시 주눅이 들고 말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다시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간에 믿음직한 동료를 얻었다.
이대로 셀린만 설득할 수 있다면, 수렵제 우승을 향한 고비 하나는 넘긴 셈이겠지.
나는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날, 셀린과 세리아 사이에서 칼부림이 났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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